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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는 건국 선포 직후 [[소련]]을 방문하여 원조를 청하고, 광범위한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토지개혁에는 지주계급의 숙청이 전제조건이었으므로 수많은 지주들이 집회에서 처형되거나 강제노역지에 수용되었다. 이는 새로운 정권에 위협이 될 만한 반혁명세력을 뿌리뽑는다는 이유도 있었다.
 
1950년 5월 13일, [[북조선]]의 [[김일성]]과 [[박헌영]]이 베이징에 도착하여 마오쩌둥과 면담하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모스크바 회담 때 ‘현 국제환경은 과거와는 다르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으나 최종결정은 마오쩌둥과의 협의를 통해 이뤄야한다’고 했음을 설명했다. 5월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300289104008&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3&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1&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707-23 |쪽 = 5 |인용문 = <!-- ◇ 김일성-마오쩌둥 회담 △ 50.5.3= 김일성과 박헌영 베이징에 도착, 마오쩌둥과 면담하고 필리포프(스탈린) 동무가 모스크바 회담 때 ‘현 국제환경은 과거와는 다르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으나 최종결정은 마오쩌둥과의 협의를 통해 이뤄야한다’고 했음을 설명. △5.4=스탈린이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 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ref> 5월 15일, 모스크바의 메시지를 받은 뒤 마오는 김일성 · 박헌영과 구체적으로 의견을 교환하였다. 김일성은 북조선이 ‘군사력 증강-평화통일 대남제의-대한민국 쪽의 평화적 통일 제의 거부 뒤 전투행위 개시’의 3단계 계획을 세웠다고 언급했다. 마오가 이 계획에 찬성을 표명하고 일본군의 개입 가능성을 물은 데 대해 김일성은 일본군이 참전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나 미국이 2만~3만 명의 일본군을 파견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참전이 상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오는 만일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돕겠다고 했다. 소련은 미국쪽과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가 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기가 불편하지만 중국은 이런 의무가 없으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현 시점에서 작전 개시를 결정함으로써 이 작전이 양국간 공동의 과제가 되었으므로 이에 동의하고 필요한 협력을 제공하겠다고 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300289104008&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3&officeId=00028&pageNo=4&printNo=1961&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707-23 |쪽 = 5 |인용문 = <!-- ◇ 김일성-마오쩌둥 회담 △ 5.15=모스크바의 메시지를 받은 뒤 마오는 김일성․박헌영과 구체적으로 의견을 교환.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군사력 증강-평화통일 대남제의-남한쪽의 평화통일 제의 거부 뒤 전투행위 개시’의 3단계 계획을 세웠다고 언급. 마오가 이 계획에 찬성을 표명하고 일본군의 개입 가능성을 물은 데 대해 김일성은 일본군이 참전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나 미국이 2만~3만명의 일본군을 파견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 답변. 그러나 일본군의 참전이 상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함. 마오는 만일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돕겠다고 함. 소련은 미국쪽과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가 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기가 불편하지만 중국은 이런 의무가 없으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도와줄 수 있다고 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현 시점에서 작전 개시를 결정함으로써 이 작전이 양국간 공동의 과제가 되었으므로 이에 동의하고 필요한 협력을 제공하겠다고 함.”-->}}</ref>
 
이후 [[한국 전쟁]]의 참전을 결정하여 막대한 전비 때문에 신국가 건설이 잠시 지체되지만, [[1953년]]부터 소련의 차관과 기술의 원조를 받아 소련을 본뜬 제1차 5개년 계획을 실시했다. 특히 농업 생산에서 커다란 진전을 보였고, 공업 발전을 위한 기초산업을 건설하였다. 결과에 고무된 마오는 제2차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고, 농업을 집단화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집단 농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인민공사]]가 마을마다 구성되어 농민들은 여기에 수용되었다. 또한 공산 체제가 어느 정도 안정된 [[1956년]]에는 공산주의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백화제방·백가쟁명]](百花齊放百家爭鳴)" 방침을 내놓았지만, 이후 사태가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데에 이르자 돌연 방침을 180도 전환하여 [[1957년]]에는 당내 [[사상의 자유]]도 탄압하는 [[반우파운동]]을 전개하여 반체제 인사의 숙청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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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따르면 [[1958년]]에 마오는 [[참새]]가 벼를 먹는모습을 보고 분노하였다. [[참새]]를 가리키며 사람이 먹는 곡식을 새가 먹고있다니! “저 새는 해로운 새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 때문에 중국에는 참새잡이 광풍이 불어 [[1959년]]에는 [[제사해 운동]]으로 인해 중국 참새의 씨가 말랐다. [[곤충]]을 먹이로 하는 참새가 없어지면서 각종 [[해충]]이 창궐하여 대흉년의 발생으로 4천만 명이 굶어죽었다. [[1959년]]에 열린 [[루산 회의]]에서 국방부장을 맡고 있던 [[펑더화이]]가 대약진 운동을 전개한 마오를 비판하지만, 도리어 펑더화이 자신이 해임당하고 말았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아사자와 처형당한 수는 약 2천 500만 명을 헤아렸다. [[1959년]] [[대약진 운동]]에 대한 비난 여론이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마오의 뒤를 이어 국가주석에 취임한 [[류사오치]]는 대약진 운동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덩샤오핑]]과 함께 경제개혁을 주도하게 되었다.
 
마오는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으나 류사오치는 친정 의사를 내비쳤고, 암암리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그와 수시로 갈등했다. 한편 스탈린의 뒤를 이어 집권한 [[니키타 흐루쇼프]]가 서방과의 관계를 개선하자, 마오는 이를 규탄하여 중소간의 관계에 균열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1962년]]에는 [[티베트]]를 둘러싸고 [[인도공화국]]과 국경분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미국뿐만 아니라 서방에서 안보적 위협이 증가하자 중국의 독자적 핵무기 개발을 실시하여 [[1964년]] 핵실험에 성공하였다. 마오쩌둥은 1965년 3월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당대표 및 북조선의 [[최용건]]이 참석한 가운데 "아시아 지역 혁명에 대해 논의"에서 대한민국에서 무장 게릴라 봉기를 일으키라고 강요했다. 이에 대해서, 북조선의 [[김일성]]은 "남조선에는 해안이 많고, 산이 벌거벗었으며, 교통이 비교적 발달해 있는 데다 미군까지 주둔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대신 "시간을 들여서 대중 속에 '비공연(非公然) 조직'을 만들어 대중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이러한 투쟁이 아니고서는 소모일 뿐, 승리는 어렵다"는 의견이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807/h2008070410444184330.htm |제목 = "60년대 마오쩌둥이 남한 무장봉기 강요" |출판사 = 한국일보사 | 날짜 = 2008-707-404 | 인용문 = <!--1965년 중국 최고권력자 마오쩌둥(毛澤東)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김일성에 대해 남한에서 무장 게릴라 봉기를 일으키라고 강요했음을 뒷받침하는 김일성의 1966년 발언록이 공개됐다. ... 마오는 1965년 3월에 김일성에게 만나자고 요청했다. 이에 김일성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인 최용건을 중국으로 대신 보냈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당대표도 참석한 가운데 "아시아 지역 혁명에 대해 논의"한 이 만남에서 마오는 최용건에게 "남조선 인민이 게릴라 투쟁을 시작하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지도해 주기 바란다"고 요구했다고 김일성은 발언했다. 하지만 이런 강요에 김일성은 "남조선에는 해안이 많고, 산이 벌거벗었으며, 교통이 비교적 발달해 있는 데다 미군까지 주둔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대신 "시간을 들여서 대중 속에 '비공연(非公然) 조직'을 만들어 대중 운동을 전개해야한다. 이러한 투쟁이 아니고서는 소모일 뿐, 승리는 어렵다"는 의견을 일본공산당 대표단에게 개진했다고 문서는 말했다.-->}}</ref>
 
===== 문화 대혁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