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루스 대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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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설명 =
 
|작위 = [[파일:Imperatores Romani.svg|center가운데|30px|link=카롤루스 왕조 서로마 황제]][[카롤루스 왕조 서로마 황제|서로마 황제]]
|재위 = 800년 12월 25일-814년 1월 28일
|대관식 = 800년 1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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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재위자 =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 (813년–814년)
 
|작위2 = [[파일:Corona_ferrea_monza_(heraldry).svg|center가운데|30px|link=이탈리아왕]][[이탈리아왕]]
|재위2 = 774년 7월 10일-814년 1월 28일
|대관식2 = 774년 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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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초기 ===
==== 초기 생애 ====
[[파일:Karl Martell.JPG|thumb섬네일|left왼쪽|130px|[[랭스 대성당]]에 묻힌 할아버지 [[카를 마르텔]]의 묘]]
카롤루스는 740년 또는 742년 4월 2일 [[벨기에]] [[리에주]] 근처인 [[프랑크 왕국]] [[왈롱|왈롱나 주]] [[에르스탈]]에서 [[피핀 3세]]와 레온 출신 베르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왈롱|왈롱나 주]] [[에르스탈]]은 아버지 [[피핀 3세]]의 별장이 있는 곳이었다. 카롤루스는 [[피핀 3세]]와 [[랑의 베르트라다]]와 정식으로 결혼하기 전에 태어난 아들이었다는 전승도 있다. 이때문에 [[카를로만 2세]]나 카롤루스의 반대파들은 샤를마뉴를 정식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태어났다 하여, 카롤루스를 사생아로 규정하며 인신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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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치의 시작 ====
[[파일:Charlemagne and Pope Adrian I.jpg|thumb섬네일|left왼쪽|130px|[[772년]] 교황 아드리안을 방문]]
[[파일:Vitrail Cathédrale de Moulins 160609 34.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140px|모눌리스 대성당의 샤를마뉴 벽화]]
즉위 초, 피핀의 죽음을 기화로 [[아키텐]]에서 분리독립을 시도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카를은 즉위 첫해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그해 갈리아와 히스파니아에서 발생한 각종 [[게르만]] 족의 반란 역시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또한 [[바스크 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바스코니아와 툴루즈에 변경백을 파견하여 성곽을 수축하고 변경을 방비하게 했다. [[가스코뉴]]라는 지명은 이때 그가 설치한 바스코니아 변경백령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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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크 왕 즉위와 전쟁 ===
==== 즉위 초반과 재통일 ====
[[파일:Codexaureus 04.jpg|thumb섬네일|left왼쪽|130px|그의 치세기간을 기록한 [[로쉬 수도원]]의 문서]]
[[파일:Rolandfealty.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150px|조카 [[롤랑]] 외 12기사에게 충성 맹약을 받는 장면 (15세기 작품)]]
[[768년]] 피핀이 죽자 프랑크 왕국의 오랜 관습에 따라 왕국은 그의 두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피핀 3세]]의 죽음을 계기로 [[아키텐]]이 독립을 시도하였으나 카롤루스는 재빨리 군사를 파견하여 아키텐을 정벌하고 공작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형제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카를로만 2세는 사망했고 결국 카롤루스가 승리했으며 자기를 배신하고 카를로만의 편을 든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드 왕국]]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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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베리아 반도 원정과 참패 ====
[[파일:Harun-Charlemagne.jpg|thumb섬네일|left왼쪽|130px|샤를마뉴가 보낸 사절을 맞이하는 [[하룬 알 라시드]]]]
{{참고|롤랑의 노래|론세스바예스 전투}}
[[777년]] 여름 사라고사 시의 무슬림 총독 [[이븐 알아라비]]는 프랑크 왕국의 연례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븐 알-아라비는 회의에서 자신은 사라센 군주 [[아브드 알라흐만 1세]]에 대항해 반란을 벌이던 중이었고, 그가 자신을 보호해 준다면 그 대가로 도시를 바치겠다고 제안했다. 그해 여름, 카롤루스는 이슬람계 [[우마이야 왕조]]가 통치하던 [[히스파니아]](스페인)으로 진격하여 [[사라고사]]를 포위했지만 그 도시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븐 알아라비]]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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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남부 원정 직후 ====
[[파일:Charlemagne et Louis le Pieux.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130px|다섯째 아들 [[경건왕 루이]]를 데리고 축성받으러 가는 샤를마뉴]]
 
카롤루스가 [[히스파니아]]에서 고전하는 동안 자치권을 되찾으려는 제국 동부의, [[작센족]]이 다시 반기를 들었다. 카롤루스는 이를 비열한 배신으로 규정하고 전면전을 선포한다. 카롤루스는 [[기독교]]로 세례를 받고 신의 이름으로 충성을 서약한 이 [[작센족]]의 저항은 정치적 배신이자 종교적 변절, 범죄로 보고 이런 범죄에는 가혹한 응징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선언했다. 카롤루스는 18회에 걸쳐 [[작센]]으로 출정, 작센족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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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부 이민족과의 전쟁 ====
[[파일:Karl der große.jpg|썸네일섬네일|왼쪽|130px|황금제 카를 대제 흉상]]
 
[[788년]] [[아바르 족]]이 제국을 침략,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북부, [[프리울리]], [[바이에른]] 등 내륙까지 침입해 들어왔다. 카롤루스는 군사를 일으켜 [[790년]]까지 이들과 싸웠다. [[790년]] [[다뉴브 강]]가에서 [[아바르 족]]을 크게 물리쳐서 국경 밖으로 몰아냈지만 아바르 족이 다녀간 곳은 크게 황폐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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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부 정책 ====
[[파일:Carlo Magno.png|thumb섬네일|130px|카롤루스의 초상화, 1858]]
아들 [[피피노 카를로만]]이 다스리던 [[롬바르드]]에 [[사라센]]이 다시 쳐들어왔다. [[798년]]부터 [[799년]] [[사라센]] 해적들은 [[코르시카]]와 [[사르디니아]](Sardinia)를 침략했고, 799년에는 발레 아레스 제도에도 종종 쳐들어왔다. 제노바와 토스카니의 귀족들은 이들을 막지 못한다 하여 카롤루스의 권위에 도전했다. 그는 [[바그다드]]로 사자를 보내 침략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고, [[797년]] 바그다드의 칼리프는 하론 알 라시드와 협정을 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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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마의 황제 ===
==== 황제 즉위 ====
[[파일:Friedrich Kaulbach - Krönung Karls des Großen.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180px|[[로마]]에서 제관 수여 장면([[800년]] [[12월 25일]])]]
[[파일:Charlemagne denier Mayence 812 814.jpg|thumb섬네일|812년-814년 사이에 발행된 [[데나리우스]] 은화. {{lang|la|''KAROLVS [[임페라토르|IMP]] [[아우구스투스|AVG]]''}}라고 새겨져 있다.]]
799년 5월, 교황 [[교황 레오 3세|레오 3세]]는 반대파들의 습격을 받자 카롤루스의 궁정으로 피신해 지원을 요청했다. 카롤루스는 [[교황 레오 3세]]에게 지원을 약속하고 호위병력을 붙여서 [[이탈리아]]로 되돌려보냈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로마 제국의 종주권은 [[동로마 제국]]에게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의 간섭을 받고 있었고 [[로마 교황]]은 [[비잔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는데, 그 적임자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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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롤링거 르네상스 ====
[[파일:Charlemagne denier Tours 793 to 812.jpg|thumb섬네일|left왼쪽|140px|[[793년]]부터 [[812년]] 사이에 쓰인 프랑크 왕국의 동전]]
 
794년 카롤루스는 독일 북서부의 [[아헨]]에 궁정과 왕실 교회를 짓고, 이곳을 사실상의 수도로 정했다. 그는 고대 [[로마 제국]]의 위엄과 영광을 되살리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의 [[로마 제국]]의 번영을 부활시킬 것을 선언하고 고대의 학예부흥을 선언하였다.
 
[[파일:Raban-Maur Alcuin Otgar.jpg|thumb섬네일|150px|[[라바누스․마우루스]] (왼쪽)과 [[앨퀸]] (가운데), 마인츠의 오트가르 주교 (오른쪽)]]
 
카롤루스는 자신의 궁정을 정치와 행정 중심지뿐 아니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드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아인하르트]]와 영국의 [[앨퀸]], [[롬바르디아]]의 [[라바누스 마우루스]] 등과 같은 학자들이 아헨으로 초빙되었다. 카롤루스는 이에 힘입어 교회 신부들의 저술과 고대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는 왕실 도서관을 설립했으며, 젊은 기사들을 가르치기 위해 궁정 학교를 새로이 창설하였다. 또한 올바른 종교 관념과 도덕성을 중시했으며, 올바른 관념에 대한 왜곡을 경계하여 모든 수도원 학교와 성당 학교에 라틴어와 라틴 문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또한 알퀴누스를 비롯한 저명한 학자들을 초빙하여 교육을 전담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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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덴마크의 해적 ====
[[파일:Karldergrossesignatur.svg|thumb섬네일|200px|샤를마뉴의 서명]]
 
카롤루스가 살아 있을 때 이미 해안은 [[노르만족]]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제국의 동남부는 [[헝가리인]], [[마자르족]], [[슬라브족]] 등의 침략이 계속되었다. 또한 내부에서는 독립하려는 다른 [[게르만]] 부족들의 반란도 수시로 터졌다. [[792년]] 노달빙기아를 정복 한후, 프랑크 왕국의 국경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접경하게 됐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던 [[덴마크 족]]과 [[핀란드 족]]은 카롤루스가 각지를 정복한 뒤 이상한 종교로 세뇌한다는 소문을 듣고 분노와 공포감을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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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년 ===
[[파일:Charlemagne Allemagne.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130px|[[프랑크푸르트]]에 세워진 카롤루스의 동상]]
 
[[803년]]에는 [[판노니아]] 밖에 있던 [[크로아티아]] 부족장 [[비체슬라프]](Visheslav)를 비롯한 [[크로아티아]]의 부족장들이 자발적으로 귀순해왔다.샤를마뉴는 그 중 [[비체슬라프]]를 [[크로아티아]] [[공작 (작위)|공작]]으로 임명해 이들을 다스리게 하고 사실상의 자치권을 인정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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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용한 언어 ===
[[파일:Charles Ier le Grand ou Charlemagne.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130px|카롤루스(15세기 [[프랑스]] 작품)]]
 
카롤루스가 사용한 모어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다. [[리프리안 프랑크]]의 독일 사투리를 썼다는 설도 있으나, 언어학자들은 그의 신원과 연대를 보면 다르다고 한다. 일부 언어학자들은 그가 고대 프랑크 왕국이 멸망한 때인 742년(또는 747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고대 프랑크어를 쓰지 않았다고 주장할 정도다. 그외 카롤루스는 모어뿐만 아니라 [[라틴어]]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으며 [[그리스어]]도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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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상 ===
[[파일:Karl der große.jpg|thumb섬네일|left왼쪽|150px|카롤루스의 흉상]]
[[파일:Karl der Große in der Chronik des Ekkehard von Aura.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180px|[[1112년]]/[[1114년]]에 [[독일]]에서 그려진 샤를마뉴의 초상화]]
아인하르트의 글에 따르면 카롤루스는 화려하고 귀족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프랑크족의 전통의상을 입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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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계 ==
[[파일:Carolus Magnus c1557.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180px|샤를마뉴]]
[[파일:Karl der Grosse - Pippin von Italien.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180px|샤를마뉴와 그의 장남 [[곱사등이 피핀]](오른쪽), 사관 (가운데 아래)]]
후궁이었다가 왕비로 승격한 힐데가르트, 파스트라다 외에도 그에게는 여러 명의 후궁이 있었으며, 그 중 7명의 후궁의 존재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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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8세기 프랑스 사람]]
[[분류:9세기 프랑스 사람]]
[[분류:9세기 유럽의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