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 (성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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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
* '''[[함규]]'''(咸規, [[생년 미상]] ~ [[945년]]) : [[함씨]]의 중시조이다중시조(中始祖)이자 고려의 개국공신(開國功臣), 권신(權臣). [[고려]] 초기 [[광주시 (경기도)|광주]](廣州)의 대호족으로, [[양근 함씨]]였으나 개국공신으로 왕씨 성을 [[고려 태조|태조]]에게 사성을왕씨 성을 사성 받아 왕규(王規)가 된다. 함규는 당시 양근을 포함한 광주목에서광주지역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닌 인물이었고, 함규는 고려를[[고려 세운 왕건을태조|태조]]를 도와 [[후삼국]] 통일에 앞장서 고려의 개국에 공을 세워 익찬개국공신(翊贊開國功臣) 등의 작위를 받았다. 중부의 강력한 호족이었던 함규는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고,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대광(大匡), 광평시랑평장사(廣平侍郞平章事)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왕규는 [[고려 혜종|혜종]]을 보필하라는 태조의 유지를 받들었으나, 혜종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의왕위 난인쟁탈전인 [[왕규의 난]](王規之亂)으로 [[처형]]당하였다.
*:고려왕실과의고려 왕실과의 인척관계 : [[고려 태조|태조]]비 [[광주원부인]], [[소광주원부인]], [[왕무|혜종]]비 [[후광주원부인]]
 
* '''[[함유일]]'''(咸有一, 1106년 ~ 1185년) 11월 26일)은: 고려의 관리이다관리. 본관은자는 양근형천(楊根亨天), 자는 형천이다. 고려 건국공신개국공신 함규(規)의 5세손이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삼촌밑에서외삼촌 컸다밑에서 자랐다. 아버지아버지의 친구인 이준양의재상(宰相) 이준양(李俊陽)의 도움으로 처음 관직생활을관직에 시작했으며올랐으며, 1135년 묘청의 난을 평정할 때 공이 있어 왕충의추밀원사(樞密院使) 왕충(王沖)의 추천으로 선군기사(選軍記事)가 되었다. 명종의종 때 병부낭중·공부상서 등을 지냈다.재위기에 일찍이 교로도감으로교로도감에 있을 당시 서울에는 무당과 음사(귀신을 모시는 집)가 많아 민심을 현혹시켰다. 그는 이 음사를 모두 불태워 버리고 무당들을 서울 밖으로 내쫓아 미신을 배척한 자로서 유명하였다. 또한이후, 감찰어사(監察御史), 황주판관(黃州判官), 삭방도감창사(朔方道監倉使)를 거쳐, 명종 때 병부낭중(兵部郎中)·공부상서(工部尙書) 등을 지냈다. 그는 자녀들에게 가난함이 절대로 수치가 아님을 강조하면서, 절약하며 검소하게 살아갈 것을 당부했다. 평생일생동안 베옷만을 입었으며 질그릇만을 쓰는 등 청빈하게 살았다.
* '''[[함순]]'''(咸淳) : 고려 중기중기의 문신문장가. 자는 자진(子眞). 형부낭중(刑部郞中)을 역임했다. 고려 건국공신개국공신 규(規)의 6세손이며, 명종 때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치사(致仕)한 유일(有一)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절행(節行)이 있었다. 또한, 순박하고 중후하여 정도(正道)로 책임을 삼으며 효경과 충신을 바탕으로 한 문사(文辭)가 탁월하였다. 최충(崔冲)이 설립한 문헌공도(文憲公徒) 출신으로 급제 후 양양과 남방 어느 고을의 지방관이 되었고, 감찰어사(監察御史), 형부낭중(刑部郞中), 병부시랑(兵部侍郞) 등을 역임했으며, 최충헌(崔忠獻) 집권시에는 사직(司直)이라는 한직에 머물렀다. 이인로(李仁老)·오세재(吳世才)·임춘(林椿)·조통(趙通)·황보항(黃甫抗)·이담지(李湛之) 등의 명유(名儒)들과 교류를 맺고 진(晋)나라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본떠 강좌칠현(江左七賢)을 조직하여, 시(詩)와 술을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 '''[[함부열]]''' : 함규고려의 관리. 고려 개국공신 규(規)의 13세손13세손인 함승경의승경(承慶)의 둘째 아들로, 고려 우왕 13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공양왕 2년에 예부상서를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그는 이성계의 조선개국을 반대한 두문동(두문불출이두문불출의 생긴유례유래) 72현의 학사로써학사로서{{출처|날짜=2018-08-31}} 폐위폐위된 공양왕을 끝까지 섬기다섬겼다. 공양왕 사후 그의 시신을 자신의 손으로 거두고거두어 자신의 묘지 위에 ​가묘로​가묘(假墓)로 위장했다. 고려 왕조에 충성을 다한 만고충절의 학사로써학사이며, 양근 양근함씨함씨 죽계공파의 파조(派祖)이다​.
* '''[[함순]]'''(咸淳) : 고려 중기 문신. 자는 자진(子眞). 형부낭중(刑部郞中)을 역임했다. 고려 건국공신 규(規)의 6세손이며, 명종 때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치사(致仕)한 유일(有一)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절행(節行)이 있었다. 또한, 순박하고 중후하여 정도(正道)로 책임을 삼으며 효경과 충신을 바탕으로 한 문사(文辭)가 탁월하였다. 최충(崔冲)이 설립한 문헌공도(文憲公徒) 출신으로 급제 후 양양과 남방 어느 고을의 지방관이 되었고, 최충헌(崔忠獻) 집권시에는 사직(司直)이라는 한직에 머물렀다.
 
* '''[[함부림]]'''(咸傅霖, 1360년 ~ 1410년) : 조선의 개국공신(開國功臣). 고려 개국공신 규(規)의 13세손인 승경(承慶)의 맏아들로, 1385년(우왕 11) 문과에 급제해 예문검열(藝文檢閱)을 거쳐 좌정언과좌정언(左正言)과 형조정랑을형조정랑(刑曹正郞)을 지냈다. 1392년(공양왕 4) 이성계(李成桂)가 실권을 잡자 병조정랑(兵曹正郞)도평의사사경력사도사에도평의사사경력사도사(都評議使司經歷司都事)에 복직되었고, 조선의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어 개성소윤에예조의랑(禮曹議郞)을 거쳐 개성소윤(開城少尹)에 임명되었다. 형조의랑에 이어 대사성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좌산기상시로서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서 상서소윤(尙瑞少尹)을 겸하고 명성군(溟城君)에 봉해졌다. 태종 초기에 충청도관찰출척사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동북면도순문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事) 겸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 겸 영흥부윤(永興府尹) 등을 역임하였다. 1404년(태종 4) 참지의정부사로서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서 대사헌에대사헌(大司憲)에 올랐다. 다음 해 경기도관찰사를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역임하고, 1406년에 계림부윤(鷄林府尹)·경상도관찰출척사를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지냈다. 다음 해 다시 참지의정부사로서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8년 형조판서가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 조선(朝鮮)에서 8도(경기, 충청, 경상, 전라, 강원, 황해, 평안, 함경도)의 관찰사(觀察使)를 모두 지낸 두 인물 중 한 명이다.<ref>http://www.iusm.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0041#09SC</ref>.<ref>http://www.economytalk.kr/news/articleView.html?idxno=144347#07AG</ref> 시호는 정평(定平). 강릉함씨강릉 함씨 정평공파의 파조(派祖)이다.
* '''[[함부열]]''' : 함규(王規)의 13세손 함승경의 둘째 아들로 고려 우왕 13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공양왕 2년에 예부상서를 지냈다​. 그는 이성계의 조선개국을 반대한 두문동(두문불출이 생긴유례) 72현의 학사로써 폐위 공양왕을 끝까지 섬기다 공양왕 사후 그 시신을 자신의 손으로 거두고 자신의 묘지 위에 ​가묘로 그 충성을 다한 만고충절의 학사로써 양근함씨 죽계공파의 파조(派祖)이다​.
 
* '''[[함우치]]'''(咸禹治, 1408년 ∼ 1479년) : 함부림의고려 개국공신 규(規)의 14세손인 부림(傅霖)의 아들. 음보(蔭補)로 감찰이감찰(監察)이 되고, 고부군수(古阜郡守)·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나주목사를나주목사(羅州牧使)를 거쳐, 1451년(문종 1)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올랐다. 1453년(단종 1)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1455년(세조 1) 공주목사에공주목사(公州牧使)에 이어 1457년 함길도도관찰사가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가 되었으며, 1459년에는 대사헌을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중추원부사를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역임하고, 같은 해에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전라도·경상도의 관찰사를관찰사(觀察使)를 두루 역임하고 개성부유수가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는데, 재임할 때는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하였다. 1465년 형조참판이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어 동평군(東平君)에 봉해졌으며, 1470년(성종 1) 형조판서에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좌우참찬을좌우참찬(左右參贊)을 역임하였으며, 뒤에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평양(平襄).
* '''[[함부림]]'''(咸傅霖, 1360년 ~ 1410년) : 1385년(우왕 11) 문과에 급제해 예문검열(藝文檢閱)을 거쳐 좌정언과 형조정랑을 지냈다. 1392년(공양왕 4) 이성계(李成桂)가 실권을 잡자 병조정랑 겸 도평의사사경력사도사에 복직되었고, 조선의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어 개성소윤에 임명되었다. 형조의랑에 이어 대사성·좌산기상시로서 상서소윤(尙瑞少尹)을 겸하고 명성군(溟城君)에 봉해졌다. 태종 초기에 충청도관찰출척사·예문관제학·동북면도순문사·동북면도순문찰리사 겸 병마도절제사 겸 영흥부윤 등을 역임하였다. 1404년(태종 4) 참지의정부사로서 대사헌에 올랐다. 다음 해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406년에 계림부윤·경상도관찰출척사를 지냈다. 다음 해 다시 참지의정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8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시호는 정평(定平). 강릉함씨 정평공파의 파조(派祖)이다.
 
* '''[[함헌]]'''(咸軒, 1508년 ∼ ?) : 함부림고려 개국공신 규(規)의 18세손이자 부림(傅霖), 부림(傅霖)의 4대손. 아버지는 부호군 함좌무좌무(左武). 자는 가중(可中). 호는 칠봉(七峰)이다. 1534년(중종 29) 알성문과에 병과로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간성군수가 되었다. 1552년(명종 7) 예빈시정(禮賓寺正)으로 있을 때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이천부사가이천부사(利川副使)가 되었다. 1562년 삼척부사를삼척부사(三陟副使)를 지냈으며, 재임중재임 중 관리들의 기강을 확립하고 백성들을 구휼하여 치적을 남겼다. 저서로는 『칠봉문집(七峰文集)』이 있다. 중종 때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오자도가 그린 공자의 초상을 강릉으로 가져와 오봉서원을오봉서원(五峯書院)을 세웠다. 강릉함씨강릉 함씨 칠봉공파의 파조(派祖)이다.
* '''[[함우치]]'''(咸禹治, 1408년 ∼ 1479년) : 함부림의 아들. 음보(蔭補)로 감찰이 되고, 고부군수·군기시부정·나주목사를 거쳐, 1451년(문종 1)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올랐다. 1453년(단종 1)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455년(세조 1) 공주목사에 이어 1457년 함길도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459년에는 대사헌을 거쳐 중추원부사를 역임하고, 같은 해에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전라도·경상도의 관찰사를 두루 역임하고 개성부유수가 되었는데, 재임할 때는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하였다. 1465년 형조참판이 되어 동평군(東平君)에 봉해졌으며, 1470년(성종 1) 형조판서에 올랐다.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좌우참찬을 역임하였으며, 뒤에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평양(平襄).
 
* '''[[함헌]]'''(咸軒, 1508년 ∼ ?) : 함부림(傅霖)의 4대손. 아버지는 부호군 함좌무(左武). 1534년(중종 29)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간성군수가 되었다. 1552년(명종 7) 예빈시정(禮賓寺正)으로 있을 때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이천부사가 되었다. 1562년 삼척부사를 지냈으며, 재임중 관리들의 기강을 확립하고 백성들을 구휼하여 치적을 남겼다. 저서로는 『칠봉문집』이 있다. 중종 때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오자도가 그린 공자의 초상을 강릉으로 가져와 오봉서원을 세웠다. 강릉함씨 칠봉공파의 파조(派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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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급제자 ===
강릉,양근 함씨는 고려조 문과 급제자 6명(고려 3명, 조선조 문과급제자조선 3명), 무과 급제자 71명, 생원·진사시 급제자 21명, 잡과 급제가급제자 4명을 배출하였다.<ref>http://people.aks.ac.kr/index.aks</ref>
 
=== 항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