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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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고는 곡물의 자유 거래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러한 내용의 포고령은 [[1774년]] [[9월 13일]] 승인되었으나 [[왕실고문회]]({{llang|fr|conseil du roi}})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다. 가장 파격적인 부분은 포고령의 서문이었다. 이는 칙령이 근거하고 있는 원칙에 대해서 서술하였고, 계몽사상가들은 이를 지지하였지만 일부로부터는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튀르고는 이를 "마을의 판사가 어떠한 소작인들에게 설명해 주어도 알아들을 만큼 명확하게"하기 위해서 세 번에 걸쳐서 다시 적었다. 이 포고령으로 인해 튀르고는 [[조세프 마리 테레]]의 체제에서 가능했던 곡물 투기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게다가 중농주의자들을 반대하였던 [[페르디난도 갈리아니]]의 세력은 상당히 커졌으며 [[시몽 니콜라 앙리 링게]]와 [[자크 네케르]] 또한 중농주의에 반대하였다. 네케르는 [[1775년]] 튀르고의 중농주의 정책에 반대하여 ''Essai sur la législation et le commerce des grains''를 저술하였다.
 
그러나 튀르고의 가장 큰 장애물은 [[1774년]]의 흉작이었다. 이로 인해서 [[1774년]] 겨울과 [[1775년]] 초봄에 빵의 가격이 상승하였다. [[1775년]] 4월 [[디종]]에서 이로 인하여 일련의 소동이 일어났고, 5월에는 '밀가루 전쟁'이라고 불리는 폭동이 일어났다. 튀르고는 폭동의 진압 과정에서 확고부동함과 결단력을 보여주었으며, 왕실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1775년]] 7월 튀르고의 위치는 [[크레티앙크레티앵 기욤 드 라무아뇽 드 말제르브|말제르브]]가 내각에 입성하면서 강화되었다.
 
===6개항의 포고령===
튀르고는 6개항의 포고령을 [[1776년]] 1월 [[왕실고문회]]에 제출하였다. 6개중 4개는 큰 중요성을 가지지 않았으나 나머지 2개가 상당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둘 중 하나는 부역의 폐지였고, 나머지 하나는 교역 특권을 가진 [[길드]]의 금지였다. 부역의 폐지에 대한 포고령의 서문에서 튀르고는 특권의 폐지와 성직자, 귀족, 제3계층 모두(이후 [[모르파]]의 요청에 의해서 성직자 계층은 제외되었다.)에 대한 과세가 목표임을 밝혔다. 또 길드의 금지에 대한 포고령은 모든 사람은 제한 없이 일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원칙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6개항의 포고령은 [[3월 12일]]에 승인을 받았지만, 이로 인해서 튀르고는 거의 모든 고위층들을 적으로 두게 되었다. 상위 계층의 특권에 대한 튀르고의 공격은 그를 귀족과 의회의 눈 밖에 나게 만들었으며, 그의 왕실 재산에 대한 개혁은 법원과, 자유 무역에 대한 법률 제정은 자본가들과, 관용과 개신교도들에 대한 옹호는 성직자들과, 그의 길드에 대한 칙령은 [[파리 시|파리]]의 중산계층들과 [[콩티 공]]과 같은, 길드를 통해서 이익을 얻고 있던 사람들과 마찰을 빚었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튀르고가 그녀의 후견인들에게 하사품을 주는 일을 반대한 일과 [[가브리엘르 드 폴라스트롱|폴리냐크 부인]]의 비슷한 행동에 비판을 가한 일 때문에 그를 싫어했다.
 
결국 국왕 [[프랑스의 루이 16세|루이 16세]]도 튀르고가 다른 고위층과 충돌하는 분위기를 감지하였다. 게다가 튀르고의 친구인 [[크레티앙크레티앵 기욤 드 라무아뇽 드 말제르브|말제르브]]까지 튀르고가 너무 경솔하였다고 생각하였고, 이에 따라 은퇴를 원하게 되었다. [[모르파]] 역시도 튀르고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모르파는 이미 튀르고로부터 등을 돌린 상태였다.
 
===튀르고의 계획===
다른 중농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튀르고는 [[계몽절대주의]]를 믿었고 왕이 개혁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의회는 정의의 태두리 밖에서는 권한을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법률제정에 대한 외부의 개입을 반대하였다. 그는 지난날의 의회를 재생시키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르네 니콜라 샤를 오귀스탱 드 모푸|모푸]]와 [[조세프 마리 테레]]의 사임으로 그가 집권할 수 있었고 또한 의회의 힘을 과소평가하였기 때문에 이를 효과적으로 반대하지는 못하였다. 튀르고는 두 특권 계층이 지나치게 큰 힘을 가진 채로 열릴 것을 우려하여 [[크레티앙크레티앵 기욤 드 라무아뇽 드 말제르브|말제르브]]가 발의한 [[삼부회]]의 개회를 반대하였다.
 
튀르고의 계획은 비공식적으로 왕에게 제출된 논문인 ''Mémoire sur les municipalités''에 드러나 있다. 튀르고의 계획에서는 토지의 소유자만이 투표권을 가지고, 세 계층 사이에 아무런 차별 없이 의회를 개회하도록 되어있다. 마을이나 도시의 투표권자들이 해당 지역의 대표를 뽑으면, 이 대표들은 주 단위로 다시 대표를 뽑고 이렇게 해서 뽑힌 대표가 최상위 의회에 참석하는 방식이다. 이 의회는 입법부의 권한은 없으나, 징세 관리에 대해 논하게 된다. 이러한 계획은 교육, 하층민들에 대한 복지 등과도 연관 지어져 있었다. [[프랑스의 루이 16세|루이 16세]]는 이를 그다지 따르지 않았고, 이에 따른 근본적인 의견차이로 인하여 왕과 관리 사이의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실각과 그 후 (1776-1781)==
튀르고의 실각의 직접적 원인은 명확하지 않다. 일부에서는 [[자크 네케르]]가 왕비에 대한 공격이 포함된 날조된 편지를 왕에게 보이고, 튀르고의 무능함을 보이기 위해서 왕 앞에서 튀르고의 예산안에 대한 논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이들은 튀르고의 사임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압력이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모르파]]의 음모가 원인이라고도 한다. [[1776년]] 4월 [[크레티앙크레티앵 기욤 드 라무아뇽 드 말제르브|말제르브]]가 사임한 후 튀르고와 모르파는 말제르브의 후임 문제로 다투었고 이 과정에서 튀르고가 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르파를 심하게 비난한 일로 인하여 결국 튀르고는 모르파를 적으로 두게 되었다. 원인이 어쨌든 간에, 너무 많은 적을 두게 된 튀르고의 사임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지만 튀르고 자신은 그의 개혁 정책을 완성시킬 수 있도록 더 오랜 기간 동안 재정총감으로 남아있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1776년]] [[5월 12일]] 튀르고는 해임되었다. 해임 직후 튀르고는 [[라 로슈 기용]]에 위치한 엥빌 공작부인의 [[샤토]]에 머무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 시|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파리에서 남은 일생을 과학과 문학 연구에 매진하였고 이로 인해서 [[1777년]] 인문학 학회인 Académie des Inscriptions et Belles-Lettres의 부회장이 되었다. 튀르고는 [[1781년]] [[3월 18일]]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