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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규장각]]에 들었고 바로 직각 권점(直閣圈點)을 받았지만 직각이 되지는 못하였다. 이듬해 본관록과 도당록(都堂錄)에 올랐다. 이후 [[홍문관]]과 [[승정원]] 승지 등을 거쳐 [[이조]][[참의]], [[예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1880년]](고종 17) [[8월]] [[조선 고종|고종]]이 진전(眞殿)에서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할 때의 제관인 상례(相禮)로 참여, 찬례(贊禮) 이하 제관들에게 시상할 때 상을 받고 [[당상관]]으로 가자되었다. [[1881년]](고종 18)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의 정식 전문위원으로 선발, [[어윤중]] 등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어 4개월간 [[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적 문물과 행정 제도를 시찰, 연수하고 돌아왔다. 귀국 직후 바로 동래부 [[암행어사]](東萊府暗行御史)에 임명되어 [[경상남도]] [[동래부]]와 [[부산부]] 지역을 암행하고 [[한성]]으로 입경하였다. 그 뒤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개편되어 7사(司) 가운데 [[경리통리기무아문]]의 부[[경리통리기무아문]]사(副經理統理機務衙門事)에 임명되어, 개화 정책의 실무 업무를 맡게 되었다.
 
=== 생애 후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