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제: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Aisin Gioro Haeunghachi(토론)의 편집을 Sjsws1078의 마지막 판으로 되돌림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확인날짜 수정
31번째 줄:
[[1711년]](강희 50년) [[9월 25일]], [[자금성]] 인근 [[옹친왕부]]에서 당시 옹친왕(雍親王)이던 옹정제 윤진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홍력의 어머니 뉴호록씨는 만주족이었지만 출신이 미천하여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가 수녀(秀女)가 된 뒤 옹친왕부에 배속되어, 윤진의 후궁인 [[측복진]](側福晉) 이씨<ref>[[측복진]] 이씨는 훗날 제비(齊妃)가 되는 인물이다.</ref> 의 시녀로 있었다. 어머니의 미천한 신분에 의하여 그다지 부각되지 않던 홍력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천자문]]과 [[사서오경]]을 꿰뚫어 암송하고 시를 잘 지어 [[1720년]](강희 59년) 겨울에 할아버지인 강희제가 특별히 궁정에서 기르기 시작하였다.<ref name="Mote914">Mote, Frederick W. ''Imperial China 900 - 1800'',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년]]. {{ISBN|0-674-01212-7}} 914쪽</ref>
 
황손인 홍력은 황자들만 교육받을 수 있던 [[상서방]](上書房)에서 공부하였는데 이곳에선 홍력 이외에도 자질이 남다른 여러 황손들과 홍력과 동갑인 숙부 윤희(胤禧)도 같이 공부하고 있었다. 당시 강희제에게는 20명의 황자와 100명 안팎의 손자가 있었는데 [[강희제]]는 손자들의 상당수를 알지도, 심지어는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황손들 중 궁정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특별히 뽑힌 홍력이 문재에도 탁월하였고 사냥에서는 어린 나이에 곰을 두려워하지 않고 화살로 힘들이지 않고 잡자 이를 매우 기특하게 여긴 강희제는 어릴 때의 자신을 닮았다며 홍력에게 기본적인 제왕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ref name="브리태니커">[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1g2186b 브리태니커 건륭제] {{백과사전 인용 |제목=건륭제 |백과사전=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확인일자확인날짜=2010년 1월 17일}}</ref> 특별히 자금성을 지키는 금군 무관에게 명해 홍력에게 무예를 전수해줄 것을 명하였다. 어떤 때에는 노구의 강희제가 직접 홍력의 무술을 보고 가르치고 같이 수련하였다.<ref name="Mote914"/> 궁정에서 살면서 할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으나, 한편으로는 자주 자신이 살던 옹친왕부로 가 부왕인 옹친왕 윤진과 적모인 [[적복진]] 오라나랍씨, 그리고 어머니에게 문안드렸고 이러한 성실한 모습을 본 강희제가 더욱더 총애하였다.<ref name="Mote914"/>
 
[[1722년]](강희 61년) 12월, 홍력의 조부이자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인 강희제가 노환으로 붕어하자, 당시 정국을 면밀히 관찰하던 홍력의 아버지 옹친왕 윤진이 군사들과 대신들을 이용하여 황위에 오르니 이가 옹정제이다. 강희제는 임종 직전, 윤진을 불러서 미래의 황제는 홍력이니 황위를 반드시 홍력에게 물려주라 명하였다고 전해진다.<ref>진만러우, 《강희제의 교육 방식 - 向康熙學習》, 하남문예출판사(河南文藝出版社), [[2008년]] 96쪽</ref><ref>Mote, Frederick W. ''Imperial China 900 - 1800'', [[1999년]], 915쪽</ref> 그에 따라 황위에 오른 [[옹정제]]는 미리 황태자로서 홍력의 이름을 써서 그 함을 [[건청궁]]의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 뒤에 올려놓았다.
40번째 줄:
| url = http://book.sina.com.cn/nzt/soc/1100164876_zhengsuoqingcaoshierdi/index.shtml
| 제목 = 청나라 12명의 황제의 진짜 모습(正說淸朝十二帝)
|확인일자확인날짜= 2010-01-17
| 저자 = 염숭년
|날짜=
75번째 줄:
[[1747년]](건륭 12년), [[대금천]](大金川)을 시작으로 [[1755년]](건륭 20년), [[1757년]](건륭 22년) 두번에 걸쳐 강희제 이후 세력이 미미해졌으나 여전히 몽골 고원을 호령하던 [[중가르 칸국|중가르]]를 완전히 복속시켰고 [[1769년]](건륭 33년)에는 [[버마]], [[1776년]](건륭 41년)에는 대금천과 소금천(小金川), 뒤이어 [[1788년]](건륭 53년) [[대만]], [[1789년]](건륭 54년) [[베트남]], [[1791년]](건륭 56년), [[1792년]](건륭 57년) 두 차례에 걸쳐 [[네팔]]을 원정함으로써 자신의 권위와 청나라의 국위를 선양하였다.<ref name="Mote936">Mote, Frederick W. ''Imperial China 900 - 1800'', [[1999년]], 936쪽</ref> 그러나 그 자신은 몽골의 군사를 직접 지휘해 격파한 조부와는 달리 전선 근처를 순시하며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이때 당시 청나라의 군사 상당수는 개국 때 혁혁한 공을 세운 [[팔기군]]이 아닌 강희제 때 신설된 한족 출신의 군대 [[녹영]](綠營)의 군사들로서 [[남송]]의 명장 [[악비]]의 후손인 [[쓰촨 성|사천]][[총독]] [[악종기]](岳鍾琪)와 만주족 출신의 장수 [[아계 (청나라)|아계]](阿桂)가 주지휘관으로 활약하였다.
 
그 중 가장 성과가 있었던 원정은 바로 두 번에 걸친 준가르 원정과 대·소 금천 원정이었다. 준가르 원정으로 청나라는 [[외몽골]]을 얻었고, 이 기세를 몰아 [[위구르족]]을 공격해서 그들을 복속시킴으로써 크나큰 영토를 얻게 되었다. 건륭제는 새로 얻은 영토를 새롭게 번성하라는 뜻의 [[신강]](新疆)으로 명명하였다.<ref name="브리태니커"/> 또한 [[티베트]] 일대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소 금천 원정에서도 소수의 병력으로 공격하여 성과를 보았으나, 금천의 영토는 몽골에 비하여 턱없이 작았고, 군비도 예상에 비해 너무 많이 지출되었다. 또한 금천 일대에는 [[1747년]](건륭 12년) 금천의 일부 영토를 점령하였음에도 현지 주민들의 반란도 빈번히 일어났다. 주민들은 [[암도 지구]]의 티베트인들의 지원을 얻어서 항쟁을 계속하였고, 건륭제는 꼭 29년 후에 유럽의 선교사들이 제작한 최신형 대포로 대금천과 소금천을 초토화시킨 다음에야 강제로 주민들의 항복을 받아내어 조공품을 얻은 뒤 완전히 통치할 수 있었다.<ref name="후동">{{백과사전 인용 |제목=건륭제 |백과사전=후동|확인일자확인날짜=2010년 1월 27일}}</ref> 이로써 건륭제는 청나라의 영토를 약 460만 km² 늘려 중국 역사상 [[몽골 제국|원나라]] 이후 가장 큰 영토를 가진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ref name="Mote936"/>
 
[[파일:MilitaryCostumeEmperorKienLong1736-1796.jpg|섬네일|건륭제가 원정 때 입던 황금 갑옷]]
111번째 줄:
한편으로 건륭제는 [[1770년]](건륭 35년), 중국에 있는 모든 고서적들을 수집할 것을 칙령으로 반포하였다. 이에 따라 건륭제는 학자들에게 모든 고서적들의 이름을 목록으로 작성하고 고서적들을 [[사서오경]]과 같은 고전인 ‘경’(經), 역사서인 ‘사’(史), [[제자백가]]를 포함한 철학서인 ‘자’(子), 그리고 문집인 ‘집’(集) 등 모두 네 분류로 나누었다.<ref name>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321쪽</ref> 모은 서적을 모두 학술 기관인 [[한림원]]과 황실 도서관인 문연각(文淵閣)에 비치한 후 조사하여 분류하고 일람에 적어놓는 작업만도 2년이 넘게 걸렸다.<ref name="후동"/> 건륭제와 군기처는 이러한 사업이 세금도 적게 들고 국가의 문화적 위치를 한층 발전시킬 것이라 여겨 전폭적으로 지원하였다. [[1773년]](건륭 38년), 이렇게 모인 3,503 부에 79,337 권 33,054 책의 서적을 한데 모아 3,800여 명의 학자들이 필사를 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사고전서]]》(四庫全書)이며 이 《사고전서》에 실린 서적들을 분류해 놓은 일람을 《[[사고전서총목제요]]》라고 한다. 《사고전서》는 9년 뒤인 [[1782년]](건륭 47년)에 가서야 완성이 되었다. 건륭제는 《사고전서》의 양이 매우 방대하였기 때문에 편찬 작업 중 새로 요약본을 편찬할 것을 명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사고전서회요》(四庫全書薈要)로 이 역시 12,000 여권에 달한다.<ref name>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322쪽</ref> 《사고전서》는 자금성의 문연각, 심양의 문소각(文溯閣), 열하의 문진각(文津閣), 원명원의 문원각(文源閣) 등 4곳에서 보관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주, [[전장 시|진강]], 항주 등으로 보내 한림원의 원로 학사가 책임을 지고 관리하도록 하였다.<ref>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323쪽</ref> 이때 만들어진 《사고전서》는 명나라 [[영락제]] 때 만들어져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 역사상 최대의 편찬사업인 《[[영락대전]]》의 3배를 훌쩍 뛰어넘는 양이었으며 강남에 보존된 3부는 남방의 학자들이 언제든 열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밖에도 건륭제는 《대청일통지》, 《황조문헌통고》, 《대청회전》 등 방대한 도서를 많이 편찬하게 하였다.
 
건륭제의 치세에도 [[문자의 옥]]은 계속되었다. 건륭제는 《사고전서》를 편찬하기 시작한 [[1773년]](건륭 38년)부터 모든 책들을 2년간 24번 조사하여 청나라의 정책과 그 뿌리에 정통성을 제기하는 서적은 모두 불온서적으로 지정하고 불태워버렸다.<ref name="김희영325">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325쪽</ref> 소각된 책들은 모두 538 종에 13,860 부에 달하는 상당한 양이었다.<ref name="김희영325"/> 이 책들은 대부분 명나라 말엽에 쓰인 것으로 선황인 [[누르하치|태조 누르하치]]의 근본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북방 민족은 한족을 다스릴 권리가 없다’, ‘명나라 만이 중원을 다스릴 유일한 정통 황조이다’라는 등 청나라의 중국 지배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건륭제는 이러한 행위를 대역죄로 처리하여 책을 쓴 저자와 그의 가족들을 변방으로 유배보내거나 노예로 삼았고 노골적으로 공격한 경우에는 주동자는 [[능지|능지형]]에 처하고 그 삼족이나 구족을 멸하는 등 엄정하게 다스렸다. 이에 건륭제는 한족에게도 만주어를 가르치기 위해 《청문감》(淸文鑑)이라는 책을 지어 보급하였다.<ref name="글로벌">{{백과사전 인용 |제목=건륭제 |백과사전=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확인일자확인날짜=2010년 6월 15일}}</ref> 문자의 옥의 대표적 사건으로 당시 시인인 [[호중조]](胡中藻)가 ‘일파심장논탁청’(一把心腸論濁淸, 나의 마음으로 청탁을 논하고 싶다)이라는 문구에서 ‘탁청’(濁淸)이 바로 탁한 청나라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참형에 처해지기도 하였다.<ref>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326쪽</ref>
 
=== 경제와 부의 완성 ===
125번째 줄:
| url = http://review.jcrb.com.cn/ournews/asp/readNews.asp?id=128724
| 제목 = 왕단망의 뇌물수수사건(王亶望貪縱牽出連環窩案)
|확인일자확인날짜= 2010-02-06
| 저자 = 탄광룽
|날짜= 2002-12-10
146번째 줄:
=== 유럽과의 관계와 사절단 ===
[[파일:George Macartney, 1st Earl Macartney by Lemuel Francis Abbott.jpg|섬네일|왼쪽|[[매카트니 백작 1세 조지 매카트니]]]]
건륭제는 부분적으로나마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를 허락하였고 선교사들은 이에 따라 교세를 확장시키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신자들에겐 조상의 제사 등 본래의 관습을 어느 정도 지킬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러나 [[1742년]](건륭 7년)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각 경우에 따라서〉(''Ex quo Singulari'')라는 칙서를 내려 가톨릭으로 개종한 신자들이 풍습을 유지할 수 있던 관행을 금지시키고 [[1744년]](건륭 9년) 다시 또다른 칙서 〈옴니움 솔리키투디눔〉(''Omnium solicitudinum'')를 내려 이를 재확인하였다. 교황의 칙령이 내린 후로는 가톨릭 신자의 수가 늘어나지 않았고 예수회 선교사들도 제대로 선교 활동을 펴지 못하였다.<ref name="엔싸이버">{{백과사전 인용 |제목=베네딕토 14세 |백과사전=엔싸이버|확인일자확인날짜=2010년 1월 27일}}</ref> 그 후 중국 내의 가톨릭 교세는 조정의 탄압과 유학자들의 공격으로 청나라 멸망 때까지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파일:LordMacartneyEmbassyToChina1793.jpg|섬네일|매카트니의 영국 사절단을 접견하는 건륭제]]
156번째 줄:
당시 건륭제는 막 완공된 여름 별장인 열하 피서산장으로 가서 지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천진으로 온 다음 북경에서 여독을 풀고 다시 만리장성을 넘어 [[1793년]](건륭 58년) 8월에야 피서산장에 도착해 건륭제를 알현하였다. 건륭제는 화신에게 사절단을 대접하는데 소홀하지 않도록 명을 내렸으나 도중 접견의 예의문제로 난항을 빚게 되었다. 본래 외국의 사신은 황제를 접견할 때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 즉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
를 땅에 조아리는 예를 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매카트니는 자신은 청나라의 속국의 신하가 아니라며 단호히 거절하였고 결국 합의 끝에 건륭제 뒤에 영국 국왕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한쪽 무릎만을 굽히며 영국식 예만
취하도록 하였다. 건륭제는 탄신 만찬에서 매카트니가 가져온 [[조지 3세]]의 친서를 건네 받았는데 거기에는 무역을 늘리고 공사를 상주시키고 싶다는 요구가 들어 있었다. 거기에다 영국에게 주산 근처의 작은 섬을 할양해 영국인들이 사용하게 해달라는 내용도 쓰여있자 건륭제는 이를 거부하고 영국 사절단의 일체의 행동을 금하였다. 건륭제는 그 다음 달인 9월에 영국 사절단의 귀국을 강제 조처하였다.<ref name="매카트니">{{웹 인용|url=http://books.google.co.kr/books/about/Some_account_of_the_public_life_and_a_se.html?id=jwD1jILUwP4C&redir_esc=y|제목=매카트니 견문록(''Some account of the public life, and a selection from the unpublished writings of the earl of Macartney'') |저자=매카트니, 존 배러우|날짜=1807년|언어=영어|확인일자확인날짜=2012-05-28}}</ref>
 
2년 뒤인 [[1795년]](건륭 60년) 초에는 [[네덜란드]]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대표하는 전권 특사 [[이삭 티칭]](Issac Titsingh)이 건륭제의 재위 60년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로 왔다. 광주를 거쳐 북경으로 와서 원명원에서 건륭제를 접견하였는데 노골적으로 청나라의 땅의 할양을 요구한 영국과는 달리 네덜란드 사절단은 그러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으며 영국 사절단이 거부하던 삼궤구고두를 바로 올려 건륭제의 호감을 샀다.<ref name="반 브람">{{웹 인용|url=http://ebook.lib.hku.hk/CTWE/B2962471X/|제목=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중국의 황제에게 보낸 사절단(''An authentic account of the embassy of the Dutch East-India company, to the court of the emperor of China, in the years 1974 and 1795'') |저자=반 브람 후키스트, 안드레아스 에베라두스|날짜=1798년|원어=네덜란드어|언어=영어|확인일자확인날짜=2010-02-11}}</ref> 건륭제는 네덜란드 사절단을 영국 사절단보다 더 우대하였고 그에 대한 선물도 더 많이 챙겨주어 보내주었다.
 
=== 퇴위와 반란 ===
185번째 줄:
| url =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3/01/30/200301300500031/200301300500031_6.html
| 제목 = 그믐밤엔 궁녀, 보름엔 황후와 ‘雲雨之情’
|확인일자확인날짜= 2010-02-13
| access작성년도= 2003
| 저자 = 권삼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