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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3월 28일]], 김수환은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ref name="pressian1">{{뉴스 인용|제목=김수환 추기경 선종, 향년 87세|url=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216182637|출판사=프레시안|저자=강이현|날짜=2009-02-16|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북경대주교 '티엔켄신'(토마스) 추기경, [[일본]]의 동경대주교 '도이 다쓰오'(베드로) 추기경에 이어 세 번째로 중국의 남경대주교 '유핀'(바오로) 추기경과 같이 추기경직에 서임 되었으며, 그때 그의 나이는 마흔일곱 살로 당시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었다. 김수환은 이후 30년 동안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교구장 대주교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 [[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였다.
 
또 [[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67년]] 이후에는 한국 대표로서 여섯 차례에 걸쳐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그는 고위 성직자로서 한국의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등 여러 방면에 공헌한 업적을 인정받아 [[1974년]] [[2월]] [[서강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래 [[미국]] [[노트르담 대학]], [[일본]] [[조치 대학]], [[고려대학교]], [[미국]] '시튼 힐 대학', [[연세대학교]], [[타이완]] '후젠 가톨릭대학', [[필리핀]] '아테네오 대학' 등에서 명예 [[법학]]·[[철학]]·[[인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추기경, 훈장추서 왜 없을까|url=http://www.heraldbiz.com/SITE/data/html_dir/2009/02/20/200902200448.asp|출판사=해럴드경제|저자=신상윤|날짜=2009-02-20|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박정희]]는 그에게 국가원로로서 자문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조용히 [[박정희]]의 요청을 사양하였다.
==== 철권통치 비판 ====
그러나 그는 [[1972년]]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의 철권 통치를 강도높게 비판하였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연루돼 구금됐을 때는 석방을 탄원하러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면담하기도 했고, 그 앞에서 정권의 독재를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또한, 정교분리와 자유와 인권 등의 문제를 놓고 박정희와 갑론을박하다가 논쟁 끝에 박정희를 설득시켜 지 주교의 석방을 얻어냈다.<ref>{{뉴스 인용|제목=<nowiki>[선종 김수환 추기경 추모]</nowiki> MB,천주교병원으로 맺은 인연 각별|url=http://www.kukinews.com/news2/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921195419&cp=nv|출판사=국민일보|저자=하윤해|날짜=2009-02-17|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ref>{{뉴스 인용|제목=<nowiki>[사설]</nowiki> 세상에 큰 사랑 남긴 김수환 추기경|url=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221027011|출판사=서울신문|날짜=2009-02-21|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1974년]] [[7월]] [[인혁당 사건]] 관련자에 대한 탄원서에 서명하였다.<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25737.html <nowiki>[</nowiki>길을찾아서<nowiki>]</nowiki> 인혁당 가족 돕자 시작된 미행과 도청 / 문정현] 한겨레신문</ref>
 
또한, [[1971년]] [[대한민국]] 전역에 생방송으로 중계된 성탄 미사에서 그는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이런 법을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라며 비판하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김 추기경 어록‥시대 비춘 양심의 소리|url=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2287621_2687.html|출판사=MBC|저자=양효경|날짜=2009-02-18|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ref name="hankyoreh1">{{뉴스 인용|제목=12·12뒤 전두환 면전서 “서부활극 같다” 일침|url=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39368.html|출판사=한겨레|저자=권복기|날짜=2009-02-17|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출처|날짜=2009-2-16|그의 유신비판 강연과 시국연설을 불쾌해한 [[박정희]]는 [[강원룡]]과 김수환의 강연, 연설, 방송은 꼭 시청하거나 보좌관을 시켜 녹화해두었다 한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당하자 직접 추모사를 낭독하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nowiki>[김수환 추기경 추모 물결]</nowiki> 추기경님, 가시난닷 다시 오쇼서|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2/20/2009022000007.html|출판사=조선일보|저자=김지하|날짜=2009-02-20|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이때 추모사 중에서 “인간 [[박정희]]가 이제 주님 앞에 섰습니다.”라는 표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편, [[박정희]]에 대해 그는 장기 집권 야욕을 버리고 나머지 과제를 후임자에게 넘겼더라면 지금쯤 국민의 존경을 받는 국부(國父)가 됐을 것이라며 아쉬워하기도 하였다.<ref name="hankooki1" />
=== 1980년대 이후의 활동 ===
==== 5공, 6공 시절 ====
[[1980년]]대의 군사정권 출범 뒤에도 재야 활동을 하였다. [[12.12 사태]] 이후 인사를 온 당시 [[전두환]] 소장에게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라고 비판했다.<ref name="hankyoreh1" /> 또 가장 마음에 아팠던 일로 [[광주 민주화 운동]]이었다고 말하면서, 그는 "개인적으로 가장 고통을 겪었을 때가 그때였어요. 사태가 그대로 알려지지도 않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처할지도 모르는 상태이고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봤지만 먹혀들어가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은 것 같으니까…"라는 말을 남겼다.<ref>{{뉴스 인용|제목=<김수환 추기경의 웃음과 눈물>(종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2505652|출판사=연합뉴스|저자=김지연|날짜=2009-02-16|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2}}</ref>
[[파일:Myeongdongchurch.jpg|thumb|200px|명동성당]]
또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당시에는 "이 정권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라고 묻고 싶습니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 총칼의 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모르는 일입니다' 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라며 강도높게 비판했다.<ref name="hankyoreh1"/> [[1987년]] 4.13 호헌 조치 당시에서도 미사에서 이를 철회하라는 요구를,<ref>{{뉴스 인용|제목=시대의 양심, 실천적 종교인|url=http://www.ytn.co.kr/_ln/0103_200902162100406340|출판사=YTN|저자=김세호|날짜=2009-02-16|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6월 항쟁]] 때는 [[명동성당]]에 들어온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경찰이 투입되려 하자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고 버틴 것도 그였다.<ref>{{뉴스 인용|제목=암흑의 시절 '민주화' 중심… 국민들은 그의 입을 쳐다봤다|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2/17/2009021700017.html|출판사=조선일보|저자=김한수|날짜=2009-02-17|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1983년]] 넷째 형 [[김동한 (1919년)|김동한]] 사제가 사망하자 그는 형이 마지막으로 거주하던 곳을 찾아 그곳에서 한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홀로코스트 당시 교회의 침묵을 지적한 [[칼 라너]] 사제의 영향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후 [[로마 가톨릭교회|가톨릭]]은 교회의 사회참여를 주장하였다. 로마 가톨릭의 변화에 맞추어 김수환 추기경은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의 생각으로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선을 추구해야 하고, 모든 사회구조나 정치형태는 공동선을 추구함에 있어 평등적 권익으로 보장하고 특권의식과 배금주의를 버리며 혁신과 정화의 근본이 되는 인간내면의 회심을 주도해야 한다. 또한 교회가 공동선을 이룩하려면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그의 사상은 [[유신체제]] 아래에서 곧 위헌적 [[계엄]]과 국회해산 및 헌법정지의 비상조치로써 [[의회]]와 [[헌법]]에 따른 [[민주주의]]를 파괴한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에 저항하여 탄압을 당하던 민주화 인사들의 [[인권]]을 위해서, 정의의 회복을 위해서 쓰였다. 특히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에서 김수환은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한국 천주교회는 정치적으로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대중에게 천주교회가 더욱 가까이 느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ref>[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dic_view.asp?ctxtIdNum=496 가톨릭 대사전]</ref>
 
특히, [[1987년]] 천주교 서울대교구에 빈민 사목 위원회를 두었고 추기경 재임기간에 복지기관을 150개나 설립하는 등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는 [[사회선교]]의 모범을 삶으로 보여주었다.<ref name="pressian1" /><ref>{{뉴스 인용|제목=김 추기경 선종.. "사랑하며 살라" 뜻 남겨 (종합)|url=http://www.asiae.co.kr/uhtml/read.jsp?idxno=2009021622033738554|출판사=아시아경제|저자=박소연, 김효진|날짜=2009-02-16|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1985년]]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을 찾아 사북 탄광체험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사북 일대에 광부의 부인들이 남편 출근시에 추문이 돌자 김 추기경은 광부의 부인들을 찾아 '남편은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저 고생인데 부인들이 춤이나 추러 다니면 되겠느냐'며 호통치기도 하였다.<ref name="kwnews1">{{뉴스 인용|제목=장익·지학순 주교 일화·사북 탄광체험 등 소개|url=http://www.kwnews.co.kr/view.asp?aid=209021900127&s=601|출판사=강원일보|저자=오석기|날짜=2009-02-20}}</ref>
==== 1990년대 이후 ====
한편 [[노태우 정부]] 집권 당시 그는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 대상 중 한 사람이 되어 감시당하였는데, 이는 [[1990년]] [[10월 4일]] [[한국외국어대학교]] 재학 중 민학투련 출신으로 보안사로 연행돼 프락치로 수사에 협조해오다 탈영한 [[윤석양]] 이병의 폭로에 의해 밝혀졌다.<ref>{{웹 인용|url = http://www.cathrights.or.kr/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21|제목 = 보안사, 저명인사 1300명 사찰 - 탈영사병 양심선언|확인일자확인날짜 = 2009-02-17|날짜 = 1990-10-05|출판사 = 천주교인권위원회}}</ref>
 
[[1991년]] [[7월]]에는 [[강원도 (남)|강원도]] [[고성군 (남)|고성]]의 [[통일전망대]]를 방문해서 장애인들과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평화의 종을 울렸다.<ref name="kwnews1" />
 
[[1997년]] 김수환은 고령의 나이(당시 75세)를 이유로 [[로마 교황청]]에 [[천주교 서울대교구|서울대교구]]장 사임 의사를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그는 다시 여러 차례 사임 의사를 밝혔고 [[1998년]] [[4월 19일]]에는 아시아 특별 주교 시노드 참석차 [[교황청]]을 방문한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사의를 표명하였고, 결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98년]] [[5월 29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서울대교구]]장과 [[천주교 평양교구|평양교구]]장 서리직의 사임을 허락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순교자 집안서 태어나 인권·사회운동 중심에|url=http://www.naeil.com/News/politics/ViewNews.asp?nnum=453940&sid=E&tid=0|출판사=내일신문|저자=이경기|날짜=2009-02-17|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1998년]] [[12월 14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의 길상사 개원법회에 참석하여 축하함으로써, 종교간의 화합을 보여주었다. 이에 대한 답례로 [[1998년]] [[2월 24일]]에 [[법정 (승려)|법정 스님]]이 [[명동성당]]을 방문하여 특별 강연을 가지기도 하였다.<ref>[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022770301 천주교-불교 종교초월한 교감 확산 1998년 2월 27일 조선일보]</ref>
 
[[1998년]] [[천주교 서울대교구|서울대교구]]장과 [[천주교 평양교구|평양교구]]장 서리직을 당시 [[천주교 청주교구|청주교구]]장이었던 [[정진석 (추기경)|정진석]] 당시 대주교에게 물려주었다. 이후 사회 활동에 많이 참가해 영향을 끼쳤으며, 세계적으로 최고령 추기경과 최장재임 추기경으로서 명성이 높았다.<ref>{{뉴스 인용|제목=김수환 추기경 장례미사 '이모저모'|url=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8182&yy=2009|출판사=매일신문|저자=박상전, 권성훈|날짜=2009-02-20|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1999년]] [[4월 28일]] 김수환은 [[강원도 (남)|강원도]]에서 추기경 서임 30주년 축하식을 열어준 군종사제들과의 면담에서 "장면 총리의 역사적인 재평가 작업을 여생동안 이뤄보고 싶다"는 의지를 적극 표명하였다<ref name="복권1">[http://www.catholictimes.org/view.aspx?AID=171314 故 장면 총리 공정한 평가 필요] 가톨릭신문 1999년 5월 9일자 [제2150호]</ref>[[6월 4일]] 장면 총리 서거 33주년 기념일인 신임인사차 예방한 [[박지원 (1942년)|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은 김수환에게 [[장면]]의 포천 묘소를 국립묘지로 이장할 것을 제의하면서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ref name="복권1"/>
[[2001년]] [[1월 26일]] 오전 10시 반부터 1시간 20분 동안 [[경기도]] [[의왕시]]의 서울구치소에서 사형 직전의 사형수들을 찾아 미사를 집전하기도 하였다.<ref name="donga2">{{뉴스 인용|제목=김수환추기경, 서울구치소서 사형수 포함 재소자 미사집전|url=http://www.donga.com/fbin/output?n=200110260251|출판사=동아일보|저자=이명건|날짜=2001-10-26}}</ref> [[2001년]] 2월에는 한국 정당 정치 실록 1, 2권이 출간될 무렵, 최근 정치인들이 정권욕에 빠져 제 구실을 못한다며 [[대한민국]]의 정치계를 질타했다.<ref>{{뉴스 인용|제목=<nowiki>[출판]</nowiki> 한국 정당정치 실록 1.2|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38&aid=0000050968|출판사=한국일보|저자=2001-02-08|날짜=오미환}}</ref>
 
[[2002년]]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 규정에 따라 만 80세가 되어 교황 선출권을 상실하였으나, [[2004년]] [[4월 9일]] 사제급추기경 수석에 승계되었다.<ref name="donga3">{{뉴스 인용|제목=<nowiki>[종교]</nowiki>"한국인 제2 추기경 나와야 한다"|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0171438|출판사=동아일보|저자=서정보|날짜=2003-01-03}}</ref> 이에 김수환은 공식 업무에서 은퇴한 추기경 대신 실무를 맡을 추기경이 한국 천주교회에 절실히 필요하다고 로마 교황청에 통보하였고 이듬해 소설가 [[최인훈]]과의 인터뷰에서 이를 증언하였다.<ref name="donga3" /> [[2006년]] [[6월 22일]], [[대한민국]]에 새로운 [[정진석 (추기경)|정진석]] 추기경이 나옴에 따라 김수환은 다행이라고 표현했다.<ref>{{뉴스 인용|제목=김수환 추기경 “마음 편히 잘 수 있게됐다”|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02222339151&code=960206|출판사=경향신문|저자=이상주|날짜=2006-02-22|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2004년]] 봄, 사순절 기념 강연에는 노무현 탄핵사태 등으로 국론이 분열될 것을 우려하며 여당에 참을 것을 주문하였다가 [[함세웅]] 신부로부터 불의한 독재시대에 권력자들이 늘 했던 표현이며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ref name="news.hankooki.com">{{뉴스 인용|제목="金추기경 시대착오적" 함세웅신부 발언 파문|url=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404/h2004040122503821950.htm|출판사=한국일보|저자=박광희|날짜=2004-04-01}}</ref><ref name="news.naver.com">{{뉴스 인용|제목="광화문 네거리 '촛불'은 장엄한 기도 김 추기경 생각은 다소 시대착오적"|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0044468|출판사=오마이뉴스|저자=장윤선|날짜=2004-04-01}}</ref>
[[2005년]] [[4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 후 새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선거]](콘클라베)에는 연령 제한 규정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러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교황]] [[베네딕토 16세]]로 선출된 후 교황 즉위 미사를 2명의 추기경과 공동으로 주관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김 추기경 즉위식 공동집전은 한국 가톨릭의 영광"|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0985088|출판사=연합뉴스|저자=문정식|날짜=2005-04-25}}</ref>
==== 야당 및 진보 진영과의 갈등 ====
그는 사립학교법 개정에 반대하기도 하였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 때는 촛불시위 자제를 촉구하기도 해 진보 진영에서 비판하기도 하였다.<ref name="news.khan.co.kr">{{뉴스 인용|제목=암울한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의 ‘정신적 지주|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162355185&code=940100|출판사=경향신문|저자=김석종|날짜=2009-02-16|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ref>{{뉴스 인용|제목=<nowiki>[태평로]</nowiki> 인간의 길에서 신의 길을 보다|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2/19/2009021901725.html|출판사=조선일보|저자=박은주|날짜=2009-02-19|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ref name="dailyseop.com">{{뉴스 인용|제목=선종한 김수환 추기경까지 이용해먹는 보수신문들|url=http://www.dailyseop.com/section/article_view.aspx?at_id=97668|출판사=데일리 서프라이즈|저자=문한별|날짜=2009-02-19|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또한, [[국가보안법]] 존치를 지지해 진보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았지만,<ref>{{뉴스 인용|제목=<nowiki>[오병상 시시각각]</nowiki>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숙제|url=http://news.joins.com/article/aid/2009/02/18/3314553.html?cloc=olink|article|default|출판사=중앙일보|저자=오병상|날짜=2009-02-18|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2}}</ref> 이를 두고 [[대한민국]]의 권력 구조가 균형을 잡은 상황에서 추기경인 그가 특정한 정치 노선에 계속 치우친다는 것은, 거대 종교 지도자로서 적절치 못한 일일 수도 있었던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ref name="pressian.com">{{뉴스 인용|제목="김수환 추기경, 그는 과연 변절했는가?"|url=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219142559&section=04|출판사=프레시안|저자=김기협|날짜=2009-02-20|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2}}</ref>
==== 반미주의에 대한 비판 ====
[[2005년]] [[10월]] [[동국대학교]]의 [[강정구 (1945년)|강정구]] 교수가 [[한국 전쟁]] 당시 [[미군]]의 개입을 비판하자, [[10월 21일]] 특별 기자회견에서 [[강정구 (1945년)|강정구]]를 비판하였다.<ref name="donga1">{{뉴스 인용|제목=<nowiki>[`정체성 혼란` 한국號 어디로가나]</nowiki>김수환 추기경 특별회견|url=http://www.donga.com/fbin/output?n=200510210002|출판사=동아일보|저자=윤정국, 전승훈|날짜=2005-10-21}}</ref> 강정구의 미군 개입 비판에 대해 김수환은 ‘전쟁 당시 미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한 달 내에 통일됐을 것’이고,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아쉽고, 그래서 미군은 우리의 원수다.’라는 의미로 압축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ref name="donga1"/>
노기남의 업적에 대해 "일제강점기 당시 대구교구에서는 일본 사람이 주교가 되었으나 서울은 그래도 노기남 주교님 같은 분이 계셔서 우리 민족에게 대단히 뜻 깊은 기쁨을 주었다, 한국 사람이 그 시대에 주교가 됐다는 점은 대단히 뜻 깊은 사건이고 피상적인 판단으로 어른들을 비난해선 안된다"고 평가하였다.<ref name="donga1" />
 
[[김성수 (1891년)|김성수]]의 인물됨됨이에 대해서도 강연을 한 적이 있던 김수환은 김성수는 친일이 아니라 정말 민족독립을 위해서 엄청나게 공을 세운 분이라 칭송하고, 독립운동 하는 분들에게 자금을 댄다든지, 민족지라고 할 수 있는 동아일보를 운영하고 중앙고와 고려대를 세워 교육사업을 펼쳤다, 민족혼을 조금이라도 살리기 위해 언론활동을 하고 민족의 인재를 양성하고자 노력한 것 등을 지적하였으며, "단순하게 관찰하고 친일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해도 해도 너무하다"며 변호하였다.<ref name="donga1" /> 이후 그가 친일파라는 근거없는 음해성 자료가 인터넷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ref>{{뉴스 인용|제목=장례날까지 악플… 눈 못감으신 추기경|url=http://www.heraldbiz.com/SITE/data/html_dir/2009/02/20/200902200460.asp|출판사=해럴드경제|저자=신상윤|날짜=2009-02-20}}</ref><ref>{{뉴스 인용|제목="수구꼴통" "친일파"···좌파 네티즌들 김 추기경 때리기 '추태'|url=http://www.freezonenews.com/news/article.html?no=31653|출판사=프리존뉴스|저자=엄병길|날짜=2009-02-19}}</ref><ref>{{뉴스 인용|제목=김 추기경 “2003년 친일 악플에 건강 악화”|url=http://www.heraldbiz.com/SITE/data/html_dir/2009/02/19/200902190265.asp|출판사=해럴드경제|저자=신상윤|날짜=2009-02-19}}</ref> 김수환 친일파설에 의한 비판이 도를 넘어서자 [[2009년]] 한국의 진보 진영의 논객 [[진중권]]은 김수환을 옹호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진중권 “좌파의 추기경 비판은 배은망덕”|url=http://news.joins.com/article/aid/2009/02/20/3315799.html?cloc=olink|article|default|출판사=중앙일보|저자=천인성|날짜=2009-02-20}}</ref><ref>{{뉴스 인용|제목=정말 철없는 '찌질이' 네티즌들|url=http://www.newdaily.co.kr/_ezarticle/?im=artView&artid=2855068900|출판사=뉴데일리|저자=온종림|날짜=2009-02-19}}</ref> 한편, [[민족문제연구소]]는 해명자료를 내고,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이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고 밝혔다.<ref>{{뉴스 인용|제목=김 추기경 강제징집, 친일논란 종지부|url=http://www.moneytoday.co.kr/view/mtview.php?type=1&no=2009022020275050466&outlink=1|출판사=머니투데이|저자=김태은|날짜=2009-02-20|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 생명 윤리에 관련된 견해 ====
[[2001년]] [[1월 26일]]에 [[경기도]] [[의왕시]]의 서울구치소에서 사형 직전의 사형수들을 찾아 미사를 집전한 뒤 기자회견에서 그는 사람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생명경시 풍조가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하였으며<ref name="donga2" /> 사형제도와 낙태 문제에 대해 반대 의견을 피력하였다. [[2004년]], [[동아일보]]와의 회견에서 그는 "사형제 폐지, 낙태 반대 등은 모든 것이 다 생명을 위해서이다. 우리가 사는 목적이 무슨 돈을 벌기 위해서, 권력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고, 인간이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줄여서 말하면 참생명이다. 참생명은 현실에서만이 아니고 영원으로 이어지는 생명이며 생명은 세상 모든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였다.<ref name="donga1" />
==== 서번트 리더십 ====
1998년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난 김수환은 스스로를 "혜화동 할아버지"라고 칭하며 게시판에 올라온 신자들의 편지(게시글)에 2년 여간 일일이 답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이웃의 다정한 '혜화동 할아버지', 인간 김수환|url=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546144|출판사=SBS|저자=조제행|날짜=2009-02-20|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또한 신자들의 글에 직접 답장을 쓰면서, 글씨 크기를 확대하여 작성하는 등 모습을 보여 이른바 '서번트 리더십'을 보였다고 평가된다.<ref>{{뉴스 인용|제목=김추기경의 아름다운 힘은 `서번트 리더십`서 나왔다|url=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9021820711|출판사=한국경제|저자=고두현|날짜=2009-02-18|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ref>{{뉴스 인용|제목=<nowiki>[기자의 눈/2월 21일]</nowiki> 경제도 김추기경 처럼|url=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902/e2009022018361248760.htm|출판사=서울경제|저자=장선화|날짜=2009-02-20|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2}}</ref>
==== 예술 활동 ====
[[2004년]] [[3월 24일]] 오후 서울 중앙시네마에서 열린 특별 시사회에 특별히 참석하여 관람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김수환 추기경의 마음까지 흔들어놓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url=http://www.maxmovie.com/movie_info/sha_news_view.asp?mi_id=MI0000507528|출판사=맥스무비|저자=김규한|날짜=2004-03-26}}</ref> 또한 [[테레사 수녀]]의 생애를 다룬 '마더 데레사'도 관람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nowiki>[포토]</nowiki>김수환 추기경 '마더 데레사' 관람|url=http://star.moneytoday.co.kr/view/stview.php?no=2005011214422144445&type=1&HSV1|출판사=스타뉴스|저자=김태은|날짜=2005-01-12}}</ref>
[[2007년]] [[10월 18일]]부터 23일까지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열린 ‘현대미술 오늘과 내일’ 전에 김수환이 그린 드로잉들이 전시되었다. 동성고등학교가 개교 100주년을 맞아 동문의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에서 동성고등학교의 전신인 동성상업학교를 1941년에 졸업한 김수환은, 드로잉 14점과 그가 평소 아끼던 붓으로 직접 쓴 판화 7점을 출품하였다.
 
김수환이 그린 드로잉은 검은색 유성파스텔을 이용해 동그란 얼굴 안에 눈, 코, 입 등을 그리고 그림 아래에 ‘바보야’라는 문구를 적은 자화상과 옛집, 원, 산, 기차 등이었고, 붓글씨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등이었다.<ref>{{뉴스 인용|제목=85세 김수환 추기경의 드로잉|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9&aid=0000629759|출판사=매일경제|저자=한배선|날짜=2007-10-20|확인일자확인날짜=2009-04-13}}</ref> 또한, 역시 동성고등학교 동문인 홍익대학교 미대 학장이 김 추기경의 모습을 한지에 수묵으로 그린 그림 6점도 전시되었다. 김 추기경이 만든 전시작품의 판매 수익은 장학기금으로 사용되었다.
=== 선종 및 장례 ===
[[2008년]] [[7월]]부터 노환으로 기력이 쇠약해져 [[서울성모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2008년]] [[10월 4일]] 오전 한 때, 호흡 곤란으로 산소 호흡기에 의존하는 등 위독한 상태에 이르렀으나 기력을 회복했다.<ref>{{뉴스 인용|제목=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한때 호흡기 의존"|url=http://media.daum.net/culture/religion/view.html?cateid=100028&newsid=20081004135303486&p=yonhap|출판사=연합뉴스|저자=양태삼|날짜=2008-10-04}}</ref>
 
[[2009년]] [[2월 16일]] 오후 급격히 호흡 곤란과 혈압이 떨어지면서 의식을 잃어 의료진이 응급 조치에 나섰지만, 결국 오후 6시 12분 경 [[강남성모병원]]에서 86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개신교]]와 [[대한 성공회]], [[한국 정교회]], [[불교]], [[천도교]], [[원불교]] 등 각 종파에서도 죽음을 애도했고,<ref>{{뉴스 인용|제목=종교계, ‘종파의 벽’ 넘어 깊은 추모 물결|url=http://news.kbs.co.kr/article/culture/200902/20090216/1723505.html|출판사=KBS|저자=정성호|날짜=2009-02-16}}</ref><ref>{{뉴스 인용|제목=<종교계 애도의 물결>|url=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09/02/16/0901000000AKR20090216219100005.HTML|출판사=연합뉴스|저자=김정선|날짜=2009-02-16}}</ref> 김수환 추기경을 추모하기 위해 전국에서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ref>{{뉴스 인용|제목=“아버지 잃은 슬픔” 1만여 신도·시민 마지막 배웅|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201838145&code=940100|출판사=경향신문|저자=김석종, 김향미|날짜=2009-02-20|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2}}</ref> 보도에 따르면 [[2월 20일]] 자정까지 방문한 조문객 수가 38만 7천 420여명으로,<ref>{{뉴스 인용|제목=조문객 39만명 ‘끝없는 추모 물결|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191807465&code=940100|출판사=경향신문|저자=강병한, 김향미|날짜=2009-02-19}}</ref> 이는 그해 [[5월 23일]]에 사망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를 방문한 조문객 500만명, [[1979년]] 암살된 [[박정희]]를 추모하기 위해 5일장 기간 중 [[광화문]] 앞에 모인 문상객 200만명, [[1949년]]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된 직후 그를 추모하기 위해 10일간 [[경교장]]에 조문한 100만명 등에 이은 역대 4번째 최다 조문객 방문 기록이다.<ref>{{뉴스 인용|제목=김 추기경 선종에 40만 명 조문|url=http://www.naeil.com/News/politics/ViewNews.asp?nnum=454774&sid=E&tid=0|출판사=내일신문|저자=고병수|날짜=2009-02-20}}</ref>[[2월 21일]]에는 약 40여만 명이 성당을 찾아 조문한 것으로 집계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최연소, 최고, 최다 기록|url=http://www.ytn.co.kr/_ln/0103_200902210930234975|출판사=YTN|저자=김정회|날짜=2009-02-21|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식은 국민장과 사회장 중에서 택할 것으로 결정하였다가 [[바티칸]]으로부터 특별히 교황장으로 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졌기 때문에 선종한 다음 날 [[2월 17일]]에서 [[2월 19일|19일]]까지 사흘동안 새벽 6시부터 자정까지 시신을 일반인에게 공개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명동성당 추모 조문 오늘 자정까지|url=http://mbn.mk.co.kr/news/newsRead.php?vodCode=410559&category=mbn00007|출판사=mbn|저자=박명진|날짜=2009-02-19|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단 비공개로 염습이 시작되는 [[2월 19일]] 오후 4시부터 1시간 동안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nowiki>[김수환 추기경 추모]</nowiki> 마지막 밤까지 나눔다짐 행렬…오늘 교황葬|url=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220004010|출판사=서울신문|저자=김민희, 박성국|날짜=2009-02-20|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ref>{{뉴스 인용|제목=장례절차 확정|url=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read_body.jsp?Y=2009&M=02&D=19&ID=2009021900193|출판사=조선일보|저자=김남인|날짜=2009-02-19|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조문 기간 동안 명동 대성당에 김수환 추기경을 추모하기 위해 방문한 조문객들은 명동 대성당부터 퇴계로 4가, [[명동역]], 명동역 골목을 잇는 무려 3킬로미터가 넘는 긴 행렬을 이루었으며, 4초간의 조문을 위해 평균 3시간 30분 가량을 기다려야 했음에도, 불만이나 지루해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전혀 안면이 없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커피나 음료수를 나눠주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배고픔도 추위도 잊은 3시간 줄 선 그들은 이미 성자였다|url=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500405|출판사=중앙일보|저자=김진경, 김경빈|날짜=2009-02-20|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조문 기간 동안 명동 대성당에는 [[이명박]] 및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등 전직 대통령들과 정치인,<ref>{{뉴스 인용|제목=‘우리 곁에 부활한 金추기경’|url=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90218010701300080020|출판사=문화일보|저자=엄주엽|날짜=2009-02-18|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2}}</ref>[[대한민국 정부|정부]] 관계자, 주한 외교 사절, 재계 인사, 종교계 인사, 예술인, 전현직 자치단체장 등이 조문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동지이자 후원자"…전·현직 대통령과의 '인연'|url=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546169|출판사=SBS|저자=김호선|날짜=2009-02-17|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파일:A coffin of Stephen Kim Sou-hwan.jpg|thumb|right|200px|입관 후의 모습]]
장례 미사는 [[2009년]] [[2월 20일]] [[명동성당]]에서 치러졌으며,<ref>{{뉴스 인용|제목="나도 그분처럼 살겠습니다"|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2/20/2009022001657.html|출판사=조선일보|저자=이석호, 양희동, 윤주헌|날짜=2009-02-21|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시신은 [[용인시]] [[천주교]] 공원묘원 성직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장례미사 생방송 시청률 19.2%… 정진석추기경 100분간 집전|url=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02210199|출판사=동아일보|저자=변인숙|날짜=2009-02-21|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당초에는 서울대교구장으로 장례를 치를 예정이었으나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009년]] [[2월 19일]] 교황을 대신하여 장례 미사 및 집전례를 집전하는 특사로 [[정진석 (추기경)|정진석]] 추기경을 임명하였다고 발표함으로써 교황장으로 격상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장례식은 서울대교구장에서 교황장으로 격상|url=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9021951871|출판사=한국경제|저자=박신영|날짜=2009-02-19}}</ref> 추도사는 [[베네딕토 16세]]를 비롯해 [[이명박]] 대통령([[한승수]] 국무총리가 대독), 오스발도 파딜랴 주한 교황대사 등이 했다.<ref>{{뉴스 인용|제목=“당신이 계셔서, 덜 부끄러운 역사를 살았습니다”|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201838595&code=940100|출판사=경향신문|날짜=2009-02-20|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추도 미사는 약 800여명이 참가했다.<ref>{{뉴스 인용|제목=애도 속 '장례미사'‥김 추기경, 영원한 안식|url=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2288960_2687.html|출판사=MBC|저자=김병헌|날짜=2009-02-20|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비석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사목 표어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가 [[한국어]]와 [[라틴어]]로 새겨졌으며 비문(碑文)으로는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이 없어라"라는 [[시편 23편]]의 구절이 새겨졌다.<ref>{{뉴스 인용|제목=묘비명,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url=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2288257_2687.html|출판사=MBC|저자=양효경|날짜=2009-02-19}}</ref><ref>{{뉴스 인용|제목=사랑, 사랑, 서로 사랑할게요…|url=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9022101110127163002|출판사=문화일보|저자=이용권|날짜=2009-02-21|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장례는 정통 [[가톨릭]] 예식과 [[유교]] 예식이 어우러져 치러졌으며,<ref>{{뉴스 인용|제목=김 추기경 장례 미사는 ‘동·서양 혼합’|url=http://news.kbs.co.kr/article/culture/200902/20090220/1726412.html|출판사=KBS|저자=박예원|날짜=2009-02-20|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ref>{{뉴스 인용|제목=<nowiki>[추기경님, 편히 잠드소서]</nowiki> 창(唱) 연상시키는 위령기도… 염습·삼우제 우리전통 따라|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2/20/2009022001607.html|출판사=조선일보|저자=김한수|날짜=2009-02-21|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2}}</ref> 장례와 관련한 모든 의식은 국가기록물로 지정되고 기록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nowiki>[김수환 추기경 영면]</nowiki> '장례 절차' 국가기록물로… 클린턴 미 국무도 애도|url=http://news20.busan.com/news/newsController.jsp?subSectionId=1010090000&newsId=20090221000035|출판사=부산일보|저자=권상국|날짜=2009-02-21|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2월 22일]]에는 [[대한민국]] 전국의 성당에서 추도 미사가 열렸다.<ref>{{뉴스 인용|제목=오늘 정오 故 김수환 추기경 추도 미사|url=http://news.kbs.co.kr/article/culture/200902/20090222/1726813.html|출판사=KBS|저자=송형국|날짜=2009-02-22|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2}}</ref><ref name="sbs1">{{뉴스 인용|제목=김 추기경 가르침 되새기며…전국에서 추도미사|url=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548794|출판사=SBS|저자=주시평|날짜=2009-02-22|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8}}</ref> 서울대교구는 [[2009년]] [[4월 5일]]([[주님 수난 성지 주일]])까지 사순절 기간을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추모 기간으로 선포했다.
=== 선종 이후 ===
한편, 김수환 추기경은 [[1990년]] [[1월 5일]]에 장기 기증에 서약하였고,<ref>{{뉴스 인용|제목="장기기증 서약 장면 눈에 선합니다"|url=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sid2=245&mid=hot&gid=249782&sid1=103&nh=20090220071554&cid=249765&iid=72807&oid=001&aid=0002512153|출판사=연합뉴스|저자=박성민|날짜=2009-02-19}}</ref> 선종 후에는 자신의 [[각막]]을 두 사람에게 기증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고 김 추기경의 각막…안동 70대 이식|url=http://news.naver.com/hotissue/ranking_read.php?section_id=103&ranking_type=popular_day&office_id=003&article_id=0002534340&date=20090219&seq=7|출판사=뉴시스|저자=피재윤|날짜=2009-02-19}}</ref> 김수환 추기경이 각막을 기증했다는 사실이 보도되고 나서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에는 평소보다 10배나 많은 사람이 장기기증 의사를 밝혔고,<ref>{{뉴스 인용|제목=김수환 추기경 선종 이후 장기기증 등록 10배 늘어|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2534966|출판사=뉴시스|저자=류난영|날짜=2009-02-19}}</ref> 여타 공공기관 등에서의 장기기증 약속,<ref>{{뉴스 인용|제목=全 장관 등 복지부 1, 795명 장기기증 서약|url=http://economy.hankooki.com/lpage/society/200902/e2009022717324693780.htm|출판사=서울경제|저자=김광수|날짜=2009-02-27|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8}}</ref> 그리고 연예인들의 장기 기증 의사 또한 이어졌다. 특히 가수 [[장윤정]], [[서인영]], [[박현빈]], [[쥬얼리 S]], 배우 [[정한용]], 희극인 [[양원경]] 등이 자신의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장기기증 운동본부 관계자는 “김 추기경 선종 이후 장기기증 문의가 쇄도했고 실제로 기증 의사를 밝힌 사람 수도 많이 늘었다며, “특히 선종 이후 5일까진 기증 희망자가 너무 많아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라고 말했다.<ref>{{뉴스 인용|제목=스타들도 각막 기증 릴레이|url=http://www.fnnews.com/view?ra=Sent0701m_View&corp=fnnews&arcid=090219222224&cDateYear=2009&cDateMonth=02&cDateDay=20|출판사=파이낸셜뉴스|저자=정명진|날짜=2009-02-19}}</ref>
또한, 그의 평소 가르침에 따라 자원 봉사와 입양 등의 봉사도 이어졌다.<ref>{{뉴스 인용|제목=멈추지 않는 ‘명·동·기·적’|url=http://pdf.joins.com/index.asp?form_type=article_f&id=DY01200902210053&keyword=%B8%ED%B5%BF%BC%BA%B4%E7%20%C7%E0%B7%C4&s_startyear=2009&s_startmonth=02&s_startday=21&s_endyear=&s_endmonth=&s_endday=&pagenum=1&s_year=2009&s_month=02&s_day=21&re_keyword=&re_search=&re_keyword2=&re_search2=&s_field=&list_type=2&sv=text|출판사=중앙일보|저자=임미진, 장주영, 이진주, 김경빈|날짜=2009-02-21|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 서점가에는 그와 관련된 책이 잇따라 출간되었으며, [[수원대학교]] 명예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구중서]] 교수가 김 추기경 평전으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세요.》를 집필하였다. 김수환의 말과 글을 시구처럼 편집한 엮은 잠언집 《바보가 바보들에게》도 발간되었다. 현재 천주교 서울 대교구는 그가 한국 사회에 남긴 인사말을 사회운동으로 펼치고 있다. 서울대교구는 그가 선종한 후 [[2009년]] [[3월 9일]]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적힌 지름 9cm 크기의 원형 스티커를 50만 장 찍어 일반에 배포되었다.
* 이 스티커는 빨간색을 바탕으로 그가 그린 자화상 《바보야》를 중앙에 새겨, 많은 사람이 차량 유리창이나 사무실 출입문 등에 이 스티커를 붙여 김 추기경의 넋을 기렸다.<ref>{{뉴스 인용|제목=스타들도 각막 기증 릴레이|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8&aid=0002120341|출판사=머니투데이|저자=정진우|날짜=2009-03-21}}</ref>
[[2004년]] 사순절 기념 강연에는 노무현 탄핵사태 등으로 국론이 분열될 것을 우려하며 여당에 참을 것을 주문하였다가 [[함세웅]] 신부로부터 불의한 독재시대에 권력자들이 늘 했던 표현이며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ref name="news.hankooki.com"/><ref name="news.naver.com"/> 그 뒤 그는 우연히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의 단식농성 현장을 찾아 위문했다가 다시 [[함세웅]] 신부의 규탄을 받기도 했다.<ref name="ReferenceA"/><ref>{{뉴스 인용|제목="일부 성직자 <조선>에 이용당하고 있다 역사·가족 앞에 부끄럽지않은 기자 돼야"|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0048165|출판사=오마이뉴스|저자=장윤선|날짜=2004-07-17}}</ref>
 
그는 사립학교법 개정에 반대하기도 하였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 때는 촛불시위 자제를 촉구하기도 해 진보 진영에서 비판하기도 하였다.<ref name="news.khan.co.kr"/><ref name="dailyseop.com"/><ref>{{뉴스 인용|제목=<nowiki>[태평로]</nowiki> 인간의 길에서 신의 길을 보다|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2/19/2009021901725.html|출판사=조선일보|저자=박은주|날짜=2009-02-19|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1}}</ref>
 
그리고 그가 "군장성에게서 사병들 가운데도 반미 친북 성향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나라의 전체적 흐름이 반미 친북 쪽으로 가는 것은 대단히 걱정스럽다"고 말하자, [[손석춘]]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47&aid=0000041854 추기경의 근심, 백성의 걱정]</ref>
그렇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국가원로' 김 추기경의 남북관계 발언 대목이 위기에 처한 민족현실을 오도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추기경이 수구언론만 읽어 현실을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어 답답했습니다.}}
 
또한, [[국가보안법]] 존치를 지지해 진보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nowiki>[오병상 시시각각]</nowiki>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숙제|url=http://news.joins.com/article/aid/2009/02/18/3314553.html?cloc=olink|article|default|출판사=중앙일보|저자=오병상|날짜=2009-02-18|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2}}</ref> 이에 [[백남해]] 신부는 [[2004년]] [[9월 20일]]자 <경남도민일보>에 칼럼을 기고해 다음과 같이 추기경을 비판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2&aid=0000013422 '시골의 한 어리석은 신부가 김수환 추기경께']</ref>
{{인용문|"추기경께서는 1989년 [[서경원]] 전 의원의 밀입북 사건 때문에 [[국가보안법]]의 불고지죄로 조사받을 뻔 하셨지 않았습니까. 15년 전 추기경께서 안기부에 연행되어 가셨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악법을 없애는 데는 이른 시기가 없고, 아무리 빨라도 늦은 것 아닙니까"}}
 
== 문장 ==
[[파일:Coat of arms of Stephen Kim Sou-hwan.svg|섬네일|김수환 추기경 문장]]
방패 안의 왼쪽은 [[순교|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진 한국 교회를, 오른쪽은 삼각산과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을 상징하며, 별은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모심을 나타낸다. 주교의 권위를 상징하는 모자 아래의 술5단은 추기경임을 뜻한다.<ref>{{뉴스 인용|제목=<nowiki>[추기경님, 편히 잠드소서]</nowiki> '삼각산과 서울'이 표현된 김(金)추기경 문장<紋章>|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2/20/2009022001610.html|출판사=조선일보|저자=김기철|날짜=2009-02-21|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2}}</ref>
 
아랫쪽에 리본에 씌어있는 "PRO VOBIS ET PRO MULTIS"는 [[라틴어]]이며, 한국어로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뜻이면서 김수환 추기경의 사목표어이다.<ref>{{뉴스 인용|제목=찢기고 갈라진 우리 한데 묶어놓고… '큰어른' 김수환 추기경 영면|url=http://www.segye.com/Articles/NEWS/SOCIETY/Article.asp?aid=20090220003471&subctg1=&subctg2=|출판사=세계일보|저자=김재홍, 장원주|날짜=2009-02-20|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22}}</ref>
 
== 학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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