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맹영: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10번째 줄:
[[1558년]](명종 13) 장령이 되었다. [[1558년]] 이후 장령, 헌납, 집의 등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사간원사간이 되었다. 1560년 2월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세자시강원보덕으로 있을 때 특별히 가자(加資)되고, [[1561년]](명종 16년) [[2월 10일]] [[강원도]][[관찰사]]로 발령되었다. 그는 이량(李樑)과 정치적인 식견을 같이하며 항상 이량의 당여(黨與)로서 항상 측근에 있고 싶어하였다.
 
그 뒤 [[명종]]이 [[윤원형]]을 견제할 목적으로 [[이량]]을 발탁, [[이량]]이 [[평안도]][[관찰사]]에서 내직으로 들어오자, 그 또한 병을 핑계로 사퇴하였다가 내직으로 들어왔다. [[1562년]] 중추부[[첨지]]사, 동부승지, 대사간 등을 거쳐 그해 8월 [[홍문관]][[부제학]], [[형조]][[참의]], [[10월]] [[병조]][[참의]], [[11월]] [[병조]][[참지]](參知) 등을 역임하였다. [[1563년]](명종 18) 동부승지가[[동부승지]]가 되었다가 절충장군 행 충무위 상호군(折衝將軍行忠武衛上護軍)으로 전직되고, 다시 [[이조]][[참의]], [[호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563년]] [[8월]] [[이량]]이 [[심의겸]]과 [[기대항]]의 탄핵을 받고 몰락하자 양사에서 이량의[[이량]]의 당여를 탄핵할 때, 고맹영도 유배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그해 [[이량]], [[윤백원]] 등이 실각했지만 그는 어떤 이유인지 파직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거듭 탄핵을 받다가 [[1565년]] 파직당하고, 유배당하였다유배되었다. [[1565년]](명종 20) [[사헌부]]집의 [[홍인경]](洪仁慶) 등이 그에게는 큰 잘못이 없다며 극력 두둔하여 고맹영(高孟英)과 이언충(李彦忠) 등은 가벼운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 일로 홍인경 등은 조야의 원성을 받았다. 그해에 사망하였다.
 
사후 시신은 [[전남]] [[광산군]] 대촌면 압촌리(뒷날의 광주시 남구)에 매장되고, 부인의 묘소는 바로 뒤에 매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