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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 사회 활동 ====
===== 미스코리아 심사 위원 =====
그는 [[1931년]] 5월에 개최된 [[한국]] 최초의 [[미스코리아]] 대회의 심사위원이기도 했다. [[1931년]] 『삼천리』라는 잡지에서 주최한 ‘반도의 대표적 려인(麗人) 미쓰 코레아 삼천리 일색(一色)’을 뽑는 사진공모전에 심사위원의 한사람으로 참여, 최정원(崔貞嫄) 등을 선발하였다.<ref name="miskos">[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648267 사진 심사로 뽑힌 한국 최초의 ‘미스 코리아’ 최정원]{{깨진 링크|url=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648267 }} 중앙일보 2010.11.11</ref>
 
당시 [[삼천리]]사(社)는 “구라파에 전 구라파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미인이 있고 각국에도 그러한 모양으로, 우리 반도에도 전 조선을 대표할 려인 한 분을 찾아” 보자며 “고상전아(高尙典雅)하고 아름다운 미모에다가 균제된 체격, 만신(滿身)이 예지와 총명에 찬 듯한 근대적 려인”을 뽑겠다고 광고를 냈다(『삼천리』, 1931.5).<ref name="miskos"/> [[삼천리]] 지의 고정필진인 이광수 역시 심사위원의 한사람으로 위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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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군 극동군사령부는 당시 그를 [[조선]]의 유력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평하였다. [[미군정]]은 조선인 지도자들에 대한 보고서에 그에 대한 평을 남겼다.
 
{{인용문2|교육을 잘 받았다. 한국의 대표적 작가이자 언론인의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안창호와 긴밀한 관계다. 조선문인협회 회장이며, 소년회 활동에 적극적이다. 1930년대 붙잡혀 투옥된 바 있으며, 일제에 의해 고문을 당했다. 석방된 후 일제에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며, 이로 인해 이전까지 쌓아 왔던 영향력을 잃게 됐다.<ref>[{{웹 인용 |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08/2008080801467.html |제목=광복 1년 전 미군(美軍) 정보당국이 작성한 '조선 지도자 5인(人)' 평가표] |확인날짜=2012년 11월 05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20118190643/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08/2008080801467.html |보존날짜=2012년 01월 18일 |깨진링크=예 }}</ref>}}
 
[[1945년]] 1월 4일부터 17일까지 전쟁협력단체인 [[대화동맹]]大和同盟이 주도한 처우감사 총궐기 재성유지협의회 운동준비위원으로서 '처우감사총궐기전선대회'에 참여해 강연했다. [[2월 11일]] 대화동맹(大和同盟) 준비위원 겸 이사를 맡았다. 같은 해 2월경 일본 신태양사(구 일본모던사)가 주관하는 제6회 조선예술상 문학부문 심사위원을 맡았다. 한편 [[조선총독부]]가 불령선인들을 전부 체포해서 집결시킨 뒤 총살시킨다는 소문을 듣고 [[1945년]] 3월 잠시 은신해 있기도 했다. 그 해 4월 [[조선총독부]]에서 특별히 중추원 참의직을 제안하였지만 사양하였다. [[6월 8일]]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으로 활동했으며, [[6월 24일]] 정치깡패이자 제국의회 의원 [[박춘금]]이 당수인 [[대의당]]의 위원에 선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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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권위주의적 인간관 ===
소파 [[방정환]]을 만나 어린이도 인간이라는 말을 듣고 감화된 그는 평생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반말을 쓰지 않고 존댓말을 썼다. 또한 자신보다 10세, 20세 이상 연하인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내며 형님, 아우님 하기도 했다. 그가 한때 사귀었던 [[나혜석]]의 조카인 [[나영균]]은 해방 직후에 그를 만났는데 그가 반말을 쓰지 않고 정중하게 인사한 것을 회고하기도 했다.<ref name="DDNA001">[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12&Total_ID=1730594 (김서령이 만난 명문가 사람들 l 영문학자 나영균) 고모 나혜석의 추억… 그 쓸쓸한 DNA 스민 듯]{{깨진 링크|url=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12&Total_ID=1730594 }}</ref>
 
"춘원은 내가 인사하면 어린 나에게도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절을 했어요. 말소리와 표정이 언제나 부드러웠고 눈동자 빛깔이 엷어 꼭 서양사람 같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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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대의 평가 ===
[[일제 강점기]] 후반의 미군은 그의 교육을 잘 받았다는 점과 소년 활동에 적극적이다<ref name="pyongg">[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08/2008080801467.html 광복 1년 전 미군(美軍) 정보당국이 작성한 '조선 지도자 5인(人)' 평가표] {{웨이백|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08/2008080801467.html |date=20120118190643 }} 조선일보 2008.08.08</ref> 는 점을 주목했다. 미군은 그에게 '교육을 잘 받았다. 한국의 대표적 작가이자 언론인의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안창호와 긴밀한 관계다. 조선문인협회 회장이며, 소년회 활동에 적극적이다. 1930년대 붙잡혀 투옥된 바 있으며, 일제에 의해 고문을 당했다. 석방된 후 일제에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며, 이로 인해 이전까지 쌓아 왔던 영향력을 잃게 됐다.<ref name="pyongg"/>'고 평가하였다.
 
=== 긍정적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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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29050779&q= NHK 다큐멘터리 (1)]
*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29050780&q= NHK 다큐멘터리 (2)]
* [https://web.archive.org/web/20120118190643/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08/2008080801467.html 광복 1년 전 미군(美軍) 정보당국이 작성한 '조선 지도자 5인(人)' 평가표]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08/2008080800856.html 美, 1944년 조선 유력인사 성향평가표 작성]
* 방민호, 〈이광수 장편소설 『원효대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서정시학 2010 겨울호》(서정시학 편집부,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