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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 ===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함께 선무작전이 병행되었으며,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진 데 이어 6월에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가 오라리에서 경찰의 발포로 사살됨<ref>[http://jeju.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0701581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ref> 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그리고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당시 제주 계엄군을 맡고 있던 [[대한민국 해병대]] 등에게 학살을 당하였고<ref>{{웹 인용 |제목=제주 4.3의 슬픈 증언 8 |url=http://blog.ohmynews.com/rufdml/130384 |날짜=2006-12-505 |확인날짜=2012-03-19}}</ref>,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이 사건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됨으로써 발발 이후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 사후 ===
</ref> 그 실례로 제주 4·3학살피해자의 증언 중에는 우익청년들에게 어린이에 불과한 아들을 잃었다는 증언이 [[한겨레신문]]에 보도된 바 있다. 또한 매 해 4월 3일 같은 날 제사를 하는 제주도민이 상당수였다.<ref>{{웹 인용|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37104|제목="어릴 적 집집마다 같은 날 제사인 것 알고 충격"|날짜=2017-07-01|확인날짜=2018-03-13}}</ref> [[한국전쟁]] 발발 당시 제주도민들은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대한민국 해병대]]에 자원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4&aid=0000048051 6.25 전쟁과 해병대]</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4&aid=0000006656 제주 해병의 날]</ref>
 
그밖에 [[재일 한국인]]들 출신구성을 보면 [[제주도]]출신자가 상당히 많은데, 이는 제주 4·3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다. 당시 군정경찰 및 서북청년단등의 반공 우익단체의 가혹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 이른바 '보트피플'로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지역(주로 [[오사카]]지역)을 피난처로 떠나간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ref>{{뉴스 인용| url =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380385 | 제목 = 그때 오늘‘재일 조선인’ 북송사업이 시작되다 | 출판사 = [[중앙일보]] | date = 2010.-08.-13 | accessdate = 2010-12-18 }}</ref>
 
한편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 회원들은 국가유공자로 남한 정부의 보훈 대상자가 되었고, 남로당 제주도당 수뇌부였던 [[김달삼]]은 사건이 진행 중이던 1948년 8월25일 월북, 국기훈장2급을 수여받았으며, 게릴라부대를 이끌고 남침했다가 50년 3월 정선지역전투에서 사살됐다. [[김달삼]]은 사후 ‘남조선혁명가’의 비문을 받고 평양근교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는데, 이러한 사실은 2000년 3월 평양을 방문했던 [[우근민]] 제주지사에 의해 확인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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