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민주 항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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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 ===
하지만,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1987년 4월 13일, 그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ref name="imnews.imbc.com">{{웹 인용 |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802846_6035.html|제목 = [전두환대통령 특별담화]임기 만료 후 후임자에게 정부 이양|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4월 13일|확인날짜 = 2013년 4월 4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50402115046/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802846_6035.html|보존날짜 = 2015년 04월 02일|깨진링크 = 예}}</ref>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인용문|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촉박한 임기와 현재의 국가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은 평화적인 정부 이양과 서울올림픽이라는 양대 국가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 논의를 지양할 것을 선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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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이 결단은 오늘의 망국을 타개하고 국가 목표를 수행하는 데 현실적으로 최선의 길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서 국민 여러분께서 전폭적인 도움과 신뢰를 보내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자 합니다. 2가지의 국가 대사를 완성한 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개헌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한 좋은 방안이 발견될 수 있을 것으로 본인은 확신하는 바입니다. 이제 우리의 정치도 나라와 사회 성장발전에 부응하는 선진 정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신념에서 본인은 남은 기간 동안 민주발전의 기반을 더욱 넓히고 사회 안정과 국민 화합을 다지기 위한 조치들을 더욱 과감하게 추진해 나가고자 합니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본인은 국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지방자치제를 강제적으로 실시해 나갈 계획입니다. 이 문제가 조속히 매듭지어져서 본인의 임기 내에 지방 자치가 시작된다면 민주 발전을 위한 또 하나의 튼튼한 토대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제는 우리의 정치도 시대의 변천과 사회의 발전에 따라 꾸준한 신진대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낡은 시대의 낡은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인물에게 발전하는 나라의 장래를 의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전환기의 정치를 이끌어나갈 참신하고 유능한 정치 신진들을 광범위하게 포용하고 육성하는 정당의 노력은 매우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1987년 4월 13일 대통령 전두환<ref name="imnews.imbc.com"/>}}
 
이후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차질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ref>{{웹 인용 |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802850_6035.html|제목 = [전두환대통령 특별담화]대통령 선거인단, 선거 연내 실시 [윤종부]|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4월 13일|확인날짜 = 2013년 4월 4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60616171326/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802850_6035.html|보존날짜 = 2016년 06월 16일|깨진링크 = 예}}</ref>
 
하지만, 이는 '호헌 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ref>{{웹 인용 |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802857_6035.html|제목 = [전두환대통령 특별담화]담화 발표에 국민들 기대 가져[안재기]|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4월 13일|확인날짜 = 2013년 4월 4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41229043622/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802857_6035.html|보존날짜 = 2014년 12월 29일|깨진링크 = 예}}</ref> 기대는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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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
1987년 [[5월 17일]], 노동자였던 황보영국은 부산상고(현 개성고) 앞에서 '독재타도' 등을 외치며 분신했으며, 일주일 뒤 사망하였다.<ref>이상민·박진국·전대식, [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7/0605/010020070605.1005105952.html 시민이쓰는 6월항쟁 - (6) 청춘 불사른 황보영국씨] {{웨이백|url=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7/0605/010020070605.1005105952.html |date=20111124030600 }}, [[부산일보]]</ref> 이튿날인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광주항쟁 7주년 미사에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경찰에 의해 축소·은폐되었음을 폭로하였다.<ref>상세한 것은 [[박종철]] 참조.</ref><ref>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경찰에 의해 축소·은폐된 사실은 박종철의 삶을 소재로 정하여 제작한 [[문화방송]] 드라마에서 고발된 적이 있다.</ref> 이에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정권을 비판하던 국민들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옳지 못함에 크게 분노하였고, 이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자주 일어났다. 이후 [[5월 23일]] "'''박종철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들은 [[6월 10일]]에 규탄대회를 갖기로 결정하였다(그날은 노태우가 민정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날이기도 하다).
 
전두환은 후계자로 국무총리 노신영을 지명했으나, [[5월 26일]] 고문치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노신영]] 국무총리를 경질하였다. 이후 [[이한기]]를 신임 총리로 교체하였다. 이튿날 전국의 재야지도자 2200여 명이 함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였고, [[한국 기독교 장로회]] [[향린교회]]에서 발기인 대회<ref>향린교회에서는 이 사건을 기념패로 만들어 기념하고 있다.</ref> 를 열었고, "호헌 조치 철회 및 직선제개헌 공동쟁취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를 향린교회에서는 교회문에 기념패를 만들어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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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1일]] ===
재야와 시민단체의 시위가 터지자, 치안당국은 전날 있었던 야권의 집회는 '폭력성을 드러낸 법질서 유린행위'였다고 지적하였고, '앞으로도 법질서 파괴 행위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밝혔다.<ref name="ReferenceA">{{웹 인용 |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628_6035.html|제목 = 치안본부, 야권집회 불법으로 간주. 질서 파괴 엄단[김진원]|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6월 11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60513025847/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628_6035.html|보존날짜 = 2016년 05월 13일|깨진링크 = 예}}</ref> 당시 치안본부장이었던 [[권복경]]은 야권의 집회와 관련한 발표를 통해서 주최 측이 비폭력집회를 열겠다고 공언하고도 전국에 걸쳐 폭력적 난동사태를 유발한 것은 법질서 유린행위였다고 지적했다.<ref name="ReferenceA"/>
 
이 날 서울 명동성당에서는 대학생 등 600여 명이 경찰과 대치하며 1주일 째 시위를 계속했고, 남대문시장 등 명동 외곽 지대에서조차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다.<ref>{{웹 인용 |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629_6035.html|제목 = 오늘 대학생 중심 명동일대 산발적 시위[강성구]|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6월 11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40102200856/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629_6035.html|보존날짜 = 2014년 01월 02일|깨진링크 = 예}}</ref>
 
=== [[6월 12일]] ===
6월 10일 대회 끝에 명동성당에 들어간 시위농성자들은 사흘 째 시위농성을 벌였고, 서울 도심에서도 산발적인 시위가 터졌다.<ref name="ReferenceB">{{웹 인용 |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672_6035.html|제목 = [명동시위]명동성당 시위 사흘째, 도심내 산발적 시위[정태성]|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6월 12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60305010837/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672_6035.html|보존날짜 = 2016년 03월 05일|깨진링크 = 예}}</ref> 그러자 당국은 명동성당 시위 사건에 단호하게 대처한다는 방침을 세우는 한편 사태 해결을 위해서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ref name="ReferenceB"/>
 
명동성당을 점거한 뒤 시위를 벌여온 농성자들은 당초 600여 명에서 350여 명으로 숫자가 줄어들었으나, 경찰의 해산 종용에도 불구하고 계속 농성을 벌였다.<ref name="ReferenceB"/> 시위 농성자들은 11일과는 달리 바리케이트를 철거하고 극렬한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성당을 점거한 채 농성을 풀지 않고 계속 경찰과 대치하였다.<ref name="Referenc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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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3일]] ===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정부와 [[민주정의당|여당]]은 당정회의를 잇달아 열어서 6.10 대회 이후에 계속되고 있는 시위 사태에 대처 방안을 논의하였으며, 사회혼란 행위에 대해서는 강력히 대응하기로 결정했다.<ref>{{웹 인용 |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703_6035.html|제목 = [명동시위]고위시국대책회의, 시위 대책 논의[김석진]|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6월 13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60305012151/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703_6035.html|보존날짜 = 2016년 03월 05일|깨진링크 = 예}}</ref>
 
한편 [[명동성당]]은 별다른 충돌 없이 [[혼인성사|혼배성사]]와 [[미사]]가 예정대로 열리는 등 평화로운 모습을 보였지만 팽팽한 긴장은 계속되었다.<ref name="ReferenceC">{{웹 인용 |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707_6035.html|제목 = [명동시위]명동성당 농성 나흘째, 결혼식 및 미사 거행[정태성]|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6월 13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50521110156/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707_6035.html|보존날짜 = 2015년 05월 21일|깨진링크 = 예}}</ref> 성당을 점거하고 있는 350여 명의 시위 농성자들은 오전 9시와 11시 50분 두 차례에 걸쳐 경찰저지선 50m앞까지 진출해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ref name="ReferenceC"/> 하지만 농성자들이 돌이나 화염병을 던지지 않았고, 경찰도 최루탄을 쏘지 않아 서로가 자제하는 모습이 역력했다.<ref name="ReferenceC"/> 평화적인 모습이 계속되었으나 점거학생들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연행, 구속된 사람들이 전원 석방될 때까지 농성을 계속하겠다고 밝혔고, 오후 2시부터는 서울지역 200여 명의 천주교 사제들이 이번 사태와 관련해 대책회의를 열고 학생들을 지지하고 보호하겠다는 전날의 성명을 재확인했다.<ref name="ReferenceC"/>
 
=== [[6월 14일]] ===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학생들은 오전 한때 성당 입구 밖으로 나와서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으나 10시 20분 이후부터는 문화관 대강당에서 시국 토론회를 가졌으며 신도들은 오전 7시 미사를 비롯해서 예정된 휴일 미사에 참가했다.<ref name="박광온1">{{웹 인용 |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738_6035.html|제목 = [명동시위]명동성당 점거농성 5일째,명동 일대 산발시위[박광온]|저자 = MBC뉴스|날짜 = 1987년 6월 14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51206031856/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738_6035.html|보존날짜 = 2015년 12월 06일|깨진링크 = 예}}</ref> 오전, 오후 미사가 끝난 뒤에 성당 광장에서 한때 연좌시위가 있었으나 충돌없이 곧 해산했다.<ref name="박광온1"/>
 
그 날 오후 명동성당 주변에 모여든 서울시내 대학생 2000여 명은 상업은행 본점, 롯데쇼핑, 사보이 호텔, 중앙극장 그리고 퍼시픽 호텔 앞 등 명동 일대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ref name="박광온1"/> 그러나 경찰은 최루탄 발사를 자제했으며, 시위대 역시 돌과 화염병을 던지지 않아 이전과 같은 격렬한 시위 양상은 없었다.<ref name="박광온1"/> 김병도 명동성당 주임 신부는 성명을 낸 뒤, '민주화를 위한 학생들의 노력에 성원을 보내지만, 교회가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모든 부분에서 학생들과 뜻을 같이할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직장과 학교 그리고 가정으로 돌아가 달라'라고 권고했다.<ref name="박광온1"/>
 
=== [[6월 15일]] ===
명동성당을 점거하고 있던 농성자들은 사제단의 뜻을 받아들여 해산했다.<ref name="박광온2">{{웹 인용 |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764_6035.html|제목 = [명동시위]명동성당 농성 6일만에 자진 해산[박광온]|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6월 15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60305013909/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764_6035.html|보존날짜 = 2016년 03월 05일|깨진링크 = 예}}</ref> 그들은 오후 1시 30분 농성을 해산하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였고, 오후 2시 성당 입구에서 해산식을 가졌다.<ref name="박광온2"/>
 
그러나 서울을 비롯한 지역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계속되었고, 특히 서울의 경우 명동을 비롯한 시내 일부 대학에서 명동 사태를 지지하는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됐고 부산, 대전, 대구 등 일부 지역에서도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ref name="박광온2"/>
 
=== [[6월 16일]] ===
명동성당 점거 농성에 이어 시위가 계속 되어 경남 진주에서는 파출소 4개에서 화재가 발생했다.<ref name="강성구1">{{웹 인용 |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810_6035.html|제목 = 지방 산발 시위, 57개 대학 4만여명[강성구]|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6월 16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50520233007/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810_6035.html|보존날짜 = 2015년 05월 20일|깨진링크 = 예}}</ref> 치안 본부에 따르면 당일 전국 57개 대학에서 4만여 명이 교내 시위를 벌였는데 주로 부산과 진주, 대구 지역에서 과격한 시위가 있었던 것으로 집계되었다.<ref name="강성구1"/> 그리고 10일 당시 구속되었던 사람들을 석방하겠다고 밝혔다.<ref>{{웹 인용 |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811_6035.html|제목 = 검찰과 경찰, 6.10 구속자 대폭 석방[문철호]|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6월 16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60305012249/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811_6035.html|보존날짜 = 2016년 03월 05일|깨진링크 = 예}}</ref>
 
그러나 시위가 계속되자 서울교육대학교에 대해 무기한 휴업령을 내렸다.<ref>{{웹 인용 |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812_6035.html|제목 = 서울교육대학 무기한 휴업령[유기철]|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6월 16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40102200120/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812_6035.html|보존날짜 = 2014년 01월 02일|깨진링크 = 예}}</ref>
 
=== [[6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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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 6월 항쟁이 일어난 [[6월 10일]]은 [[일제 강점기]]인 [[1926년]], [[조선]] 마지막 임금 [[대한제국 순종|순종]](純宗)의 장례 때 독립운동세력과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6.10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이기도 하다. [[2007년]] 한국일보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학생 10명 중 6명은 6월 항쟁을 잘 모르는 것으로 밝혀졌다.<ref>[{{웹 인용 |url=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705/h2007052718461721950.htm |제목=대학생 10명 중 6명 "6·10항쟁 잘 모릅니다"] |확인날짜=2007년 05월 27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70929124302/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705/h2007052718461721950.htm |보존날짜=2007년 09월 29일 |깨진링크=예 }}</ref>
* 6월 항쟁이 진행되던 6월 19일 오전 10시 30분 전두환은 군 투입 준비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미국의 반대로 같은 날 오후 4시 30분 비상조치 계획과 군 출동 지시는 유보됐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201479 전두환 “군 동원” 엄포에도 국본 “6·26 강행"]</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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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정아, 손세영, [http://www.kdemo.or.kr/book/data/page/6/post/422 6월항쟁을 기록하다], (사)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http://www.610.or.kr 인터넷 6월항쟁 기념관/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 [https://web.archive.org/web/20111124033840/http://www.kdemocracy.or.kr/Minju/Minju2_PDS/minju2_MediaPDS_view.asp?bid=pds_vod&num=54&page=1&od=&ky=&sh= 최규석 저 - 《100℃》]
 
{{대한민국의 대규모 시위 및 농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