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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배와 최후 ====
{{참고|허견의 옥사|허새의 옥사|경신환국|기사환국}}
[[1680년]](숙종 6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몰락하자 [[허적]](許積)의 할아버지 '허잠의 시호 연시연' 행사장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허적]]의 동류로 몰려 심문당했다. 청남이었던 그는 평소 [[허적]]이 [[서인]]들을 변호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었다.
배소에서도 학문에 전념하였고, 조경(趙絅), [[허목]](許穆), [[윤휴]], 이관징(李觀徵), [[이서우]], [[이수경 (1627년)|이수경]], [[이원정]] 정지호(鄭之虎), 조위봉(趙威鳳), 안진(安縝), 정시우(鄭時羽), 한중징(韓仲澄), 조창문(趙昌門)과 자질(子姪) 등 남인계의 인사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1685년]] [[호조판서]] [[박신규]](朴信圭)가 상소를 올려 그의 석방을 주청하였으나 [[서인]]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현지 배소에서 유배생활 중 [[1687년]](숙종
=== 사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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