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승 (화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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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경력으로 광복 후에 적극적인 친일 미술인으로 꼽힌 김인승은 [[조선미술건설본부]] 창설 때 배제되는 등 잠시 활동에 제약을 받았으나, 친일 청산 문제가 흐지부지되면서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어 이후 학장을 지냈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 작가 및 심사위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국제조형예술협의회]] 한국위원장 등으로 한국 화단의 대부로 활동했다. 특히 서양화의 구상 계열에서 그의 영향력은 컸다.
 
[[1968년]]에 [[3·1문화상]]을 수여받았고, [[1974년]] 이후로는 [[미국]]으로 이주해 활동했다. 말년에는 〈들장미〉(1964), 〈장미〉(1973), 〈백장미〉(1985) 등 장미와 모란을 주로 그렸다. '장미의 화가'라는 별칭은 이같은 후기 작품 경향에서 얻어진 것이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미술 분야에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