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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외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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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외교정책의 수립과 이행에 대한 주된 책임을 [[미국의 대통령|대통령]]이 지게 되어 있으나, [[미국 의회|의회]]도 이에 대해 강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다. 우선 의회는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하원은 대통령의 외교정책 수행에 필요한 예산에 대해 강한 통제력을 가지고 있으며, 상원도 재원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다. 특히 상원의 경우에는 고급 외무 관리의 임명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체결하는 모든 조약에 대한 비준권을 가지고 있다. 의회의 이와 같은 제재권한은 행정부와 의회의 갈등을 초래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에드워드 코르윈([[:en:Edward Samuel Corwin|Edward Samuel Corwin]]) 교수는 미국의 정치체계가 외교정책에 있어서 행정부와 의회 간의 투쟁을 초래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 좋은 예로서는 [[상원]]이 국제연맹 헌장의 비준을 거부한 사실을 들 수 있다. 의회와 행정부간에는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지고 있다. 유엔헌장 비준 당시의 의회와 행정부간의 긴밀한 협조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협동외교는 한국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는 '초당외교'라는 말과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베트남 전쟁]]으로 말미암아 파생된 행정부와 의회간의 갈등은 심각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의회가 대통령에 가하는 압력은 행정부의 독주를 견제하는 동시에 건전한 방향의 미국 대외정책을 모색하고 있다. 의회는 국민의 대표기구로서 국민의 의사와 직결돼 있다. 따라서 대외정책의 수립이나 이행 과정에도 항상 의회를 '문제아'로 취급하거나, 또는 그러한 범주내에 의회의 기능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참조|해리 S. 트루먼}}
 
트루먼의 등장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신봉했던 파시즘의 종식을 전제로 한 미국 외교정책의 전면적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트루먼은 반소 감정이 매우 강해, 이미 상원의원 시절에 "독일군들과 소련군들이 피가 다 빠질 때까지 싸웠으면 좋겠다"는 독설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국제주의적인 협상과 타협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하였으며, 자유세계의 방위를 위해선 소련이라는 '세계적인 깡패'에 대해 십자군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신념의 소유자였다.{{출처|날짜=2013-707-29}}
 
트루먼 재임시, 미군은 조선의 38선 이남을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시까지 다스렸다. 1947년 3월 12일, 트루먼은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으로 불리는 선언을 하였다. 이 선언은 [[이승만]]을 비롯한 남한의 정치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마침내 미소공동위원회는 아무런 타결 없이 1947년 8월 해산하였다. 미국은 1947년 9월 [[유엔 총회]]에 한국문제 해결을 위탁했다. 소련의 반대로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되게 된다. 1948년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이 날짜로 미군정은 통치권을 한국정부에 일임하고 해체되었다. 미국은 [[한국 전쟁]](1950년~1953년) 당시 유엔군을 조직하여 [[대한민국]] 편에서 참전하여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1951년 9월에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과 다시 국교를 정상화하였고 그 해에 [[미일안전보장조약]]을 조인하였다.
====케네디 정부 시기(1961~1963)====
{{참조|존 F. 케네디}}
1961년 [[미국의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는 CIA의 도움을 받는 쿠바 망명자들이 [[피그스 만 침공]](1961년 4월)을 감행하도록 지원하였으나 군인들이 모두 생포 및 사살되어 미국의 침공은 실패했다. 오히려 이 사건으로 미국은 쿠바에서의 주권침해행위에 대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피그스 만 침공]]은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를 가져오게 된다. 잇따른 미국의 노골적인 겁박에 몰린 신생 혁명국 쿠바는 [[소련]]에 기대어 활로를 찾으려 했다. [[소련]]의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함으로써 미국의 전면 침공을 막아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대립은 이내 임계점으로 치달았다. 핵전쟁의 공포가 지구촌을 휘감았다. 위기를 피하려는 미-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ref>{{웹 인용 |url=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4813.html |제목= 쿠바로 가는 길 열렸다 |저자= 정인환 기자 |웹사이트=한겨레21 |출판사=한겨레신문사 |날짜= 2009-04-24 | 확인날짜=2009-06-13|인용문=<!-- 미국은 쿠바 출신 망명객을 중심으로 숱하게 무장세력을 규합해 ‘직접 개입’에 나섰다. 하지만 번번이 ‘미수’에 그쳤다. 그 대표적 사례가 1961년 4월 벌어진 ‘피그만 침공사건’이다. 미 중앙정보국(CIA) 주도로 쿠바 망명자 1500여 명을 동원해 쿠바 침공에 나선 미국은 불과 사흘 만에 1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1천여 명이 생포되는 참담한 패배를 맛봤다. ...잇따른 미국의 노골적인 겁박에 몰린 ‘신생 혁명국’ 쿠바는 옛 소련에 기대 활로를 찾으려 했다. 옛 소련의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함으로써 미국의 전면 침공을 막아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때는 1962년 10월, 냉전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기다. 대립은 이내 임계점으로 치달았다. 핵전쟁의 공포가 지구촌을 휘감았다. 위기를 피하려는 미-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봉합되긴 했지만, 쿠바 미사일 위기는 이후 반세기 가까이 이어질 미국의 대쿠바 정책의 방향을 확정짓는 사건이었다.--> }}</ref> 미국이 이후에는 이 섬에 침공하지 않겠다는 구두 약속을 하는 등 봉합되긴 했지만, 쿠바 미사일 위기는 이후 반세기 가까이 이어질 미국의 대쿠바 정책의 방향을 확정짓는 사건이었다. 미국은 쿠바에 대해 외교적, 경제적으로 완전한 봉쇄 정책을 단행하였고, "몽구스 작전"(Operation Mongoose)을 개시하였다. 쿠바 혁명 이후, 1961년까지 수십만명이 미국으로 피신하였고,<ref>{{서적 인용 |제목=Cuba |저자=Ted Henken}}</ref> 1959년부터 1993년까지 약 120만명의 쿠바인(현재 인구의 10%)이 미국을 향해 쿠바를 떠났다.<ref>{{웹 인용 |url=http://www.census.gov/Press-Release/www/releases/archives/facts_for_features_special_editions/000797.html |제목=US Census Press Releases<!-- 봇이 붙인 제목 --> |확인날짜=2013년 07월7월 19일 |보존url=http://arquivo.pt/wayback/20090709154810/http://www.census.gov/Press-Release/www/releases/archives/facts_for_features_special_editions/000797.html |보존날짜=2009년 07월7월 09일9일 |깨진링크=예 }}</ref> 주로 이들은 작은 보트나 허술한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왔다.
 
===격동의 시대 (1964-1980)===
 
===현대 (1980-현재)===
1992년엔 "쿠바민주화법" 통과로 봉쇄정책의 입법화가 이뤄졌다. 미국은 "쿠바가 민주화 이행을 거부하고 인권을 보장하지 않는 한" 쿠바에 대한 통상 제재를 지속하고 있었다.<ref>{{웹 인용|url=http://www.state.gov/www/regions/wha/cuba/democ_act_1992.html|제목=Cuban Democracy Act of 1992|출판사=State Department |인용문=<!--SEC. 1703. STATEMENT OF POLICY. ... It should be the policy of the United States -- ...6. to maintain sanctions on the Castro regime so long as it continues to refuse to move toward democratization and greater respect for human rights;--> |보존url=https://archive.is/KlHx|보존날짜=2012-08-05}}</ref> 베트남 정부가 폐쇄적인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문제점을 깨닫고 개혁개방정책을 편 이후 미국 기업인과 언론이 베트남과 관계를 개선하라는 압력을 넣자 1994년 2월, 클린턴 행정부는 마침내 1975년 이후 계속되어 왔던 베트남에 대한 무역금지조치를 해제했다. 1995년 1월 양국간에 상호연락사무소가 개설된 데 이어 동 7월 11일에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다. 1996년엔 극우 성향의 제시 헬름스 당시 상원 외교위원장(공화당) 주도로 "쿠바 자유화 및 민주화연대법"([[헬름스-버턴법]])이 통과돼 미국 자본의 쿠바 투자가 사실상 봉쇄됐다.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엔 쿠바 출신 이민·망명자들의 "본국 송금"조차 사실상 차단되기에 이르렀다.<ref>{{웹 인용 |url=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4813.html |제목= 쿠바로 가는 길 열렸다 |저자= 정인환 기자 |웹사이트=한겨레21 |출판사=한겨레신문사 |날짜= 2009-04-24 | 확인날짜=2009-06-13|인용문=<!-- 해를 거듭할수록 봉쇄의 고삐는 옥죄어졌다. 급기야 지난 1992년엔 ‘쿠바민주화법’ 통과로 봉쇄정책의 입법화가 이뤄졌다. 1996년엔 극우 성향의 제시 헬름스 당시 상원 외교위원장(공화당) 주도로 ‘쿠바 자유화 및 민주화연대법’(헬름스-버튼법)이 통과돼 미국 자본의 쿠바 투자가 사실상 봉쇄됐다.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엔 쿠바 출신 이민·망명자들의 ‘본국 송금’조차 사실상 차단되기에 이르렀다.--> }}</ref> 미국의 대통령 [[버락 오바마|오바마]]는 2009년 4월 17일,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미국은 쿠바와 새로운 시작을 추구한다."고 표명하였고 47년 만에 쿠바에 대한 봉쇄정책을 일부 해제했다.<ref>{{웹 인용|url=http://www.america.gov/st/peacesec-english/2009/April/20090421102201dmslahrellek0.4116632.html?CP.rss=true|제목=Obama Says U.S., Cuba Taking Critical Steps Toward a New Day|출판사=america.gov|인용문=<!--Although Cuba was not on the summit agenda, nor were Cuban representatives invited to attend the gathering of 34 democratically elected hemispheric leaders in Port of Spain, the capital of Trinidad and Tobago, the country was nevertheless on everyone’s mind. Obama acknowledged as much in opening remarks April 17. “There’s been several remarks directed at the issue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Cuba, so let me address this. The United States seeks a new beginning with Cuba,” he said.-->|확인날짜=2009년 09월9월 06일6일|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91130044737/http://www.america.gov/st/peacesec-english/2009/April/20090421102201dmslahrellek0.4116632.html?CP.rss=true|보존날짜=2009년 11월 30일|깨진링크=예}}</ref>
 
== 각국과의 대외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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