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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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기 때문에 ‘처녀 여왕(The Virgin Queen)’이라 불렸고, 그녀를 마지막으로 [[튜더 왕가]]는 단절되었다. 그녀는 늘 “짐(朕)은 국가와 결혼하였다” 는 말을 공공연하게 입버릇처럼 말해 국민들을 기쁘게 하였다. 이러한 여왕의 독신주의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계모가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한 데서 받은 충격, 그리고 그녀에게 최초로 청혼한 시모어 제독이 정부의 허가없이 공주에게 청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것이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모는 타고난 여장부로 미남 같은 분위기의 얼굴을 지닌 미인에 키 170cm를 웃도는 장신이었다.
 
== 즉위 이전의 삶 ==
[[파일:Henry VIII and Anne Boleyn.png|thumb섬네일|left왼쪽|엘리자베스는 헨리8세와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자녀이다. 어머니 앤 불린은 왕자를 낳지 못했고, 엘리자베스가 태어난 지 3년도 안되어 사형을 당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33년]] [[9월 7일]] [[그리니치]]에서 [[잉글랜드의 헨리 8세|헨리 8세]]와 그의 제1계비 [[앤 불린]]의 딸로 태어났다. 헨리 8세가 어머니 앤 불린을 간통죄로 고발하자 그녀는 생존 자체가 위험했다. 앤 불린은 3주 만에 타워 그린에서 참수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로 남아 공주의 칭호가 박탈되었고 왕위 계승에서도 제외되었다.<ref name="리더십">{{서적 인용 |저자 = 제임스 맥그리거 번스 |제목 =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 |꺾쇠표 =예 |id={{ISBN|978-89-20-92226-8}}}}</ref> {{Rp|55}} 어머니가 간통과 반역죄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참수형을 당한 뒤 엘리자베스는 궁중에서 늘 불안하고 위험하기기만 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복 언니 [[잉글랜드의 메리 1세|메리 공주]]가 항상 그녀를 감시하고 견제하였으며, 부왕인 헨리 8세마저 그녀를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홀대했기 때문이다.
[[파일:El bieta I lat 13.jpg|thumb섬네일|left왼쪽|200px|엘리자베스 튜더, 1546년 경, 익명의 예술가가 그림. 이 초상화의 꾸밈없는 모습은 이후에 등장하는 화려한 초상과 대비되는 것이다.<ref>"화가는 ... 이름이 알려지지 않지만, 완전한 플랑드르 스타일을 활용하여 앤 불린의 딸을 조용하고 학생처럼 보이는 외모로 묘사했다. 그녀의 옷차림에 달린 장식은 어린 나이를 강조하는 선의 명백함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다. 이것은 이후 초상화에서 나타나는 굉장한 환상과는 매우 큰 대조를 보인다. 이후 초상화에는 창백하고 가면을 쓴 듯한 얼굴에다가 사치스런 장식이 더해져서 모든 인간적인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윌리엄 가운트(Gaunt)의 책, 37.</ref>]]
 
=== 토마스 시모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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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1세가 실시한 정치 방식의 핵심은 [[민중]]의 소리를 듣는 애민정치였다. 그녀는 1년에 두 번은 순시를 하면서 민중들의 여론을 들었는데, 이는 다른 [[유럽]]의 왕들에 비해 비교적 많은 횟수이다.
 
[[파일:Elizabeth1England.jpg|thumb섬네일|left왼쪽|200px|여왕 엘리자베스 1세]]
=== 반(反)에스파냐 정책 ===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의 국력이 [[프랑스]]나 [[에스파냐]]에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을 알고, 표면적으로는 세력 균형 정책을 펴면서도 뒤로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등 해적들을 지원하여 에스파냐를 견제하였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네덜란드]]의 독립 전쟁에서는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를 지원했다. 그 결과 가톨릭을 국교로 한 에스파냐와의 관계가 금이 가게 되었고, 그 이래로 두 나라는 숙명의 라이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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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년 ==
이처럼 화려했던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의 말년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무리 엘리자베스 1세가 ‘훌륭한 여왕 베스(''Good Queen Bess'')’라고 불릴 정도로 절대적인 인기를 받았지만, 그녀 역시 절대군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녀는 권력이 [[돈]]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손쉽고 빠른 수입을 올리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한 예로 신흥 사업에 대해서 멋대로 독점권을 설치하여, 아첨하는 신하나 귀족 또는 상인에게 팔았다. 이런 그녀의 행동에 그동안 순수하게 복종하면서 협력하던 [[의회]]도 반대의 조짐을 보이더니 치세 말기에는 의회가 반(反)독점 논쟁의 도가니로 변했다. 또 엘리자베스 1세가 원했던 [[의회조종법]]도 [[언론]] 탄압이라는 이유로 의회가 반대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잉글랜드는 [[1596년]]~[[1597년]]의 흉년과 [[무역]] 쇠퇴로 인해 지속적인 물가 폭등 및 [[실업자]] 대량 발생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국민들의 의욕도 땅에 떨어졌다.
[[파일:Robert Dudley Elizabeth Dancing.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250px|더들리와 춤추는 엘리자베스 1세]]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여왕의 총신들은 대중의 증오심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아일랜드]]를 정복하기 위한 일련의 군사적 시도는 엘리자베스 1세의 마지막 총신인 에식스의 백작(''Earl of Essex'') 로버트 데버루(''Robert Devereux'')의 반란에서 절정에 이른다. 데버루는 아일랜드 총독의 자격으로 [[아일랜드]]의 반란 진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반란 진압에 실패하고 불리한 조약을 체결해야 되는 상황에 이르자, 갑자기 총독의 위치에서 이탈하여 여왕에게 직접 해명하겠다며 [[영국]]으로 돌아왔다. 엘리자베스 1세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하였고 반란 진압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의 관직을 박탈했다. 데버루는 이에 앙심을 품고 30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1601년]]에 [[런던]]에서 대중 봉기를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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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잉글랜드의 군주}}
{{잉글랜드계 아일랜드 군주}}
{{전거 통제}}
{{기본정렬:엘리자베스 1세}}
[[분류:엘리자베스 1세| ]]
 
[[분류:1533년 태어남]]
[[분류:1603년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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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암살 미수 생존자]]
[[분류:로마 가톨릭교회에서 파문된 사람]]
[[분류:엘리자베스 1세]]
[[분류:런던탑 수감자]]
[[분류:천연두 생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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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개신교도 군주]]
[[분류:위그노 전쟁 관련자]]
[[분류:16세기 유럽의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