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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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파일:Heraldic Crown of the First French Empire.svg|center가운데|30px|link=프랑스인의 황제]][[프랑스인의 황제]]
|재위 = 1804년 5월 18일-1814년 4월 6일
|대관식 = 1804년 1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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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
 
|작위2 = [[파일:Crown of the Napoleonic Kingdom of Italy.svg|center가운데|30px|link=이탈리아왕]][[이탈리아왕]]
|재위2 = 1805년 3월 17일-1814년 4월 11일
|대관식2 = 1805년 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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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Napoleon - 2.jpg|섬네일|23살의 나폴레옹]]
=== 어린 시절 ===
[[파일:Carlo_Buonaparte.jpg|left왼쪽|thumb섬네일|upright위오른쪽|나폴레옹의 아버지 [[카를로 부오나파르테]](Carlo Buonaparte)는 귀족 회의에서 코르시카를 대표한 의원이었다.]]
 
나폴레옹은 [[1769년]] [[8월 15일]], [[지중해]] 서쪽의 작은 섬인 [[코르시카 섬]]의 [[아작시오]]에서 [[토스카나]] 출신의 [[이탈리아]] 소지주(보나파르트) 집안에서 8명의 자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이며 귀족회의 의원인 카를로 마리아 디 부오나파르테(프랑스식 이름은 샤를 마리 보나파르트Charles Marie Bonaparte)였으며, 어머니는 마리아 레티치아 라몰리노였다. 출생시 이름은 나브리오네 디 부오나파르테(Nabulione di Buonaparte)였다. 이름을 나브리오네로 지은 것은 요절한 장남인 나브리오네에서 따온 것이다. 부오나파르테 가는 프랑스의 코르시카 점령에 항의하며 [[파스콸레 파올리]]가 이끄는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나 [[파올리]]가 망명하자 프랑스 측으로 전향하여, 가문의 명칭을 프랑스식인 보나파르트로 개명하고 귀족 자격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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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인 시절 ===
[[파일:1801 Antoine-Jean Gros - Bonaparte on the Bridge at Arcole.jpg|thumb섬네일|아르콜의 다리에 선 나폴레옹.]]
[[1785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였다. 같은 해 [[11월 30일]] 16세의 어린 나이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발랑스에 주둔한 라 페르 연대 포병 소위로 임관하였다.<ref name="rxvi">Roberts 2001, p.xvi</ref> [[1789년]] [[바스티유 감옥]] 함락 소식을 듣고 나폴레옹 자신도 [[프랑스 혁명]]에 참가하여 공화주의자인 [[자코뱅 파]]를 지지하는 소책자를 썼다가 체포되고 만다. [[1792년]]에 코르시카로 귀향하여, 아작시오의 국민위병대 중령이 되지만, 영국을 지지하는 파울리와 불화가 일어나 일가족과 함께 마르세유로 도피행에 가까운 이주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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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프랑스는 혁명 이후 혁명파와 반혁명파간의 이념 대립 등의 혼란 상태가 지속되어 외세의 침입을 자주 받았다. 이에 [[1796년]]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은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방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치는 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과 싸우기 위해 눈보라가 몰아치는 [[알프스 산맥]]을 넘으려 하였다. 몇 달에 걸쳐 산맥을 돌아서 넘은 그는 곧바로 이탈리아를 제압한 후, [[1797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점령하였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굴복하고 캄포포르지오 조약을 체결하여 벨기에와 이탈리아의 북부 지방인 [[롬바르디아]]를 프랑스에게 넘겨주었다. 이러한 군사적인 업적으로 나폴레옹의 인기는 프랑스 내에서 높아져 갔지만,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제 [[성냥]]을 쓰지 않을 정도로 프랑스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파일:Jean-Léon Gérôme 003.jpg|thumb섬네일|left왼쪽|300px|스핑크스 앞에 선 나폴레옹]]
 
그러나 혁명 정부([[총재 정부]], 5명의 총재가 통치하고 있던 기간)는 나폴레옹의 인기가 너무 높아지자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를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떨어뜨려 놓기 위해 [[이집트]]로 파병 명령을 내렸다. 명목은 영국과 인도를 잇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영국의 인도 지배를 방해하고 그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었다. [[1798년]] 5월 나폴레옹은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에 상륙한 후, 지역의 호족들을 쳐부수고 [[카이로]]에 입성하여 피라미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때 나폴레옹이 대동한 180명 가량의 학자들은 이집트의 고대 유적을 비롯하여 이집트에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 고대 이집트의 역사나 풍속 등을 조사하였다. 이때 발견된 [[로제타석]]이 결국 고대 이집트 문명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이 로제타석은 세 면으로 나뉘었고, 윗면은 고대 그리스어, 둘째 면은 이집트의 평민어였던 데모닉 그리고 마지막은 이집트의 고대어 하이에로글리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돌은 나폴레옹의 시리아 원정의 실패 후 이집트에 주둔한 영국군에 의해 [[대영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나폴레옹은 이 비문을 해석하길 적극 권장했으나 살아서 이 돌의 해석을 보지 못하고, 후에 프랑스의 천재 언어학자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샹폴리옹]]에 의해 완벽히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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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뤼메르 쿠데타 ===
{{본문|브뤼메르 18일}}
[[파일:Bonaparte in the 18 brumaire.jpg|right오른쪽|200px|thumb섬네일|브뤼마르 쿠데타를 지휘하는 나폴레옹.]]
한편 나폴레옹이 [[이집트 시리아 원정|이집트 원정]]에 나간 동안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사면초가에 빠져 있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다시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왕정복고]]를 명분으로 프랑스를 위협하였다. 이때 주변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던 나폴레옹은 다음 원정인 [[인도]] 원정을 취소했다.7월 프랑스 해군이 아부키르 만에서 [[호라시오 넬슨]]의 영국 함대에 패하고 프랑스 지중해 함대 주력이 전멸한다.이 승리로 영국 해군이 해당지역의 재해권을 장악하게 되고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큰 차질을 빚게 된다. 이때 프랑스 해군 전열함들이 전멸 당하고 두척만 생존한다. 이로 말미암 나폴레옹과 이집트 원정군은 아프리카에 고립되고 만다. 나폴레옹은 본국과 연락이 끊기자, 혁명 정부의 명령도 받지 않고 혼자 몰래 이집트에서 탈출하고서 10월에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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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령 시절 ===
[[파일:David_-_Napoleon_crossing_the_Alps_-_Malmaison1.jpg|left왼쪽|200px|thumb섬네일|알프스를 넘고있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통령 정부가 3명의 통령으로 이루어졌으나, 제2통령과 제3통령은 명예직에 불과하였고 권력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에게 모아졌다. 제2통령은 법무, 제3통령은 재정을 책임지는 반면, 제1통령은 내정과 외교, 군사 등을 책임졌으므로 그 권한은 다른 통령에 비하여 더욱 막강하였다. 나폴레옹은 연합국에 강화를 제의하지만, 거절당한다. 이에 나폴레옹은 알프스를 직접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하려 하였다. 과거 [[한니발]] 이후 대규모의 군사가 처음으로 알프스를 넘는 일을 당시 그의 부관들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나폴레옹을 극구 만류하였으나 그는 단호히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외쳤다. 그리하여 험준한 알프스를 넘고 [[1800년]] 6월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굴복시켰고, 다음해 2월에 오스트리아는 강화 제의를 받아들여 라인 강의 절반을 프랑스측에 할양하였으며, 북이탈리아 등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했다. 이 강화로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은 붕괴되어, 영국만이 전쟁을 지속하다가 중심축인 [[윌리엄 피트 (1759년)|소 피트]]가 사망하자 [[1802년]] 3월 양국간에 아미앵 조약을 체결하여 10년 만에 안정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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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의 황제 시절 ===
[[파일:Jacques-Louis David 006.jpg|left왼쪽|thumb섬네일|300px|대관식에서 조제핀에게 직접 황후관을 하사하는 나폴레옹, [[자크 루이 다비드|다비드]], 루브르 박물관 소장]]
나폴레옹의 강력한 내정 개혁 실시로 그의 인기가 나날이 높아지자 측근 인사들은 그에게 황제가 될 것을 권유하였고, 이에 나폴레옹은 그것을 국민 투표로 결정하도록 하였다. 1804년 7월의 국민투표에서 찬성표 3,572,329와 반대표 2,569로 대다수의 국민들이 제정을 수락하였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1804년]] [[12월 2일]]에 마침내 즉위식을 거행하여 [[프랑스 제국]]의 초대 황제인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프랑스가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으로 전환된 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야심만만했던 나폴레옹은 역대 프랑스 왕들이 전통적으로 대관식을 치른 랭스 대성당을 단호히 거부하고 [[노트르담 대성당]]을 즉위식 장소로 선택하였다. 자신은 부패한 [[부르봉 왕조]]를 계승하는 군주가 아닌, 위대한 [[로마 제국]]의 대를 이은 후손임을 만천하에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나폴레옹은 [[기독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의미에서 자신이 직접 황제관을 썼으므로 교황 [[비오 7세]]는 축복기도를 하고 그를 포옹해주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파일:Andrea Appiani 002.jpg|right오른쪽|thumb섬네일|180px|이탈리아 국왕으로 즉위한 나폴레옹]]
나폴레옹의 황제 등극은 다방면으로 여러 가지 충격을 주었다. 그를 공화제와 인민들의 영웅이라고 생각해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으로 나폴레옹에게 헌정할 예정이었던 교향곡 제3번을 작곡하고 있던 [[베토벤]]은 그가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하여 악보에서 펜을 던지고 한탄하며, 나폴레옹에게 곡을 헌정하는 것을 그만두고 제목도 《영웅》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이후 베토벤이 "나는 처음에 나폴레옹을 나쁘게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네"라고 말한 것은 잘 알려져있지 아노다. 또한 [[남아메리카]] 독립운동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시몬 볼리바르]]는 나폴레옹의 황제등극을 보면서 절대권력에 혐오감을 갖게 되어, 후에 왕정국가 건설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던 산 마르틴과 결별하였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스페인령 리오 데 라플라타는 독립하게 되는데 그 독립국이 훗날 [[아르헨티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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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아미앵 조약]]》은 [[영국]] 측이 파기하여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다시 전쟁 상태로 들어갔다.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 상륙을 위해 도버 해협을 접한 브로뉴에 대군을 집결시켰다. 이에 대항하여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등을 끌어들여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한다. 프로이센은 중립적인 입장을 표명했지만, 영국과 오스트리아와의 외교관계를 계속 유지하였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을 중립국으로 확실히 만들기 위해서 영국에게서 빼앗은 [[하노버]]를 프로이센에 양도한다는 약속을 했다.
[[파일:Jacques-Louis David 017.jpg|right오른쪽|thumb섬네일|200px|황제 시절의 나폴레옹. 근위기병 대령 복장을 하고 있다.]]
프랑스 육군은 10월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치고, 빈을 점령한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구원하러 온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의 군대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의 군대와 합류하여, 즉위 1주년인 [[12월 2일]]에 프랑스군과 격돌하여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치렀다. 나폴레옹의 교묘한 작전 덕분에 프랑스군은 완승을 거두었으며, 오스트리아는 프레스부르트 조약을 체결하여 항복을 선언했다. 이 전투는 3명의 황제가 한 전장에 모였기 때문에 ‘3황제 회전’이라고도 불린다. 나폴레옹은 이 날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개선문]]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두 나라를 상대로 혼자서 능히 제압한 프랑스 육군의 위광은 곧 전 유럽에 떨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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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락 ===
[[파일:Napoleons retreat from moscow.jpg|left왼쪽|thumbnail섬네일|300px|러시아에서의 철군]]
 
얼마 안 되어, 그의 가정사에도 변화가 생기는데, [[1810년]] [[1월 10일]] 나폴레옹은 14년 동안 함께 살아온 황후 조제핀과 이혼하고, [[프란츠 2세|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 [[마리 루이즈]]와 혼인하였다. 마리 루이즈(Marie Louise)는 이듬해인 [[1811년]]에 [[로마왕]] [[나폴레옹 2세|나폴레옹]]을 낳게 된다. 하지만 프란츠 1세는 사위인 나폴레옹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나폴레옹 역시 장인을 [[신성 로마 제국|망국]]의 군주로 비루하게 여겼기 때문에, 훗날 프란츠 1세는 대프랑스 동맹에 적극적으로 참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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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일천하 ==
{{본문|백일천하}}
[[파일:Tumb of Napoleon Bonaparte.jpg|right오른쪽|thumb섬네일|300px|나폴레옹의 무덤]]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빈 회의가 열려 전후 유럽을 어떻게 재편해야 할지를 각국 정상들이 의논을 하였지만,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에 회의는 좀처럼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게다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 [[프랑스의 루이 18세|루이 18세]]의 시대착오적인 통치에 대해 민중은 점차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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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키가 작은 것으로 알려져있으나 실제 키는 168cm이다. 당시 프랑스인들의 평균 키는 164cm이었다.
 
평균키보다 작아서 보병장교가 아니라
포병 장교가 된곳휴다 결국 164cm 이하이고
당시 그림 척도로 보면 160 cm 이하
186번째 줄:
<br />유럽 전쟁 4<ref>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easytech.ew4</ref>
 
Mount & Blade Warband : Napoleonic Wars DLC
 
== 각주 ==
216번째 줄:
{{전거 통제}}
 
[[분류: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분류:1769년 태어남]]
[[분류:1821년 죽음]]
줄 240 ⟶ 241:
[[분류: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로마 가톨릭교회에서 파문된 사람]]
[[분류: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분류:백수리 훈장 (폴란드) 수훈자]]
[[분류:프랑스의 로마 가톨릭교도]]
[[분류:19세기 유럽의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