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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년에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일본의 동맹국인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어 백제는 멸망하였다. 이 와중에 백제의 옛 장수였던 [[귀실복신]]·[[흑치상지]] 등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일본은 신라·당과의 대립을 무릅쓰고 백제 부흥 운동을 지원하였다. 663년, 신라와 당은 수륙협공으로 백제 부흥정부의 수도 주류성으로 진격했다. 이때 육지에서는 백제의 기병이 진을 치고 신라군과 맞섰고, 바다에서는 왜에서 온 함선들이 강변의 모래밭에 정박해 있었다. 왜병 선단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공격했지만 전술 및 간조의 시간차로 인해 당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네 번 모두 대패했다.(이때 백제·왜의 연합군은 당의 수군에 밀려 물러나 있다가 "우리가 먼저 치면 저들은 알아서 물러날 것"이라는 몹시 엉터리같은 작전을 택했다고 한다.) 백강에 집결해 있던 1천 척의 함선 가운데 4백 척이 불탔으며, 신·구《당서》와 《자치통감》, 그리고 이들 사료를 참조한 《삼국사기》는 이때의 싸움을 두고 "연기와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되었다"고 당시의 처절했던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백강 전투]])
 
전쟁이 끝나고, 일본은 백제의 멸망으로 대거 유입된 난민들을 수용하였다. 또한 당의 침략 위협에 대한 공포로 일본은 [[오노 성]](大野城, 665년)<ref>{{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 日本書紀/卷第廿七|卷第廿七   天智天皇]] |인용문= 四年…十二月…秋八月。…遣達率憶禮福留。達率四比福夫於筑紫國築大野及椽二城。}}</ref> 과 카네다 성(金田城, 667년)<ref>{{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 日本書紀/卷第廿七|卷第廿七   天智天皇]] |인용문= 六年…十一月…是月。築倭國高安城。讃吉國山田郡屋嶋城。對馬國金田城。}}</ref> 을 축조-여기에 난민들도 참여하였다-하고 방어 전쟁준비를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왜는 신라나 당과의 대립은 깊어졌다. 그러나 또한 한반도의 새로운 패권 세력인 신라와 친해지지 않으면 신라와 당의 연합이 왜국을 크게 위협할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왜는 서둘러 [[665년]]부터 신라와의 국교를 정상화하고, 왜의 중신이던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나서서 신라의 문무왕과 함께 신라 조정의 실력자였던 [[태대각간]] [[김유신]]에게 선물 공세를 취하는 등, 8세기 초까지 당과는 거의 교류를 하지 않으면서도 신라와의 교류에는 적극적이었다. 이는 훗날, [[원효|원효(元曉)]]나 [[의상 (신라)|의상(義湘)]] 등의 신라 승려들이 나중에 신라 본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해질 수 있는 정치·외교사적 배경이 되었다고 여겨진다.<ref>{{뉴스 인용 |저자 = [[박노자]] |제목 = 구원병 자격으로 한반도를 찾았던 왜군 |url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5145.html |출판사 = 한겨레21 제764호 |날짜 = 2009-6-12 |인용문 = 그리하여 백제 부흥운동 세력들이 완전히 패배하자 왜국은 서둘러 665년부터 신라와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그 뒤로는 신라의 실력자 김유신에게 ‘선물 공세’를 취하는 등 8세기 초까지 당나라와는 거의 교류를 하지 않으면서도 신라와의 교류에는 적극적이었다. 원효와 같은 신라 승려들이 나중에 본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해질 수 있는 정치•외교사적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ref> 이후, [[나당전쟁]]으로 인해 신라와 당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고 신라는 당과의 전쟁위험이 존재하는 동안 후방의 위협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720년까지 교류를 증진하며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성덕왕]] 2년(703년) 204명에 달하는 일본국 사신을 받아들일 정도<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zh:三國史記/卷08|본기 권8 성덕왕]] |인용문= 二年...日本國使至 摠二百四人 (2년(703)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모두 204명이었다. ) }}</ref> 로 성덕왕 초기에는 우호관계에 있었다. 일본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소 소략해 일본 쪽 자료를 보충하지 않을 수 없지만, 양쪽 자료를 종합해보면 670년부터 779년까지 한 세기 동안 신라 사신들이 일본에 39차례나 파견됐다. 같은 기간에 일본 사신들은 신라를 25차례 방문했다. 그 기간에 당나라로 견당사(遣唐使)를 보낸 것은 불과 10차례였다.<ref>{{뉴스 인용|제목=<nowiki>[박노자의 거꾸로 본 고대사]</nowiki> 통일신라-일본의 친교는 왜 잊혀졌나 |url=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5431.html |출판사=한겨레신문사 |뉴스=한겨레21 |저자=[[박노자]] |날짜=2009-07-24 |확인일자확인날짜=2009-07-2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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