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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에 귀국하여 [[홍문관]][[부제학]]이 되었고, [[위안스카이]]는 그를 처벌할 것을 압력을 행사하였지만 고종은 그를 [[1892년]] [[전환국]][[관리]](典圜局管理)에 임명하였다.
이후 [[1894년]] [[호조]] 판서·[[교정청]] 당상·[[한성부판윤|한성부 판윤]]([[음력 6월 24일]]~[[음력 7월 4일]])<ref>{{웹 인용 |url=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sidaesa/txt/64.html |제목=서울六百年史 - 1891~1920<!-- 봇이 붙인 제목 --> |확인날짜=2006년
1895년 삼국간섭으로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자 혼란을 수습하고 내각 총리대신 서리에 임명되어 되어 과도 내각을 조직했다가 왕궁 호위병 교체 문제로 사표를 제출했으나, 일본의 협조로 유임되었다. 이해 7월 내각총리대신 서리를 사임하였다.
[[1895년]] [[8월]] 일본 낭인과 내통한 조선인 병력들이 대궐에 난입, [[명성황후]]가 살해당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서광범]] 등과 함께 위정척사파 및 수구파의 대대적인 탄핵, 정치공세를 받고 파면되었다가, 3차 김홍집내각의 [[내부]][[대신 (조선 말기)|대신]]이 되었다. [[을미사변]] 당시 조정의 요직에 있었다는 이유로 위정척사파들로부터 왕비 살해 공모자로 몰려 [[최익현]], [[윤용선]] 등으로부터 수시로 규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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