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일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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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일신방직의 사외이사로 초빙되기도 하였고, 각종 장학 사업을 후원하였으며 [[1994년]]에는 [[방일영국악상]]을 제정하여 매년 [[한국]]의 우수 국악인들을 시상하였고, [[1995년]] [[5월]]에는 방일영문화재단을 설립하여 문화예술인 지원사업을 추진했다.
 
조선일보 전 사주 [[방응모]]의 손자이자, 이후 조선일보 회장을 지낸 [[방우영]]의 형이다. 첫째 아들 [[방상훈]]은 2006년 현재 [[조선일보]] 대표이사이며, 둘째아들 [[방용훈]]은 [[코리아나 호텔]] 대표이사이다.<ref name="재판결과" >{{뉴스 인용|제목='밤의 대통령' 2세들 재산다툼 한매듭|url=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05918.html|출판사=한겨레|저자=박현철|날짜=2008-08-21}}</ref> '''밤의 대통령'''<ref>{{뉴스 인용|제목 = 노친과의 아픈 타협, 그 약속을 지키다|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47&aid=0001956915|출판사 = 오마이뉴스|저자 = 지요하 기자|쪽 = |날짜 = 2009-07-14|확인일자확인날짜 = 2010-01-21}}</ref>, '''밤의 황제'''이라는 별칭이 있다. [[평안북도]] 박천출신으로 본관은 [[온양 방씨|온양]]이며, 아호는 우초(愚礎)이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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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1월15일 회장에 취임하는 동시에 동생인 [[방우영]] 현 조선일보 명예회장을 [[조선일보]] 대표이사 겸 사장으로 임명해 일선경영을 맡겼으며, 1970년까지도 실질적인 경영권을 행사했다. 방우영은 1970년부터 실질적인 경영권을 넘겨받아 조선일보의 성장기를 주도하게 된다. [[1993년]] 3월에는 지병인 당뇨로 인해 조선일보 이사 고문직까지 사퇴하며 경영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는 조선일보 재직기간중이던 [[1980년]]대 조선일보를 급팽창시켜 발행유가부수 1위의 신문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이같은 성장과정은 80년 [[광주학살]]이후 전두환 군사정권과의 유착이 큰 밑바탕이 됐고, [[코리아나 호텔]] 특혜의혹 등 적잖은 시비를 낳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 = '혼맥'을 알면 '조·중·동의 대한민국'이 보인다|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2&aid=0001952196|출판사 = 프레시안|저자 = 신학림|쪽 = |날짜 = 2009-07-02|확인일자확인날짜 = 2010-01-21}}</ref> 또한 대통령선거 등 주요한 정치전환기마다 강한 정파성을 드러내 '[[안티조선]]' 운동을 자초하기도 했으며 지금도 '족벌언론' 논란에 휘말려있는 상태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2&aid=0000005861& 방일영 조선일보 전 고문 사망 - 숙환으로 8일 새벽, '밤의 대통령'으로 불리며 조선일보 팽창 ]</ref>
 
[[1975년]] 방일영의 사재(私財) 출연금으로 '방일영장학회'를 법인으로 발족했다. 방일영은 방우영과 형제가 보유한 15%를 재단의 기금으로 새로 출연하고, 20년간 운영되어 왔던 '방일영장학회'의 장학기금 15억 여원을 합해 그 해 11월 비영리 공익법인으로 방일영장학회(재단)을 설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