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르툴리아누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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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테르툴리아누스는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비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기독교사상》[[2005년]] 2월호,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훼손시키는 부'-카르타고의 시프리안, 이은혜, 대한기독교서회.</ref>인 테르툴리아누스는 [[치프리아누스]](키프리안) 주교의 신학에도 영향을 주었다.<ref>
《내가 사랑하는 교부》/이원오 외 공저/분도출판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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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 mortuus est Dei Filius, prorsus credibile est, quia ineptum est;
et sepultus resurrexit, certum est, quia impossibile."
— (De Carne Christi V, 4)『De Carne Christi』(ca. 203-206)</ref>"라고
마르키온은 예수가 인간이 아니라 인간처럼 보일 뿐이라는 가현설을 주장해서 교회는 마르키온에 대항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한다. 《쉽고 재미있는 교회사》/유재덕 지음/작은 행복.</ref>하는 [[이단]]종파인 마르키온주의에 저항하였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도덕]]에 기초한 민감성은 테르툴리아누스를 [[보편교회|보편 교회]]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카르타고]] 교회가 배교자들을 받아들이고 신자 수보다 도덕성이 떨어지는 문제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에게 [[교회]]는 [[성령]]의 교회이지 죄인들의 공동체가 아니었다. 실례로 교회사학자 중에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신학]]상 깊이 있고 성격이 강한 신학자였다면, 키프리안은 신학상 깊지 않은 대신 온화한 신학자였다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지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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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파일:Septimi Florensis Tertulliani Opera.tif|
=== 저서 ===
* 《그리스도의 육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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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인에게》
== 각주 ==
{{위키공용분류}}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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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55년 태어남]]
[[분류:240년 죽음]]
[[분류:2세기 기독교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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