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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1502년]](연산군 8) [[전라남도]] [[광산군]] 압촌마을(현, [[광주광역시]] [[동구]] [[압촌동]])에서 태어났다태어났으나 생일은 미상이다. 증조부는 행충좌위부사직을 지내고 사후 증 통훈대부 통례원좌통례(贈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에 추증된 고상지(高尙志)이고 할아버지는 증 통정대부 공조참의(贈通政大夫工曹參議諱)에 추증된 고자검(高自儉)이며 아버지는 승의랑, 형조좌랑 겸 춘추관기주관을 지내고 사후 증 가선대부 예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贈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에 추증된 고운이다. 아버지 고운은 [[조광조]]와 친했다는 이유로 [[1519년]] 관직을 잃고 내려와 고향에서 여생을 보냈다. 어머니는 광산이씨(光山李氏)로 이호선(李好善)의 딸이다. 아버지 고운은 그림도 잘 그렸는데 동문선에도 수록되었고, 남화풍의 맹호도를 잘 그렸으며, 백액대호도 등이 현전한다.
 
그의 선대는 [[전라남도]] [[영광군]]에 살았지만 아버지 고자검의 대에 영광에서 [[광산군]] 압촌마을로 이주해 왔다.
[[1558년]](명종 13) 장령이 되었다. [[1558년]] 이후 장령, 헌납, 집의 등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사간원사간이 되었다. 1560년 2월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세자시강원보덕으로 있을 때 특별히 가자(加資)되고, [[1561년]](명종 16년) [[2월 10일]] [[강원도]][[관찰사]]로 발령되었다. 그는 이량(李樑)과 정치적인 식견을 같이하며 항상 이량의 당여(黨與)로서 항상 측근에 있고 싶어하였다.
 
그 뒤 [[명종]]이 [[윤원형]]을 견제할 목적으로 [[이량]]을 발탁, [[이량]]이 [[평안도]][[관찰사]]에서 내직으로 들어오자, 그 또한 병을 핑계로 사퇴하였다가 내직으로 들어왔다. [[1562년]] 중추부[[첨지]]사, 동부승지, 대사간 등을 거쳐 그해 8월 [[홍문관]][[부제학]], [[형조]][[참의]], [[10월]] [[병조]][[참의]], [[11월]] [[병조]][[참지]](參知) 등을 역임하였다. [[1563년]](명종 18)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절충장군 행 충무위 상호군(折衝將軍行忠武衛上護軍)으로 전직되고, 다시 [[이조]][[참의]], [[호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563년]] [[8월]] [[이량]]이 [[심의겸]]과 [[기대항]]의 탄핵을 받고 몰락하자 양사에서 [[이량]]의 당여를 탄핵할 때, 고맹영도 유배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그해 [[이량]], [[윤백원]] 등이 실각했지만 그는 어떤 이유인지 파직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거듭 탄핵을 받다가 [[1565년]] 파직당하고, 유배되었다. [[1565년]](명종 20) [[사헌부]]집의 [[홍인경]](洪仁慶) 등이 그에게는 큰 잘못이 없다며 극력 두둔하여 고맹영(高孟英)과 이언충(李彦忠) 등은 가벼운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 일로 홍인경 등은 조야의 원성을 받았다. 그해에 사망하였다배소에서 사망하였으나 사망일자는 미상이다. 사후 시신은 [[전남]] [[광산군]] 대촌면 압촌리(뒷날의 광주시 남구)에 매장되고, 부인의 묘소는 바로 뒤에 매장되었다.
 
사후 시신은 [[전남]] [[광산군]] 대촌면 압촌리(뒷날의 광주시 남구)에 매장되고, 부인의 묘소는 바로 뒤에 매장되었다.
 
=== 사후 ===
이후 [[임진왜란]] 때 아들 [[고경명]], 손자 [[고인후]]가 전사하고, [[고종후]]는 [[진주성]]에서 전사했다. 그러나 그 뒤로도 그는 죄안에 올라 사면복권되지 못했다. [[1612년]](광해군 4) 손자 고용후(高用厚)가 상소를 올려 그의 아들 고경명의 연고로 고맹영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기를 청하자, 이조와 광해군의 논의 끝에 이로 말미암아 추후에 관작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뒤에는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 세자부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