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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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고종 10) [[7월]] 고종이 경무대(景武臺)에서 친히 주관한 칠석제(七夕製)에 3등으로 합격하여 바로 과거에 직부전시할 자격이 부여되었으며, 그 해의 [[과거 제도|문과 식년시]](式年試)에 병과(丙科) 30등으로 급제하였다. 바로 [[권지]][[승정원]]가주서가 되고, [[7월 19일]] 부사정, [[7월 21일]] [[승정원]]가[[주서]]가 되고 그해 [[12월]]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했으며, [[1874년]](고종 1) [[1월]] 좌직주서에 임명되었다. 이후 [[승정원]]좌직주서직과 [[춘추관]]기사관으로 사관의 일을 맡아보았으나 그해 [[3월]]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곧 복직하여 다시 좌직주서와 춘추관기사관으로 사관 일을 1875년까지 수행하였다.
 
[[1875년]] [[규장각]]에 들었고 바로 직각 권점(直閣圈點)을 받았지만 직각이 되지는 못하였다. 이듬해 본관록과 도당록(都堂錄)에 올랐다. 이후 동벽(東壁)에 올라 [[홍문관]]과 [[승정원]] 승지 등을 거쳐 [[이조]][[참의]], [[예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또한 겸직으로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겸하여 [[조선 순종|세자 척]]을 보도하였다.
 
[[1880년]](고종 17) [[8월]] [[조선 고종|고종]]이 진전(眞殿)에서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할 때의 제관인 상례(相禮)로 참여, 찬례(贊禮) 이하 제관들에게 시상할 때 상을 받고 [[당상관]]으로 가자되었다. [[1881년]](고종 18)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의 정식 전문위원으로 선발, [[어윤중]] 등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어 4개월간 [[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적 문물과 행정 제도를 시찰, 연수하고 돌아왔다. 귀국 직후 바로 동래부 [[암행어사]](東萊府暗行御史)에 임명되어 [[경상남도]] [[동래부]]와 [[부산부]] 지역을 암행하고 [[한성]]으로 입경하였다. [[1881년]] [[12월]] [[평안남도]] 성천부사(成川府使) 겸 성천진관(成川鎭管)으로 부임했다가 얼마 뒤 다시 되돌아왔다. 그 뒤 [[통리기무아문]]이 개편되어 7사(司) 가운데 [[경리통리기무아문]]의 부[[경리통리기무아문]]사(副經理統理機務衙門事)에 임명되어, 개화 정책의 실무 업무를 맡게 되었다.
 
=== 생애 후반 ===
[[1884년]] 관제 개편 시 [[예조]][[참판]]에서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로 전직되었으며<ref>예조는 외무아문으로 개편되었다.</ref>, 같은 해 영국, 독일, 프랑스, 벨기에, 러시아 등 5개국의 주5개국 [[특파전권대신]](特派全權大臣)로 임명, 파견되었다가 병으로 사퇴하고 귀국하였다. 그 후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었으나, 재직 중 신병이 생겨서 사퇴하였다.
 
[[1886년]](고종 23) [[4월]] [[이조]][[참의]]를 거쳐 그해 [[7월]]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임명되었다. [[1886년]] [[10월]]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행에 선발되어 동지 부사(冬至副使)로 임명되어 [[청나라]]를 방문하고 그해 [[11월]] 귀국하였다. [[1887년]] 전라우도 [[암행어사]](全羅右道暗行御史)로 파견되었다가 그해 [[5월]] 귀경하였다. 그해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뒤 병으로 사퇴하였다. 이후 호조참판(戶曹參判)[[1890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