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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군 극동군사령부는 당시 그를 [[조선]]의 유력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평하였다. [[미군정]]은 조선인 지도자들에 대한 보고서에 그에 대한 평을 남겼다.
 
{{인용문2|교육을 잘 받았다. 한국의 대표적 작가이자 언론인의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안창호와 긴밀한 관계다. 조선문인협회 회장이며, 소년회 활동에 적극적이다. 1930년대 붙잡혀 투옥된 바 있으며, 일제에 의해 고문을 당했다. 석방된 후 일제에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며, 이로 인해 이전까지 쌓아 왔던 영향력을 잃게 됐다.<ref>{{웹 인용 |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08/2008080801467.html |제목=광복 1년 전 미군(美軍) 정보당국이 작성한 '조선 지도자 5인(人)' 평가표 |확인날짜=2012년 11월 05일5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20118190643/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08/2008080801467.html |보존날짜=2012년 01월1월 18일 |깨진링크=예 }}</ref>}}
 
[[1945년]] 1월 4일부터 17일까지 전쟁협력단체인 [[대화동맹]]大和同盟이 주도한 처우감사 총궐기 재성유지협의회 운동준비위원으로서 '처우감사총궐기전선대회'에 참여해 강연했다. [[2월 11일]] 대화동맹(大和同盟) 준비위원 겸 이사를 맡았다. 같은 해 2월경 일본 신태양사(구 일본모던사)가 주관하는 제6회 조선예술상 문학부문 심사위원을 맡았다. 한편 [[조선총독부]]가 불령선인들을 전부 체포해서 집결시킨 뒤 총살시킨다는 소문을 듣고 [[1945년]] 3월 잠시 은신해 있기도 했다. 그 해 4월 [[조선총독부]]에서 특별히 중추원 참의직을 제안하였지만 사양하였다. [[6월 8일]]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으로 활동했으며, [[6월 24일]] 정치깡패이자 제국의회 의원 [[박춘금]]이 당수인 [[대의당]]의 위원에 선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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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머무르던 [[경기도]] [[남양주시]] 봉선사에 그의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시랑리에는 그의 시비가 세워졌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에 있는 그의 자택은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 제87호로 지정되었다.
 
[[2005년]] 이광수의 작품《무정》 영문판이 그의 손녀 이성희에 의해 [[미국]]에서 출간되었다.<ref>[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05/10/23/2005102355001.html 춘원 이광수의 '무정' 영문판 출판] {{웹아카이브|url=https://archive.is/20130119070025/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05/10/23/2005102355001.html |날짜=2013년 01월1월 19일 }} 조선일보 2005.10.23</ref>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