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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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연과 노황제의 붕어: 역사적 사실과 다르며 이 내용은 황위찬탈설 중 하나인 무조탄위설을 비튼 내용에 불과합니다 (참고로 이중톈은 역사학자가 아니라 대중적인 글은 잘 쓰나 왜곡으로 비판받는 중문학자라 역사 저서로 참고하기에 적절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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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연과 노황제의 붕어: 역사적 사실과 다르거나 시기상 맞지 않는 작위 오류 수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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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사자당(皇四子黨)
** 4남 옹군왕 윤진(雍郡王 胤禛)
** 13남 패자 윤상(貝子 胤祥)
** 사천순무 연갱요(四川巡撫 年羹堯)
* 황팔자당(皇八子黨)
** 8남 패륵 윤사(貝勒 胤禩)
** 9남 패자 윤당(貝子 胤禟)
** 10남 패자돈군왕 윤아(貝子 胤䄉)
** 14남 패자 윤제(貝子 胤禵)
** 영시위내대신 동국유(領侍衛內大臣 佟國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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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astern Qing Tombs.jpg|220px|thumb|left|강희제가 묻힌 [[청동릉]]의 경릉 침전]]
 
강희제 붕어 후, 8황자 염친왕패륵 윤사, 9황자 혁군왕패자 윤당, 10황자 돈군왕 윤아 등은 훗날 목숨이 위태로울까 봐 그들의 넷째 형 윤진이 황위에 오르는 것에 절대 반대하여 그 대안으로 역시 ‘4’자가 붙어 있는 14황자 순군왕대장군왕 윤제를 후계자로 우겼으나 강희제의 전위 조서에는 후계자가 4남 윤진으로 표기되어 있었다.<ref name="이중텐"/> 당시 강희제의 유조의 내용 중 황위 승계에 대한 내용을 보면 이렇다. {{인용문2|제4황자 옹친왕 윤진은 인품이 귀중하고 사려가 깊으니 짐이 생각하건대 필히 대통을 이을 자격을 갖추었다. 고로 짐이 죽은 후 짐의 뒤를 이어 즉시 황제의 자리를 잇도록 하고 예법에 따라 상복을 입다가 27일에 평복으로 갈아입고 새 황제의 즉위를 만천하에 알려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알게 하라.<ref>雍親王皇四子胤禛, 人品貴重, 深蕭朕躬:必能克承大統。著繼朕登基卽皇帝位卽傳位於皇四子胤禛, 即遵典制持服。二十七日釋服,釋布告中外,咸使聞知。</ref>}}
그리고 4황자 옹친왕 윤진은 유조에 쓰여 있는대로 황위에 오를 명분을 세우고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강희제의 13남 패륵 윤상에게 원래 윤사의 파가 장악하고 있는 북경 근교의 풍대병영의 군사를 포섭·동원하도록 명령하고 이 군사들을 동원해 반대 세력을 모두 제거하고 황위에 오르니, 이가 청의 제5대 황제인 [[옹정제]]이다. 그러나 옹정제가 황제에 오른 이유는 유조개위설, 개조찬위설, 무조탄위설 등 여러 설로 나뉘어 있는데, 일단 당시 강희제는 황위를 물려주려면 당사자인 옹정제를 직접 불러서 황위를 넘긴다는 얘기를 했어야 하나 옹정제나 다른 황자들 및 중신들에게 말하지 않고 곁에 있던 융과다에게만 말을 하였다 한다. 또한 만약 옹정제를 후계자로 점찍었다면 옹정제에게 황위를 잘 부탁한다는 얘기를 하기는커녕 자신의 병세에 대해서만 얘기를 하였다. 다른 유명한 가설로는 옹정제의 명령으로 융과다가 강희제가 원래 점찍어 놓은 ‘14황자 윤제에게 물려준다’(傳位十四皇子) 대신 ‘4황자 윤진에게 물려준다’(傳位于四皇子)라고 교묘히 바꾸고 조작된 이 유조를 공포하여 황위에 올랐다는 설이다.<ref name="이중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