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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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조선, 수산가공업이 본격화되면서 조선인들은 각지에서 몰려들어 일거리를 찾았다. 일본인 거주지역에 가깝게 자리를 잡기 위해 작은 움막 따위를 지어 좁디 좁은 골목을 만들어 지냈다고 한다. 그 자리는 옛 공동묘지로서 조선총독부가 허가하면서 겨우 거주가 허락된 곳이었다.<ref>고석규, 〈근대도시 목포의 역사 공간 문화〉</ref> 각종 시설이 들어서는 한편 [[목포극장]]이 생겨났다. 서울을 비롯해 대도시에서 내국인이 소유하고 있던 극장은 서울의 [[단성사]]와 [[광주광역시|광주]]의 광주극장, 목포극장 세 곳뿐이었다.<ref>이경재, 가람기획 《한양이야기》 264쪽</ref>
 
[[1932년]]에는 무안군 일부 지역 편입으로 면적이 늘어나는 한편 인구 6만의 조선 6대 도시로 성장했다. 당시 목포항에 모이던 물품은 '''一黑'''([[김 (해조류음식)|김]]) , '''三白'''([[면화]], [[쌀]], [[소금]])의 집산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ref name= '목포연혁'>목포역사문화관광 홈페이지 중 연혁 참조</ref> 일본인들은 전북에 쌀의 군산이 있다면 전남에는 면의 목포가 있다고 했는데, 1930년대 초 목면공장의 수가 20여 곳에 이르렀던 조선 제일의 목면 수출항이었다. 이 목면은 일본 간사이의 한신 지역으로 주로 팔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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