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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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년]] [[9월 21일]] 국민공회는 공화정을 선포하여, [[프랑스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에 따라 [[1791년 프랑스 헌법]]은 불과 1년 만에 폐지됐다.
 
공화국 정부는 루이 16세를 혁명 재판에 회부했다. 국왕이 전쟁 때 프랑스 정부와 국민을 배신했다는 증거가 많이 제출되어 [[1793년]] [[1월 14일]] 국민 공회는 찬성 387, 반대 334로 루이 16세의 사형을 의결했다. 그러나 찬성 중 26표는 [[집행유예]]를 검토해야 한다는 조건부였다. 이 26표를 반대표로 의결하면 찬성 361 대 반대 360로 찬반 동수가 되기 때문에, 18일 집행유예에 대한 투표가 진행됐다. 찬성 380 대 반대 310로 집행유예 없음으로 의결되었기 때문에, 사형이 확정됐다. [[1월 21일]], 2만 명의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루이 16세]]는 파리의 혁명 광장(현재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에 처형되었다.<ref>{{서적 인용 |저자 = Arthur William Holland |제목 = [[:en:s:1911 Encyclopædia Britannica/French Revolution, The|1911 Encyclopædia Britannica/The French Revolution]] |연도=1911 |장 = Trial and execution of Louis XVI. |출판사 = | id= |쪽=|인용문 = On the question whether Louis was guilty none ventured to give a negative vote. The motion for an appeal to the people was rejected by 424 votes to 283. The penalty of death was adopted by 361 votes against 360 in favour of other penalties or of postponing at least the execution of the sentence. On the 21st of January 1793 Louis was beheaded in the Place de la Révolution, now the Place de la Concorde.}}</ref> 10월 16일 [[마리 앙투아네트]]도 뒤로 손이 묶여 퇴비수레에 태워져 시내를 돈 이후 처형되었다.
 
국왕에게 사형 투표한 의원들은 "국왕 살인"으로 이후 보복을 받게된다. 그들은 이후의 [[왕정복고]]에서 권좌에 복귀한 왕당파로부터 원수로 [[백색 테러]]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