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대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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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개성성균관 자리에는 [[고려 문종]]의 별궁이 있었는데 순천관(順天館, 외국사신들이 들르던 숙소)·숭문관(崇文館, 교육기관)으로 변천되어 오다가 [[고려 선종]] 6년([[1089년]])에 [[국자감 (고려)|국자감]](國子監, 최고 [[유교]] 교육기관)을 이곳에 옮겨왔으며, [[고려시대]]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지금의 건물은 [[조선 선조]] 35년([[1602년]]) ∼ [[조선 광해군]] 2년([[1610년]]) 사이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그 가운데 대성전(大成殿)과 서쪽의 재(齋)는 [[조선 선조]] 35년([[1602년]])에 짓고, 명륜당(明倫堂)과 동무(東廡)·서무(西廡)는 [[조선 선조]] 38년([[1605년]])에 다시 지었다.
 
[[조선시대]]의 [[국립]]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준공된 [[성균관]]이 있는데 [[고려 충선왕]] 2년([[1310년]]) [[개성]]에 있던 [[성균관]]과는 다른 건물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 [[성균관]]은 [[고려시대]] [[국자감 (고려)|국자감]]의 전통을 이어받아 [[사서]]와 [[오경]] 등을 기본으로 했다. 교육방법은 강독(講讀), 제술(製述), 서법(書法)으로 이뤄졌다. 또한 [[성균관]] 내에는 오늘날 학생총회에 해당하는 재회(齋會)가 존재하여 학자의 사기를 진작하고 존중하는 기풍이 전통으로 내려왔다.<ref name="교육기관">{{뉴스 인용|url=http://www.daejonilbo.com/news/newsitem.asp?pk_no=1038028|제목='서울'·'님'… 한국인 삶 깃든 언어·유교사상 씨앗|성명=권성하 기자|날짜=2012-12-10|출판사=대전일보|언어=한국어|확인일자확인날짜=2012-12-12}}</ref><ref>{{뉴스 인용|url=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3471&yy=2012|제목=大幹 숨을 고르다-황악, 유학의 본산 향교|성명=박용우 특임기자|날짜=2012-11-30|출판사=매일신문|언어=한국어|확인일자확인날짜=2012-12-12}}</ref><ref>{{뉴스 인용|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55248|제목=서울대 통합 논란... 조선이 더 '진보적'이네|성명=김종성 기자|날짜=2012-07-12|출판사=오마이뉴스|언어=한국어|확인일자확인날짜=2012-12-12}}</ref>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조선 태조|태조]]는 숭교방(崇敎坊一明儉洞)에 [[성균관]] 건물을 준공하고 [[고려]] 제도대로 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 [[공자]](孔子)를 모신 문묘(文廟), 유생들이 거처하는 재(齋)를 두었으며, [[조선 태종|태종]]은 땅과 노비를 지급하고 친히 문묘에서 제사를 지냈고 왕세자의 입학을 명령하였다. 이후 이것은 상례가 되었으며 여러 왕을 거치는 동안 경기도 연해의 섬(島), [[전라남도]] 해안의 어장(漁場)과 많은 땅이 부속되었다. 규모는 [[조선 성종|성종]] 때에 완성되었는데, 향관청(享官聽)과 존경각(尊經閣·도서관)도 이때 증설되었고, [[조선 현종|현종]] 때에 비천당(不闡堂·과거장), [[조선 숙종|숙종]] 때 계성당(啓聖堂)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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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한국의 군정기|미군정기]]를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3년간 국내 고등교육계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서울대학교|서울대]]는 [[국대안 파동]]을 겪으면서 국대안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논란 끝에 안정화의 길로 접어들었고 사립 전문학교들의 [[대학]] 승격과 신규 [[대학]]의 설립이 이뤄졌다. [[광복]] 후 [[전문대학]]으로 있던 [[연세대학교|연희전문]], [[고려대학교|보성전문]], [[이화여자대학교|이화여전]] 등이 종합대학으로 승격되고, [[부산대학교|국립부산대]], [[한국해양대학교|국립해양대]] 등 [[국립대]]도 설립되었다.
 
또한 역시 2년제 [[전문대학]]의 형태로 운영되던 [[종로구]] [[혜화동]]의 [[동국대학교|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敎)가 [[1946년]] [[9월 20일]], [[동국대학교|동국대]]로 설립인가를 받았고 [[종로구]] [[명륜동]]의 [[성균관대학교|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敎)는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학교|성균관대]]로 설립인가를 받았는데, [[종로구]] [[낙원동 (서울)|낙원동]]의 [[단국대학교|단국대]]는 [[1947년]] [[11월 1일]]에 [[광복]] 최초 4년제 대학으로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다. [[1948년]]에는 [[숙명여자대학교|숙명여대]], [[중앙대학교|중앙대]], [[한양대학교|한양대]], [[국민대학교|국민대]], [[1949년]]에는 [[건국대학교|건국대]], [[홍익대학교|홍익대]]가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1949년]]에 가인가를 받았던 [[경희대학교|경희대]]는 [[1952년]]에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고 일제때 [[평양]]에 있다가 폐교되었던 [[숭실대학교|숭실대]]는 [[1954년]] [[4월 15일]], 당시 [[문교부]]로부터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다.([[한국대학신문]]의 [[광복]]이후 정규대학 설립인가 현황([[1946년]]~[[1954년]]) 참조)<ref name="해방후 국내 대학설립인가 현황">{{뉴스 인용|url=http://www.unn.net/ColumnIssue/Univ50Detail.asp?idx=11&n4_page=1&n1_category=1|제목=미 군정기 대학 설립 봇물|성명=한국대학신문|날짜=2004-01-15|출판사=한국대학신문|언어=한국어|확인일자확인날짜=2010-03-01}}</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6/25/2011062500034.html|제목="1953년 戰禍 속 졸업생에게" 김창숙 선생 친필 훈사 발견|성명=곽래건 기자|날짜=2011-06-25|출판사=조선일보|언어=한국어|확인일자확인날짜=2011-06-25}}</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donga.com/3/all/20110625/38299890/1|제목=成大 창립자 김창숙 선생의 1953년 졸업훈사 공개|성명=손효주 기자|날짜=2011-06-25|출판사=동아일보|언어=한국어|확인일자확인날짜=2011-06-25}}</ref>
 
광복 후 당시 문교부에 등록된 한국 내 《대학설립인가의 현황<ref name="해방후 국내 대학설립인가 현황"/>》을 보면 이같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서울대학교]]는 원래 [[1924년]] 일제가 세운 [[경성제국대학교]]로 출발하였으나 해방후 정립한 [[1946년]] [[8월 22일]]을 [[서울대학교]]의 개교일로 잡아 지금까지 기념해 오고 있다. 참고로 인가서를 기준으로 하면 [[이화여자대학교|이화여대]]가 신청일자가 [[1946년]] [[6월 24일]]로 기록된 제1호 인가서를, [[연세대학교|연희(연세)대]]는 [[1946년]] [[7월 31일]]로 기록된 제2호 인가서를 미군정청 학무국으로부터 받았으며, [[고려대학교|고려대]]는 신청일자가 [[1946년]] [[8월 5일]]로 기록된 제3호 인가서를 받아 [[8월 15일]]에 전격적으로 발표한 종합대학 승격의 법률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unn.net/ColumnIssue/Univ50Detail.asp?idx=10&n4_page=1&n1_category=1|제목=여자대학에 1호 인가서가 웬 말?|성명=한국대학신문|날짜=2004-01-15|출판사=한국대학신문|언어=한국어|확인일자확인날짜=2011-01-11}}</ref>
 
2000년대 이후에는 [[대한민국]]의 출산률은 계속 줄고 있는데 대학의 진학률은 늘고 있다. 실제로 전산업 취업유발계수(투자액 10억원당 유발되는 취업자 수)가 [[2000년]] 18.1에서 [[2007년]] 13.9로 감소하였으며, 대학진학률은 [[1990년]] 33.2%에서 [[2009년]] 81.9%로 48.7%p 급증했다. 세계적으로 제조업 경쟁력을 보유한 [[독일]]도 대학진학률이 50%대임을 감안하면, [[대한민국]]의 고학력 노동공급은 가히 장대비 수준이라는 전문인의 분석이 나오고 있다.<ref>[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3/08/2010030800086.html "여학생 대학진학률 남학생 앞질렀다"], 김연주 기자, 조선일보, 2010-03-08</ref> 그러나 [[2010년]] 조사로 40%의 국민이 [[대학]] 진학이 필수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점차 의식이 변화하고 있다.<ref>[http://www.yonhapnews.co.kr/society/2010/10/31/0706000000AKR20101031022900004.HTML "국민 40%, 대학진학 `필수' 아니다"], 김효정 기자, 연합뉴스, 2010-10-31</ref><ref>{{뉴스 인용|url=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412053|제목=국민 40% “대학진학 필수 아니다”|성명=홍성율 기자|날짜=2010-11-01|출판사=아시아투데이|언어=한국어|확인일자확인날짜=2011-07-15}}</ref>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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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문헌|대한민국 대학 등록금에 관한 규칙|대학 등록금에 관한 규칙}}
{{참고|대한민국의 대학 등록금 현황}}
대학 등록금은 수업료, 기성회비, 입학금 등으로 구성된다. 사립대학은 기성회비가 없는 대신 수업료가 국공립대 등록금보다 높고, 국공립대학은 수업료가 낮은 대신 기성회비 비중이 높다. 국공립대학의 등록금은 사립대학보다 낮다. 김대중 정부의 사립대학 설립 인가 기준 완화로 사립대학의 수가 급증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등록금이 나날이 폭등했고, [[한나라당]]은 2007년 무렵 "반값 등록금" 정책을 논의했지만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정권을 탈환한 후에도 등록금은 줄어들지 않았다. 등록금은 등록금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친다. 그러나 등록금심의위원회가 무용지물이라는 견해도 있다.<ref>{{뉴스 인용|제목=대학 등록금 인상 줄줄이…등록금심의委 무용론|url=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10209_0007373682&cID=10201&pID=10200|출판사=뉴시스|날짜=2011-02-10|확인일자확인날짜=2011-02-25}}</ref> 또한 등록금 인하하기 위한 대학생들의 움직임을 대학교와 경찰이 탄압하는 경우가 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3222141055&code=940401 ‘등록금 인하 운동’ 탄압하는 대학·경찰] 2011-03-22 경향신문</ref>2009년 5월 이명박 정부는 등록금 부담을 줄이기 위해 국가장학금 제도를 최초로 만들었으며 현재도 운영 중이다. 2011년 9월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는 2조 2500억원 규모의 등록금 대책안을 발표했다. 소득분위에 따라 각각 차등 지급되는 방식으로, 소득분위 7분위 이하에는 22% 정도의 등록금 인하가 기대된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4071423 당정, '1조5000억원+7500억원' 등록금 대책발표] 2011-09-08 뉴시스</ref> 그러나 명목 인하율은 5%에 그쳐, 장학금 확대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다.<ref>[http://www.segye.com/Articles/NEWS/SOCIETY/Article.asp?aid=20110909003219&subctg1=&subctg2= "정부 등록금 대책은 장학금 확대 불과"] 2011-09-09 세계일보</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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