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지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틀 이름 및 스타일 정리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날짜 변수 정리
23번째 줄:
* 1914년에 [[사량면]]과 합면되어 신설 원량면에 편입, 면사무소를 욕지도에 둠
* 1955년 6월 29일 원량면에서 [[사량면]]을 분리시키고 욕지면으로 개칭.
1957년, 정부가 욕지도와 장사도 등을 나병환자 정착수용소 후보지로 삼고 있다는 보도가 나가자, 욕지도 도민 1만5천명이 “나병환자수용소 욕지면 설치 결사반대” 면민 궐기대회를 여는 한편 12월 16일에는 경남 당국에 수용소 설치반대 진정서를 제출하였다.<ref>{{뉴스 인용 |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712180032910201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7-12-18&officeId=00032&pageNo=2&printNo=3827&publishType=00010 |제목 = 癩患者收容所指定(나환자수용소지정)에또말썽 欲知島民(욕지도민) 決死反對態 |출판사 =경향신문 |날짜 = 1957-12-18}}</ref> 한때 멸치잡이의 중심지로 각광을 받은 욕지도는 만주, 북지(北支)까지의 수출실적을 올렸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1072500329202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1-07-25&officeId=00032&pageNo=2&printNo=4781&publishType=00020 |제목 = 三海(삼해)의 落島巡訪(낙도순방) (15) 欲知島(욕지도) |출판사= 경향신문 |날짜 = 1961-707-25}} 1954년, 우장춘은 욕지도를 답사하고 기후 토질 등이 귤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다고 인정하여, 수만본의 귤나무 묘목을 갖다 주었으나, 주민들의 기술부족으로 대부분의 나무가 죽고, 1961년에는 약5~600그루만 남았다. {{뉴스 인용 |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1080600209203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1-08-06&officeId=00020&pageNo=3&printNo=12175&publishType=00020 |제목 = 섬 (21) 欲知島(욕지도) |출판사= 동아일보 | 날짜 = 1961-808-606}}</ref>
== 행정 구역 ==
* 동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