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페리노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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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글 영어판 분류 정보를 이용.+분류:1859년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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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체지도설명 =
| 영토 =
| 결과 = 프랑스 사르데냐의 승리<br />비야프란카빌라프란카 협정
| 상태 =
| 교전국머리말 = <!--교전국 대신 다른 표현을 쓸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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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끝난 직후 나폴레옹 3세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협상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나폴레옹 3세는 통일 이탈리아 출생으로 프랑스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늘어날 것을 경계하였고, 적당한 수준에서 강화를 맺고자 했다. 한편, 프란츠 요제프 1세도 [[헝가리 왕국]]의 반란의 기미를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을 계속 수행할 생각은 없었다.
 
[[7월 11일]], 《[[비야프란카빌라프란카 휴전]]》이 체결되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은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 제외한 [[베네토]]를 사르데냐에 할양함과 동시에 이탈리아에 대한 불간섭을 약속했다. 사르데냐 총리 [[카밀로 벤소 디 카보우르 백작|카밀로 카보우르]]는 조약의 내용에 불만이 많았지만, 프랑스의 군사 원조를 잃지 않기 위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휴전 조약을 받아들였고, 카밀로 총리는 사임했다. 이것으로 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은 끝이 났다.
 
그러나 고조된 이탈리아 통일의 기운은 진정되지 않았다. [[파르마 공국|파르마]], [[모데나 레조 공국|모데나]], [[토스카나 대공국|토스카나]]에서 잇따라 반란이 발생했고, 곧 사르데냐는 이러한 여러 지역을 합병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다시 카밀로를 총리로 임명하고, 프랑스로부터 병합을 인정받기 위한 협상에 나서게 했다. 카밀로는 승인의 댓가로 [[니스 (프랑스)|니스]]와 [[사부아]]를 프랑스에 할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