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성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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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에 따르면, [[신라]] 김씨의 시조는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이다. 실제로는 [[법흥왕]] 때부터 중국과의 교류가 증대되면서 대내외적으로 사용하였고, [[636년]]([[선덕여왕]] 5년)에 당나라에서 간행된 《북제서》에 [[진흥왕]]의 성을 김(金)으로 처음으로 기록하였다. 5세기 [[내물왕]] 때 '''석'''씨 세력이 사라지고, '''김'''씨가 집권하였다. 삼국통일 이후 무열왕계인 문무왕의 직계 자손들이 왕위를 세습하였는데, [[혜공왕]] 때 [[무열왕]]계 중에서 [[문무왕]]의 직계혈통의 계보가 끊어졌으며, [[사다함]] 후손이자 내물왕의 10세손인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신라 하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선덕왕이 후사없이 붕어하자 내물왕의 12대손 김경신이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인 김주원을 따돌리고 원성왕으로 즉위했다. 그 이후 경순왕까지 원성왕계가 왕이 되었으므로 현존 신라 김씨는 대부분 [[원성왕]]계 [[김경신]]의 후손이다.
 
신라계 김씨의 분화는 경순왕 이후로 판단된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 조차도 자신을 신라계 김씨로 인식하였을 뿐, 본관에 대해 이렇다 할 언급이 없다(현재 김부식은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 파악되고 있다). 즉, 고려 시대만 하더라도 본관은 출신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후대에 내려오면서 본관 의식이 생겨나고, 본관별 가계도가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일부 신라계 김씨에서 본관의 뿌리를 대보공 김알지나 무열왕, 신무왕 등으로 삼는 경우가 있지만, 계대를 정확하게 고증할고증하기는 수는 없고어렵고, 이는 후대에 자신의 본관 시조로 삼은 것일 뿐이다.<ref>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3/10/15/20131015006857.html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8> 김해김씨(金海金氏)], 세계일보, 2011년 5월 24일. </ref>
 
* '''[[부안 김씨]]'''(扶安 金氏) : 관조(貫祖) [[마의태자|태자]](太子)는 신라 [[경순왕]]과 [[죽방부인]] 소생의 첫째왕자로 [[마의태자|태자]](太子)에 책봉(冊封)되었으며, 후대에 세칭 [[마의태자]]라 부른다. 사서(史書)에 이름은 전하지 않으나, 일부 문헌(文獻)에 김겸용(金謙用) 또는 김일(金鎰)이라 한다. [[935년]](경순왕 9년) 10월 부왕이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하려 하자 불가함을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종묘(宗廟)에 곡을 하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초근목피하며 여생을 마쳤다.<ref>김정현(金丁鉉. 역사저술가):《신라삼성연원보》를 통해 보는 가짜 족보의 실상[[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3&mcate=M1004&nNewsNumb=20150116540&nidx=16541]]</ref> [[마의태자|태자]](太子)의 후예 김경수(金景修)가 고려조에 호장(戶長) 동정(同正)을 역임하고, 그의 아들 김춘(金春)이 나라에 공을 세워 부령부원군(扶寧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김경수'(金景修)를 시조(始祖)로 삼고 부령(扶寧)의 개칭인 [[부안 김씨|부안]](扶安)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시조 김경수의 5세손인 [[김구 (고려)|김구]](金坵)는 문과에 급제하여 우간의대부·지첨의부사·참문학사·판판도사사 등을 지냈으며, 이때부터 후손들이 번성하게 되어 그를 '중시조' 모시고 있다. 주요 인물로는 고려조 호장 김경수, 부령부원군 김춘, 문정공 지포 [[김구 (고려)|김구]], 한산군수 김직손, [[이황]]·[[김인후]]·[[기대승]] 등과 도의 강론하고 도동서원 배향 김계, 유천서원 배향 김굉·김명·농암 김택삼, 창의일문칠절(唱義一門七節) 김익복, 동림서원 배향 김서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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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김씨]]'''(羅州 金氏)) : 시조 '''김운발(金雲發)'''은 신라 [[경순왕]]과 죽방부인의 둘째아들 김황(굉, 범공)의 장남으로, 고려조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수작(授爵)받고 나주군(羅州君)에 봉해졌다. 막내아들 계자(季子) '인륜'(仁輪)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나주 김씨|나주]](羅州)를 관향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후예 '김극순'(金克淳)이 고려조에 안로현주(安老縣主)에 오르면서 비로소 고관대작이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월당(月塘) 김대경(金臺卿)은 [[충숙왕]] 13년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에 올랐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나 '동문선'(東文選)에 이름을 올리고,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함께 나주 안로현(安老縣)으로 유배되어, '금성 김씨'(錦城 金氏) 시조가 되었다. 그의 손자 김정준(金廷雋)은 조선초 전주부윤(全州府尹) 중군총제(中軍摠制)를 역임하였는데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中始祖)로 삼고 있다. 주요 인물로는 조선조 김경석(金景錫){{·}} 김충수(金忠秀){{·}} 김예수(金禮秀)는 무신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는 큰 공적을 세웠으며, 대한민국의 [[김용무]](金用茂), [[김의택]](金義澤), [[김계원]](金桂元) 등이 있다. 또 다른 후예인 '김인충'(金仁忠)은 고려조 좌령랑장(左領郎將)으로 고려가 망하자 [[1403년]](태종 3)경 제주목 애월읍 고내봉 부근 구엄리에 정착하였는데, 후손들이 그를 '제주입도 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주요 인물로는 조선조 김성조(金成祖), 김용호(金用瑚) 등이 있다.
 
* '''[[경주 김씨]]'''(慶州 金氏) :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라 추정하는 '''김명종'''(金鳴鍾)을 파조로 하는 '영분공파'(永芬公派)와 '''김은열'''(金殷說)을 파조로 하는 '은열공파'(殷說公派)가 대표적이다. 또 이외에도 조상에 대한 계통은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시대 무신 '''김순웅'''(金順雄)을 파조로 하는 '장군공파'(將軍公派), 고려시대 문인 '''김인관'''(金仁琯)을 파조로 하는 '태사공파'(太師公派), 고려 말 판도판서 '''김장유'''(金將有)를 파조로 하는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김부식]](金富軾)의 증조부 '''김위영'''(金魏英)을 파조로 하는 '호장공파'(戶長公派) 등이 있다. 이들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10여개의 지파(支派)로 분파되었다. 또 [[구 안동 김씨|구안동]], [[전주 김씨|전주]], [[김녕 김씨|김녕]], [[밀양 김씨|밀양]] 등으로 분관되기도 하였다. 김씨 본관 중에 [[김해 김씨]] 다음으로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다. 주요 인물로는 고려조 [[김인경]](金仁鏡), 조선조 [[김한구]], [[정안왕후]], [[김귀주]], [[정순왕후]], [[김정희]], [[김관주]], 대한제국 때 [[김홍집]], [[김춘희]] [[김도태]], [[김정록]], [[김동훈 (1886년)|김동훈]]등이 있다.<ref>정복규의 한국성씨를 찾아서-경주김씨(慶州金氏)[[http://www.shina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5629]]</ref>
 
*'''[[의성 김씨]]'''(義城 金氏) : 시조 [[김석]](金錫)은 신라 [[경순왕]]과 후비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 왕씨 소생으로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이다. 고려조에서 의성군(義城君)에 책봉되어 후손들이 [[의성 김씨|의성]](義城)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한편 시조 김석(金錫)에 대해 [[경순왕]] 4자설과 5자설이 있으나 고보(古譜) 및 《의성김씨족보(義城金氏族譜)》등에는 경순왕의 4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최근 세보(世譜)인 《신라김씨 2천년사》·《조선씨족통보》·《동국만성보》·《신라김씨분파연원도》등에는 5자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 개국과 함께 후예 김공우(金公瑀)대에 크게 번창하였으며, 주요 인물로는 조선조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 [[김성일]](金誠一), [[김우옹]](金宇顒), 대한제국 [[김창숙]](金昌淑) 등이 있다.<ref>정복규의 한국 성씨를 찾아서-의성김씨(義城金氏)[[http://www.shina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2400]]</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