무인지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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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정규군이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인 1914년 8월 [[프랑스]]에 상륙했을 때 무인지대라는 용어를 널리 쓰지 않았다. 전쟁 발발 시 참호 사이 땅을 일컫는 말로 주로 '참호 사이'라는 표현을 썼다. 무인지대라는 표현은 [[어네스트 스윈튼]]이 처음 썼다. 그는 1914년 [[바다로의 경주]]와 관련해 이 용어를 썼다. [[크리스마스 정전]] 이후 더 널리 쓰였고 공식 문서, 신문 등에 더 등장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무인지대는 10야드보다 좁은 곳도 있었고 수백 야드에 걸친 곳도 있었다. [[기관총]], [[박격포]], [[포병]], [[소총수]]로 강력히 무장된 곳은 철책선, 급조[[지뢰]], [[시체]], 폭발, 화염으로 채워졌었다. 전투로 황폐화됐고 [[포]]때문에 구덩이가 생겼다. 양쪽 참호로부터의 공격에 개방됐었고 진격이 어려웠다. 이러한 무인지대는 전차]]전차를 비롯한 신무기들에 의해 무력화 될 때까지 전형적인 전장의 모습으로 남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무인지대의 영향은 [[베르됭]]을 비롯한 곳들에 남아 있다. 아직 [[불발탄]]이 묻혀있고 [[비소]], [[염소 (원소)|염소]], [[포스젠]]에 오염되어 있는 이곳은 [[적색 구역]](Zone Rouge)라 불리는데 여전히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