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케후 마사유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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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 한신 DC 시절<br />(2015년 8월 29일, [[한신 나루오하마 구장]]에서)
|국적 = {{JPN}}
|출신지 = [[지바현]] [[지바 시지바시]] [[주오 구주오구 (지바 시지바시)|주오 구주오구]]<br />([[니가타현]] [[산조 시산조시]] 태생)
|생년월일 = {{출생일과 나이|1955|5|9}}
|사망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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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t = 카케후 마사유키
}}
'''가케후 마사유키'''({{llang|ja|掛布 雅之}}, [[1955년]] [[5월 9일]] ~ )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 야구 해설가·평론가이다. [[지바현]] [[지바시]] [[주오구 (지바시)|주오구]] 출신이며 현역 시절 포지션은 [[내야수]]였다.
 
[[니가타현]] [[산조 시산조시]]에서 태어나 프로 선수 시절 [[한신 타이거스]]를 대표하는 주력 선수로서 활약했고 한신 팬들이나 언론에서는 ‘'''미스터 타이거스'''’({{lang|ja|ミスタータイガース}})<ref>또는 ‘(4대째)미스터 타이거스’라고 불린다.</ref> 라고도 불린다. 현역 은퇴 후 1989년부터는 [[스포츠 호치]] 야구 평론가 및 [[스카이 에이]] 야구 해설자를 거쳐 2013년 10월 21일부터는 한신의 제너럴 매니저 지휘 육성 및 타격 코디네이터 → 구단 본부 지휘 육성 & 타격 코디네이터(Development Coordinator, 약칭 ‘DC’)<ref>취임 후 처음으로 지도한 2013년 추계 스프링 캠프에서는 각 언론사의 합의에 의해서 같은 해 11월 4일자 신문 기사에서 ‘DC’라는 약칭을 사용하게 됐다(관련 기사: {{웹 인용 |url=http://www.sanspo.com/baseball/news/20131104/tig13110405010005-n1.html |제목=보관 된 사본 |확인날짜=2013년 11월 06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104174400/http://www.sanspo.com/baseball/news/20131104/tig13110405010005-n1.html |보존날짜=2013년 11월 04일 |깨진링크=예 |=http://www.sanspo.com/baseball/news/20131104/tig13110405010005-n1.html }}).</ref> 로서 한신에 복귀했다. 2015년까지 DC, 2016년부터 2017년까지 한신 2군 감독을 맡으면서 선수들을 지도했다.<ref name="Tigers farm">[http://www.nikkansports.com/baseball/news/1557852.html {{lang|ja|阪神掛布2軍監督が契約、金本監督サポートへ意欲}}] - 닛칸 스포츠, 2015년 10월 26일</ref> 2017년 11월 1일부터 구단으로서는 최초로 오너부 시니어 이그제큐티브 어드바이저(Senior Executive Advisor, 약칭 ‘SEA’)로 부임했다.<ref name="SEA">[http://www.sponichi.co.jp/baseball/news/2017/10/27/kiji/20171027s00001173203000c.html {{lang|ja|阪神 掛布氏がSEAに就任 初のフロント入り 存在感、発信力にも期待}}] - 스포츠 닛폰, 2017년 10월 27일</ref>
 
== 인물 ==
=== 어린 시절 ===
어머니의 친정인 [[니가타현]] [[산조 시산조시]]에서 태어나 1살 무렵부터 아버지의 고향인 [[지바현]] [[지바 시지바시]]에서 자랐다.<ref name="맹호가 포효했다">《맹호가 포효했다 - 열구비원》 p.159 ~ 161</ref><ref name="호타 폭발">《호타 폭발! 우리가 가케후 마사유키 : 등번호 31은 타이거스의 보물이다!》 [[고단샤]], 1982년, p.50 ~ 51</ref> ‘가케후’({{lang|ja|掛布}})라는 희귀 성의 [[조상|근원]]은 할아버지의 출신지 [[아이치현]] [[이누야마 시이누야마시]] 부근에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ref name="맹호가 포효했다"/> ‘마사유키’({{lang|ja|雅之}})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배우 [[모리 마사유키 (배우)|모리 마사유키]]의 열혈 팬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ref name="맹호가 포효했다"/> 아버지는 전쟁 전에 지바 상업학교의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야구부 감독으로 [[일본의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고시엔 대회]] 출전을 바로 눈앞에 둔 시점에서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야구와의 연을 끊었다.<ref name="호타 폭발"/> 전쟁 이후에는 [[중국]]에서 돌아와 직업을 바꾼 뒤 고향에서 음식점을 운영했다.<ref name="호타 폭발"/> 생가가 있었던 장소는 현재 [[이소마루 수산]] [[지바추오 역]]전점이 들어서 있다. 아버지는 2006년에 사망했다.<ref>[http://www.iza.ne.jp/kiji/sports/news/140122/spo14012216170018-n1.html {{lang|ja|【関西笑談】掛布さん、おやじに投げ飛ばされた「1人で野球はできない」}}] - 산케이 디지털 iza, 2014년 1월 22일</ref>
 
=== 아마추어 시절 ===
어린 시절에는 [[검도]]를 시작하여 경찰서에서 연습했으나 초등학교 시절 보호구를 사달라고 부모님에게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해 하는 수 없이 그만뒀다. 아버지가 중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복귀하자 아버지의 밑에서 야구를 시작했다. 이때 아버지에 의해 주로 쓰는 팔을 교정받았다는 자료가 많았지만 실제로는 교정한 바 없으며 본인도 오른손으로 던지고 왼손으로 치는 선수가 된 이유는 모르겠다고 밝혔다. 참고로 펜을 잡을 때는 오른손, 젓가락을 잡을 때는 왼손을 사용한다.<ref>[http://www.sanspo.com/baseball/photos/20161209/tig16120910000001-p1.html {{lang|ja|【掛布雅之のホットコーナー】遠井吾郎さんがONが味つけしてくれた野球人生}}] - 산케이 스포츠, 2016년 12월 9일</ref>
 
나라시노 고등학교 2학년 때 이시이 요시히로 감독의 지휘 하에 4번 타자 겸 [[유격수]]로서 1972년 하계 고시엔 지바 현지바현 대회(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지바 대회)에 예선에서 승리했고 히가시간토 대회 결승에서는 유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던 조시 상업고등학교와 맞대결을 펼쳤다. 이 경기에서 [[네모토 다카시 (야구인)|네모토 다카시]] 투수로부터 선제점이 되는 안타를 날려 2대 0의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고시엔 대회(제54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1차전 상대인 도요 대학 부속 히메지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패했다(당시 히메지 고등학교에는 훗날 [[한신 타이거스]]에서 팀 동료가 되는 [[야마카와 다케시]]가 있었는데 이 경기에서 만루 홈런을 때려냈다). 3학년 때인 1973년 하계 소속 현 예선 준준결승에서 에이스 [[후루야 히데오]]가 소속된 기사라즈추오 고등학교에게 연장 11회 접전 끝에 1대 2로 끝내기 패배를 당해 고시엔 진출에는 실패했다. 팀 동기로 함께 클린업 타자로 활약했던 [[아베 신노스케]]의 아버지이다. 두 살 아래인 [[오가와 준지]](1975년 하계 대회 우승 투수)는 당시 가케후가 [[죽도]] 주머니에 방망이를 넣어 매일 자신의 집에 가지고 돌아갔다고 말했다.<ref name="wbol160127">[http://column.sp.baseball.findfriends.jp/?pid=column_detail&id=002-20160127-01 {{lang|ja|掛布雅之×小川淳司 習志野高OB対談 「あの当時“集合”がイヤでしたね」}}] - 슈칸 베이스볼 ONLINE, 2016년 1월 27일</ref>
 
그해 가을, 아버지의 지바 상업고등학교의 야구부장 겸 감독이었던 시절 제자였던 [[오가와 요시하루]] 당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야쿠르트]] 2군 감독에게 입단 부탁을 넣었다가 거절당해 당시 지바 상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았던 시노다 히토시에게 프로 구단의 중개 역할을 부탁했다. 시노다와 친분이 있던 한신의 [[안도 모토오]](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고 코치를 맡음)에게 중개를 부탁한 덕분에 당시 [[가네다 마사야스]] 감독에게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2군 캠프에 대동했다(사실상의 입단 테스트였다고 한다). 드래프트 6순위로 지명됐고 계약금 500만 엔, 연봉 84만 엔으로 입단 계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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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 야구 선수 시절 ===
==== 1970년대 ====
입단 이후 1974년 춘계 스프링 캠프에서 철저한 단련을 받았다. 시범 경기에서의 첫 출전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난카이 호크스]]와의 경기였는데전이었는데 같은 해 [[노자키 쓰네오]](1971년 드래프트 1순위로 난카이에 입단)로부터 대타로서 첫 안타를 기록했다. 시범 경기에 첫 선발로 출전한 것은 3월 21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전([[도쿠시마 현도쿠시마현 나루토 종합 운동 공원 야구장|나루토 구장]])에서 중심축인 [[유격수]] [[후지타 다이라]]가 결혼식 때문에 경기에서 빠져 7번·유격수 자리에 그 대역으로 들어간 것이었으나 [[히가시오 오사무]]를 상대로 4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 그리고 3일 후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긴테쓰 버펄로스]]전([[닛폰 생명 구장]])에서는 내야의 중심인 [[노다 유키토시]](이후에는 매니저)가 모친상을 당하여 귀향하는 바람에 또다시 가케후가 8번·[[3루수]]로 대신 출전하게 됐는데 이 경기에서 4타수 4안타를 기록하는 맹활약을 펼쳤다. 시범 경기가 끝난 뒤 최종 성적은 18타수 8안타, 2개의 2루타를 때려내는 등의 활약으로 개막 1군에 합류, 고졸 1년 째에 개막전 1군에 정착했으며 같은 해에는 주니어 올스타전에도 출전했다. 고졸 신인으로서 1군에서의 홈런은 3개이며, 구단 기록의 8개(1957년, [[나미키 데루오]])에는 미치지 못했다.
 
고교 시절에는 유격수였지만 당시 한신에는 후지타 다이라가 부동의 주전이었기 때문에 3루수를 맡았다. 가케후와 같은 해 드래프트 1순위로 입단한 [[사노 노리요시]]도 3루수였기 때문에 포지션 경쟁이 벌어졌다. 1975년에 감독으로 취임한 [[요시다 요시오]]는 당초 상대가 우완 투수일 때는 좌타자 가케후, 좌완 투수일 때는 우타자 사노를 기용하는 식으로 나갔으나 가케후가 곧바로 3루수 자리를 굳혔고<ref>요시다에 의하면 당시 [[이치에다 슈헤이]] 코치가 가케후를 강력 추천했다고 한다(《우시와카마루의 이력서》 닛케이 비즈니스 인문고, 2009년, p.161).</ref> 사노는 외야수로 옮겨갔다. 가케후가 포지션을 둘러싸고 라이벌로 느낀 것은 이 때의 사노 밖에 없었다고 한다. 1980년에 [[와세다 대학]] 출신의 거물급 3루수였던 [[오카다 아키노부]]가 입단했을 때에도 언론이 “포지션 쟁탈전이 벌어지나?”라고 떠들썩했을 때도 가케후는 이미 중심 선수로서 여유가 넘쳤고 사노만큼 라이벌 의식은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ref>분슌 비주얼 문고 - ‘호타열전 2’, [[분게이슌주]]</ref>
 
1976년, [[오 사다하루]]를 웃도는 타율 5위에 랭크되며 같은 해 [[일본 프로 야구 베스트 나인|베스트 나인]]에 선정됐는데 가케후는 “타격 10위권에서 사다하루보다 위에 섰다는 게 큰 자신감을 느꼈다”라고 말했다.<ref>분슌 Number 비디오 - ‘열투! 한신 vs 요미우리 1200 경기’, [[분게이슌주]]</ref> 더 나아가 이듬해인 1977년에도 대활약을 펼쳤고, 응원가 ‘GO! GO! 가케후’도 대대적으로 팔리기도 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응원단은 가케후가 타석에 들어서면 응원가를 연주하게 됐다. 최초의 응원가는 ‘GO! GO! 가케후’의 후렴구였는데 후에 변경됐다.
 
1979년, ‘미스터 타이거스’로 불리던 [[다부치 고이치]]가 이적한 뒤 팀의 주포로서 구단 신기록인 48홈런(그 때까지의 구단 최고 기록은 [[후지무라 후미오]]가 기록했던 46홈런이었는데 그 후 1985년에 [[랜디 바스]]가 54개로 기록을 경신했으나 일본인 선수로서는 현재까지도 구단 최고 기록)하며 [[일본 프로 야구 최다 홈런|홈런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그 해 시즌 종료 후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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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과 1984년에도 홈런왕을 차지했고 특히 1982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최다 타점|타점왕]]을 석권하는 등 다부치를 대신하는 새로운 ‘미스터 타이거스’라는 별명으로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더욱이 당시에는 1979년에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세이부 라이온스]]로 이적한 다부치가 미스터 타이거스는 아니라고 말했고 가케후가 후지무라 후미오, [[무라야마 미노루]]로 계속되는 3대째의 미스터 타이거스라고 칭했으나 2002년에 다부치가 타격 코치로서 한신에 복귀한 이후에는 다부치를 3대째, 가케후를 4대째라고 부르는 것이 증가하고 있다). 1980년대 전반기에는 부동의 4번 타자였는데 동갑내기이기도 한 [[에가와 스구루]]와의 맞대결은 두 사람 모두 전성기였던 1980년대 전반의 일본 프로 야구 최고의 명승부로 꼽힌다. 1984년에 홈런왕을 차지했을 때는 [[주니치 드래곤스]]의 [[우노 마사루]]와 치열한 타이틀 경쟁을 펼쳤는데 마지막 맞대결 2연전에서 가케후와 우노 두 사람이 모든 타석에서 [[고의 사구]]를 당하며 결국 타이틀을 나눠가지게 됐다. 이들과의 승부를 피했던 고의 사구에 대해 [[센트럴 리그]] 회장이 두 팀의 감독([[안도 모토오]]와 [[야마우치 가즈히로 (1932년)|야마우치 가즈히로]])에게 주의를 줬고, 최종적으로는 기자단에게 사과하는 선에서 마무리 됐다.
 
1985년에는 3번 바스, 4번 가케후, 5번 [[오카다 아키노부]]로 이어지는 강력한 클린업 트리오를 형성하여 한신의 리그 우승 및 [[1985년 일본 시리즈|일본 시리즈]] 우승에도 큰 기여를 했다. 같은 해 4월 17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맞대결에서전에서 일명 ‘[[백 스크린 3연발]]’(가케후는 백 스크린 왼쪽에 들어갔기 때문에 상금을 놓칠 뻔하다가 스폰서의 재량으로 받았다)을 터뜨렸는데 이 경기에서는 바스에 이어 홈런을 때려내 그 해의 상징으로 회자되고 있다. 또, 요시다 감독은 일본 시리즈 우승과 관련한 기자 회견에서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오른 요인을 물었을 때 “안에는 일본을 대표하는 4번(타자)이 있었으니까”라고 대답했다.
 
1986년 4월 20일 주니치와의 경기에서주니치전에서 신인이자 상대 투수인 [[사이토 마나부 (야구인)|사이토 마나부]]가 던진 [[몸에 맞는 볼]]에 손목을 맞아 골절돼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이 663경기로 중단됐다. 훗날 가케후는 이 부상으로 그 때까지 팽팽하게 조여져 있던 긴장의 끈이 끊어지면서 부상을 변명으로 삼는 ‘나약한 자신’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왔다고 토로했다.<ref name="GTP127">또한 1989년에 [[와세다 대학]] [[오쿠마 강당]]에서 [[야자와 겐이치]](전 주니치 선수)와 강연회를 했을 때에는 “사이토 선수의 제구력은 알고 있었다. ‘위험하다, 온다’라고 알고 있었으면서도 끝내 피하지 못했던 게 유감이었다”라고 말했는데 원망하는 듯한 발언은 없었다(《요미우리-한신론》 p.127).</ref> 5월 중순에 복귀했지만 11일 후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요미우리전에서 3루 수비를 하던 도중 바운드된 타구에 맞아 오른쪽 어깨를 다쳐 한 달 가까이 결장했다. 게다가 8월 26일에는 골절 때문에 세 번째로 팀 전력에서 이탈했다가 시즌 종료가 임박한 시점에서야 겨우 복귀했다. 이 시즌 후반 이후, 화려한 배팅은 그림자를 감췄다.
 
1987년 정규 시즌에서는 허리 통증 때문에 성적이 부진했고 팀의 컨디션과 보조를 맞추게 됐다. 약 한 달간 등록이 말소돼 6월에는 프로 입단 이후 처음으로 2군에 내려가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같은 해 시즌 개막을 앞둔 3월 경에 [[음주운전]] 혐의로 현행범으로 체포됐는데 당시 구단주였던 [[구마 슌지로]]로부터 ‘결함상품’이라는 비판을 받았다.<ref>[http://www.daily.co.jp/baseball/flash/20131001380.shtml?pg=2 {{lang|ja|阪神の元名物オーナー久万氏、不振当時の中村勝広監督に「スカタン」}}] - 데일리 스포츠, 2013년 10월 1일</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