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옥 (1760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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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이상오는 [[1754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본처 남양홍씨 홍이원의 딸이 죽자, 홍이원의 먼 친척인 [[홍이석]]의 딸과 재혼하였다. 그의 선대는 양주군 별비면 고산리(현, [[의정부시]] [[고산동]])에서 살았지만, [[의정부]] 출신이던 이상오는 처가가 있는 [[화성군]] [[남양면]]으로 이주해서 정착했다. 남양면 백곡리는 그의 외가의 세거지로, 외증조부 [[홍시주]]의 묘와 백곡산성 주변에는 외종조부 [[홍이연]], 외할아버지 [[홍이석]]의 묘소가 있다.
 
그의 가계는 여유가 있어 장서를 소지했고, 종을 몇명 두어 어장을 운영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이종사촌 [[유득공]]을 통해 [[청나라]]의 서적을 구해서 읽기도 했다. 젊어서 [[한성]]으로 올라가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고, 성균관 유생 재학 중이던 [[1790년]](정조 25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생원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 정조|정조]]의 문체반정으로 [[과거 시험]]을 단념하고 낙향, 충군을 청하는 상소까지 있었지만 충군에 대한 청원은 하지 않고 낙향했다. [[경기도1798년]] [[화성군경상도]] [[남양삼가현]]에서 은둔생활을요청으로 하며내려가 시문으로[[1801년]](순조 소일하였다.1) [[2월]]에 귀향했다.
 
[[1801년]](순조 1) [[한성]]으로 올라왔으나 정조는 사망한 상태였고, [[신유옥사]]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경기도]] [[화성군]] [[남양]]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시문과 학문, 저술 활동으로 소일하였다.
 
== 기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