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 관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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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이 1983년 5월의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을 해결하고 나서, 서로 외교 관계가 없던 양국이 1983년 8월, 중국 민항기가 한국의 비행정보구역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합의가 이루어졌다. 또한 이 사건은 체육·문화·관광 등의 비정치적인 영역에서 양국이 교류를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 [[노태우 정부]]가 표방한 [[북방 정책]]에 대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비에트 연방]]에 비하여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끼지 않았다. 또한 소련에 비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은 1980년대에 대한민국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았다. 특히 경제 분야에서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상호 보완적인 경제적 필요성과 지리적 접근성으로 인하여 활발한 교역을 하기 시작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련과 비교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정치적으로 더 가까웠기 때문에, 양국 간의 무역량 증대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정치관계의 향상은 더디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국, 일본 간 관계의 중재와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미국 3자간의 대화를 시작하도록 노력하였다.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간의 민간 계약은 더욱 활발해졌다. 양국은 1980년대 말이 되면 자유롭게 상호 방문을 허락하여 학술, 언론, 특히 이산가족 교류가 가능해졌다. 200만명에 가까운 한민족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의 한민족들([[조선족]])은 대한민국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적 소동이 중화인민공화국-대한민국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1989년 톈안먼 사건]]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예상대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억압적인 조치를 도왔다. 이와 반대로, 대한민국은 더욱 침묵했으나 [[1989년 톈안먼 사건]]을 부추긴 것도 그렇다고 비난한 것도 아니었다. 양국의 교역은 더욱 증가하고 있었다.
 
1989년 12월 [[냉전]] 종식이 선언되고, 1989년 5월에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중-소관계가 정상화된 것은 한-중 수교의 중요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울러 노태우 정부의 한-소 수교의 성공이 중화인민공화국에게도 영향을 미쳐 한중 수교를 앞당겼다고 할 수 있다.<ref>{{웹 인용 |url=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2919|제목= 한-중 수교 (1992.8) |확인일자확인날짜=2009-07-11 |형식= |웹사이트= 국가기록원 나라기록 |저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등}}</ref> 1992년 8월부터 [[대한민국]]은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고 있다.
 
=== 수교 이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