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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인의 탐험과 정착 ===
[[파일:Mobile1725.jpg|thumb섬네일|left왼쪽|앨라배마의 첫 영구적 정착지가 된 포트루이스 (현재의 모빌)]]
[[스페인]]의 탐험가 [[알론소 알바레스 데 피녜다]]는 [[1519년]] [[모빌 (앨라배마 주)|모빌]]로 항해하여 들어왔다. [[1528년]]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가 이끄는 원정대는 앨라배마의 해안 물길을 지나갔다. 북아메리카를 건너가는 데 첫 유럽인 [[알바르 누녜스 카베사 데 바카]]는 이 원정대의 일원이었다. 또다른 스페인인 [[에르난도 데 소토]]는 [[1540년]] 북동부로부터 앨라배마 지방으로 원정을 이끌었다. 그는 내부를 탐험하는 데 첫 유럽인이 되었다. 데 소토와 인디언들은 앨라배마의 남서부에서 싸웠고, 데 소토의 군대는 터스컬루사 추장과 그의 전사들을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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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대와 1850년대에 앨라배마 주는 재정적 위기들을 겪었다. 1820년대에 창립된 주립 은행은 부족하게 경영되었다. 은행은 너무 많은 돈을 발행하고 결과로서 돈은 가치에서 감소하였다. 은행은 또한 정치적 이유들을 위하여 돈의 큰 양을 기부하였다. [[1837년]] 재정적 공황이 미국을 휩쓸었다. 앨라배마 주립 은행은 예금자들에게 빚을 질 돈을 갚을 수 없었다. 이 이유로 [[벤저민 피츠패트릭]] 주지사는 1840년대에 은행을 폐문하였다. 많은 앨라배마 주민들이 자신들의 저축을 잃었다. 주는 수확물을 망친 [[가뭄]]과 [[황열병]]의 전염을 겪기도 하였다.
 
1840년대와 1850년대에 많은 북부인들은 연방 정부가 국가의 서부 영토들에서 [[노예 제도]]를 금지하기를 원하였다. 다른 이들은 서부인들이 논쟁에 투표할 수 있기를 원하였다. [[1848년]] 앨라배마 주에서 열린 [[민주당 (미국)|민주당]] 주 의회가 현저한 정치인 [[윌리엄 L. 얀시]]에 의하여 후원된 "앨라배마 토론회"를 채택하였다. 이 토론회는 연방 정부가 영토들에서 노예 제도를 보호하는 요구를 하였다. 얀시는 후에 민주당의 [[1860년]] 대통령 회의에서 남부 사절단들이 나가버리는 지도를 하였다. 이 일은 민주당을 분열하고 [[공화당 (미국)|공화당]] 소속의 [[에이브러햄 링컨]]을 대통령으로서 확신시켰다.
 
=== 남북 전쟁과 재건 ===
[[파일:Huntsville Courthouse Square 1864.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남북 전쟁]] 중 헌츠빌의 법원 광장을 점령한 북군 (1864년)]]
노예 제도는 북부와 남부 사이의 불일치를 일으킨 원인 만이 아니었다. 농업적 남부와 산업적 북부 사이의 경제적 경쟁들과 주들의 권리들에 관한 논쟁들도 또한 분쟁들을 일으켰다. [[1861년]] [[1월 11일]] 앨라배마 주는 합중국으로부터 탈퇴하였다. 앨라배마 주 탈퇴 회의는 그러고나서 다른 탈퇴한 주들을 [[몽고메리 (앨라배마 주)|몽고메리]]로 사절단들을 보내는 데 초청하였다. [[2월 8일]] 회의는 몽고메리를 수도로 [[아메리카맹방]]을 설립하였다. 그해 [[5월]]에 아메리카맹방의 수도는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 (버지니아 주)|리치먼드]]로 옮겼다.
 
[[1863년]] [[남북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에 [[너대니얼 베드퍼드 포러스트]] 장군 아래의 남군은 시더블러프 근처에서 북군의 더 큰 수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남북 전쟁의 앨라배마 주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는 [[1864년]] [[8월 5일]] 모빌 만의 해전이었다. 이 해전은 [[데이비드 패러거트]] 해군 소장 아래의 북군 해군에 의하여 이겼다. 그해에는 북군의 장군 [[로벨 H. 루소]]가 앨라배마 주 동부를 급습하다. [[1865년]] [[제임스 H. 윌슨]] 장군의 북군은 주를 가로질러 철공품들을 난파하고, [[앨라배마 대학교]]의 건물을 불태우고, [[셀마 (앨라배마 주)|셀마]]의 군수품 산업을 파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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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번영 ===
[[파일:Birmingham Alabama skyline 1915.jpg|thumb섬네일|left왼쪽|버밍햄의 스카이라인 건설 (1915년)]]
앨라배마 주의 철도와 철강업은 1870년대와 1880년대에 극적으로 확장되었다. 앨라배마 주 북부의 [[애펄레이치언 산줄기]]는 철강과 제철을 만드는 데 쓰이는 [[철광석]], [[석회암]]과 [[석탄]]의 큰 매장량을 가졌다. [[1880년]] [[버밍햄 (앨라배마 주)|버밍햄]]은 앨라배마 주의 첫 폭발의 아궁이 앨리스 넘버원의 본거지가 되었다. [[1900년]]으로 봐서 철강업의 이유로 버밍햄은 "남부의 피츠버그"로 알려졌다. 철강과 제철 공장들은 또한 애니스턴, 베시머, 데커추어, 개즈던과 탤러더가에 지어지기도 하였다. 많은 도시들은 섬유 산업의 번창으로부터 이득을 얻기도 하였다. 추가로 앨라배마 주 남부의 소나무들은 재목 산업의 번창을 위한 원료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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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세계 대전과 대공황 ===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 앨라배마 주의 산업과 상업이 자라났다. [[조선업]]은 모빌에서 중요한 산업이 되었고, 철강업은 버밍햄에서 증가하였다. 농부들은 전쟁 노력의 요구들을 만나는 데 면과 식품의 생산을 늘였다. 1920년대 중반에 앨라배마 주립 조선국은 모빌에 새로운 항구 시설들을 지었다. 앨라배마 주의 외국 무역은 결과로서 거대하게 증가하였다. 그 시기의 주의 정치들은 흑인과 다른 소수 민족들의 향상을 반대한 [[쿠 클럭스 클랜]]에 의하여 반사되었다. 백인 정치인들은 선거 기회들을 향상시키려고 가끔 클랜에 가입하였다.
 
1920년대의 번영에 이어 경제적 쇠퇴가 생겨났다. [[1929년]] 앨라배마-톰빅비 강의 홍수가 앨라배마 주 남부에 있는 큰 지역들에 생겨 6백만 달러의 재산 피해를 가져왔다. 그해에는 앨라배마 주민들을 위한 어려움을 가져온 [[대공황]]의 시작을 나타냈다. [[1929년]]과 [[1931년]] 사이에 60개 이상의 앨라배마 주의 은행들이 실패하여 1천 6백만 달러 이상의 손해를 보았다. 1930년대 초반에 앨라배마 주는 주를 파산으로부터 구하는 도움을 주는 데 주의 소득세와 예산 통제법을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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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상황 ===
[[파일:Bloody Sunday-Alabama police attack.jpeg|thumb섬네일|right오른쪽|[[셀마 몽고메리 행진]]에서 행렬자들을 공격하는 주립 경찰대 (1965년)]]
[[1941년]] [[12월 8일]]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다. 전쟁의 이유로 연방 정부는 앨라배마 주에 존재하는 군사 기지들을 확장시키고, 헌츠빌에 있는 레드스톤 군수 공장을 포함한 새로운 건물들을 지었다. 연방금이 주의 조선업과 철강업에 쏟아져 들어왔다. 수천명의 앨라배마 주민들이 군사에 복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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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미국 대법원]]은 공공 학교들에서 의무적 인종적 분리가 비헌법적이라고 다스렸다. [[1963년]] [[6월 11일]] 앨라배마 주지사 [[조지 월리스]]는 앨라배마 대학교에서 2명의 흑인 학생 비비언 멀론과 제임스 후드의 입학을 상징적으로 막는 데 포스터 강당의 문길에 서있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법률을 집행하는 데 방위군을 보냈으며, 학생들은 입학되었다. 그해 [[9월]] 월리스는 몇몇의 도시들에서 공공 학교의 인종 차별 대우 폐지를 막으려고 하였다. 다시 케네디 대통령은 방위군을 불렀다.
 
[[1963년]] 킹과 동료 인권 운동가 [[프레드 셔틀즈워스]]는 버밍햄에서 공공 시설과 비지니스들에서 인종 차별 대우를 폐지하는 데모를 이끌었다. 경찰국장 [[유진 코너]]("황소"로 알려짐)는 데모인들이 경찰견과 소방 호스들로 공격을 당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 사건들이 국가적으로 텔레비전에 보인 후에 데모인들은 공공적 인정의 쏠리는 점이 되었다. [[1965년]] [[3월]] 킹은 투표인의 등록에서 차별에 대항하는 5일 간의 [[셀마 몽고메리 행진]]을 이끌었다. 그해 [[8월]] 의회는 수천명의 앨라배마 주 흑인들이 투표를 하게 만든 투표권법을 통과시켰다.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권리들의 성원은 전통적으로 대통령의 민주당을 후원한 앨라배마 주 백인 투표인들로부터 반응을 야기하였다. 이 투표인들은 조지 월리스의 대통령 선거 운동을 지지하러 왔으며 국립 민주당으로부터 갈라짐을 자라나게 하였다. 공화당이 결국 앨라배마 주의 정치에서 지배적인 정당이 되는 데 이 분할로부터 이득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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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라배마 주는 재정적 문제들과 2000년대를 시작하였으나 곧 회복되었다. [[2003년]] 주 경찰관, 공공 보건 소득과 교도소들을 위하여 돈을 마련한 주 정부의 정통 기금은 6억 7천 5백만 달러의 부족을 가졌다. 투표인들이 늘어나는 세금들에 측량을 꺾은 후, 공화당 주지사 [[밥 라일리]]는 15 퍼센트로 줄어든 많은 주의 대리들을 위한 예산들을 명령하였다.
 
[[2004년]] 허리케인 아이번이 앨라배마 주의 인기있는 걸프 쇼어즈 리조트 지역을 치면서 많은 휴양 주택들과 호텔들에 손해를 끼치고, 지역의 모래 해변들의 부문을 쓸어버렸다. [[2006년]]으로 봐서 앨라배마 주의 해변들은 수리되었다.
 
앨라배마 주의 경제적 조망은 [[2006년]]으로 봐서 향상되었다. 건설과 자동차 공장들에서 직업들이 늘어나는 이유로 그해 말기에 실업률은 주의 역사상 가장 낮았다. 주의 소득은 예산상의 필요함을 넘고 입법부는 세금을 줄였다. 처음으로 투표인들은 민주당 소속의 여성 [[수 벨 코브]]를 앨라배마 주 대법원의 최고 판사로 선출하였다. 또한 그해에 전 주지사 [[도널드 시걸만]]이 연방 부패 고발로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 88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자신의 징역의 일부를 보냈으나 [[2008년]]에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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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미국 남부]]
[[분류:앨라배마 주앨라배마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