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Haksan Muduri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
→양측의 준비상태: 조선의 준비만 서술되어 있어서 제목 그에 맞게 고치고, 문장 교정 |
||
22번째 줄: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년]] [[12월 28일]]([[음력 12월 2일]])부터 [[1637년]] [[2월 24일]]([[음력 1월 30일]])까지 [[조선]]과 [[청 제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병자란''', '''병란''', '''병자노란(丙子虜亂)''', '''병정노란(丙丁虜亂)''', '''만주의 조선 침공(Manchu invasion of Korea)''', '''청의 조선 침공(Qing invasion of Joseon)'''이라고도 부른다. [[청 제국]]의 [[숭덕제]]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이전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하였고, [[조선 인조|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으나 [[청나라|청]]의 포위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 왕실이 피난한 [[강화도]]의 함락, [[남한산성]]의 포위를 풀기 위한 근왕병의 작전 실패 등으로 말미암아 항복하였다.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명청교체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며, [[조선]]으로서는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전쟁 포로로 수십 만의 백성이 [[청 제국]]으로 끌려가 그 사회적 피해가 유례없이 막심하였다.
==전쟁 전 조선==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의 사회복구사업, [[이괄의 난]]으로 인한 정예병의
== 개요 ==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었으나, 강화조약에 따라 [[명나라|명]]과의 관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홍타이지]]가 칭제를 결심하고 조선에 의견을 구하는 사신을 보냈을 때 조정이 사신의 접견조차 거부하고, 즉위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이 [[홍타이지]]에게 배례하지 않는 등 친명정책을 변경할 의사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 [[명나라|명]]과의 전면전 전에 조선을 확실히 굴복시켜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1636년 12월 2일, 12만 군사로 조선을 침략했다. 당시, [[조선]]의 대청 방어전략은 청야견벽(淸野堅壁)으로, 강한 [[청나라|청]]의 기병과 직접 맞부딪치는 것을 피하고 침공로 주변의 성에 군사를 집결하여 공성전을 강요함으로써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명나라|명]]이 아무리 약체화 되었더라도 이를 배후에 두고서는 장기전을 벌이기 어려운 청의 약점을 노린 것으로, 유사시에는 수군이 약한 [[청나라|청]]의 공세를 피할 수 있도록 [[강화도]]에 파천하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묘호란]] 당시 [[조선 인조|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하는 것을 지켜본 경험이 있는 [[청나라|청]]은 수성에 들어간 평안도와 황해도의 조선군을 무시하고 [[한양]]과 [[조선 인조|인조]]를 목표로 남하하여 [[조선 인조|인조]]와 조정이 강화도로 피난하는 길을 차단하였다. 봉화를 통한 긴급 통신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조정이 청군의 침공을 인지한 것은 12월 13일이었으며, [[조선 인조|인조]]는 청군이 한양에 거의 접근한 12월 14일에서야 파천에 나섰으나 강화도로 향하는 길이 이미 차단당한 이후라 [[남한산성]]으로 피할 수 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