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종 (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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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 = [[고려의 역대 국왕|고려의 제2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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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종'''(惠宗, [[912년]]<ref>고려(高麗)의 왕 중 혜종(惠宗), 정종(定宗), [[광종]](光宗), 충정왕(忠定王)은 고려사(高麗史)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생일이 나와 있지 않아 알 수 없다.</ref>~[[945년]] [[10월 23일]] ([[음력 9월 15일]])<ref>《고려사》(高麗史)〈세가〉권2</ref>)은 [[고려]](高麗) 제2대 군주(재위:[[943년]]~[[945년]])이다. [[자 (이름)|자]](字)는 승건(承乾), [[휘]](暉)는 무(武), [[묘호]](廟號)는 '''혜종'''(惠宗), [[시호]](諡號)는 '''인덕명효선현고평경헌의공대왕'''(仁德明孝宣顯高平景憲義恭大王)이고 능호(陵號)는 '''순릉'''(順陵)이다. [[왕건]](王建)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나주 호족 오다련(吳多憐)의 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이며, 비(妃)는 대광(大匡) 임희(林曦)의 딸인 [[의화왕후]](義和王后)이다.
 
견휜과의 전투로 병력의 손실이 컷던 나주 외가는, 그후 가세가 미약해지면서 지위의 위협을 받게 되자, 부왕 [[태조 왕건]](太祖 王建)은 [[고려]](高麗) 건국 직후 그를 바로 정윤(正尹)으로 삼은 뒤에 [[921년]] 정식으로 태자에 책봉하였다. 재위 3년만에 사망하였으나 사망원인은 불명확하다. [[태조 왕건]](太祖 王建)의 적통을 이어받아 왕위에 오른 혜종(惠宗)의 위상은 남다른 바가 있으니 [[고려사]](高麗史) 태묘악장(太廟樂章)에서 혜종(惠宗)은 어느 왕들보다 칭송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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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무|혜종]](惠宗)은 [[912년]] [[나주]](羅州) 흥룡동(興龍洞)에서 [[고려 태조|태조]](太祖)과 [[장화왕후]](莊和王后)의 아들로 태어났다.<ref name="noju">[http://www.najuculture.or.kr/docu/html/menu300/sub03_1.asp 태조 왕건의 뒤를 이은 혜종(912~945)]</ref> [[왕건]](王建)은 아들의 이름을 [[왕무|무]](武)라 정하였다. [[왕건]](王建)과 오씨가 만났다는 [[나주]](羅州) 완사천(浣紗泉) 연못은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고, [[왕무|혜종]](惠宗)이 태어난 마을은 후대에 가서 임금이 태어난 마을로 전하다가 왕을 상징하는 '용'(龍) 자를 써서 지명이 흥룡동(興龍洞)이 되었다.
 
[[왕건|태조]]는 [[궁예]] 휘하에서 [[나주]]를 정벌하고 그곳에 주둔할 때, 해주 호족 [[오부돈]]의 손녀이며 [[오다련]]의 딸인 오씨를 만나 혼인하였다. 첫 부인 [[신혜왕후]]에게 아들이 없었기에 그는 [[왕건]]의 장자였다. 그러나 서남해안의 호족인 [[나주]]의 오씨 집안 세력이 다른 호족들에 비교하여 병력이 약하여 이러한 출신 배경으로 지위가 불안하였으며, [[왕건]]은 바로 원자로 책봉했다가 [[921년]] 그를 [[왕무|태자 무]]로 삼아 국본으로 정한다. 그러나 외가의 가세가 약하여 권력 기반이 약했던 [[왕무|혜종]]은 후에 왕위쟁탈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처음부터 외가의 가세가 약했던건 아니고, 견훤의 나주 탈환 작전으로 인해 가문의 기반을 잃어 버리게 된 후 가세가 약해진다. 전라도 나주 지역은 훗날 거란과의 전쟁에서 현종이 몽진시 목숨을 의탁할 정도로 고려 왕실에서 믿는 구석이기도 했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왕건|태조 왕건]]에 오른 후 [[왕무|태자 무]]가 7세때 [[태조 왕건]]은 그가 보위에 오를 덕이 있음을 알았으나 신하들의 반대가 있을 것을 걱정하여 상자에 자황포를 담아 [[장화왕후]]에게 보냈다. 왕후가 이를 대광 [[박술희]](大匡 朴述熙)에게 보여<ref name="noju"/>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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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4년]] 광평시랑 [[한현규 (고려)|한현규]]와 예빈경 [[김염 (고려)|김염]]을 진(晋)나라에 보내어 왕위를 계승한 것을 알리고 [[거란]]족을 쳐부순 것을 하례하였다.
 
이복 동생 [[고려 정종 (3대)|왕요]]와 [[왕소]]가 왕위에 도전하고 있음을 눈치챈 [[왕규 (함규)|왕규]](王規)는 945년([[왕무|혜종]] 2) 이 사실을 알렸으나 [[왕무|혜종]]은 둘을 벌하지 않았다. [[왕무|혜종]]이 이 둘에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불만을 품은 [[왕규]]는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임금으로 세우려고 했다.
[[945년]] 후진에서 광록경 범광정과 태자선마 장계응을 파견, 그에게 지절 현도주도독 상주국충 태의군사 고려국왕(持節玄度主都督上柱國充太義軍使高麗國王)으로 책봉하는 교서를 내렸다. 그러나 그해 혜종을 지지하던 [[고려 태조|태조]]의 최측근 [[박술희]]가 [[왕규 (함규)|왕규]] 일파와 [[고려 정종 (3대)|왕제 요]] 일파에 의해 역모의 누명을 쓰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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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역대 국왕}}
 
[[분류:고려 혜종| ]]
[[분류:912년 태어남]]
[[분류:945년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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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나주시 출신]]
[[분류:고려 태조]]
[[분류:고려 혜종| ]]
[[분류:10세기 한국 사람]]
[[분류:10세기 한국의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