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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7년]](명종 22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였다. [[1567년]](명종 22년)에 유생이 되어 [[성균관]]에 입학,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하였는데 이때 그는 말과 행동을 번번이 옛 법도에 맞게 하자, 같이 수학하는 이들 혹은 보는 사람들이 그를 보고 더러 웃었지만 그는 변함없이 행동하였다.
 
=== 관료 생활 초반 ===
[[1571년]](선조 4년) 학행으로 천거받아 [[강릉]] [[참봉]](康陵參奉)을 제수되었고, [[1574년]](선조 7년)에는 재행(才行)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뒤 [[형조]][[좌랑]](刑曹佐郞)으로 옮기고, 이후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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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동인]]과 [[서인]]의 갈등으로 [[송응개]](宋應漑)와 [[허봉]](許篈) 등 여러 사람이 [[이이]](李珥)를 탄핵하면서 [[이이]]가 장삼입은 [[승려]](緇髡)가 되었다는 과거를 들멍이면서 비판, 배척하자 그는 이를 두고 이는 군자(君子)가 할 언론(言論)이 아니라며 [[송응개]], [[허봉]] 등을 비판하였다.
 
[[1579년]](선조 12년) 계모상으로 사직하고 3년상을 하였는데, 3년상을 하면서 의절(儀節)을 하나같이 예제(禮制)대로 하였다. 상복을 벗고는 동생 [[홍경신]]과 차마 서로 떠나지 못하고 마침내 3년상을 하던 곳에 집을 짓고 같은 원장(垣墻) 안에서 살았다.

[[1583년]](선조 16년) 여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다가 [[1584년]](선조 17년) [[안산]][[군수]](安山郡守)로 부임하였다. [[안산]][[군수]] 재직 중 지방관 근무성적 고과를 최상(最上)으로 받아 [[수원]][[부사]](水原府使)로 영전하였다. [[1588년]] 수원부사로 있을 때 구황(救荒)의 치적을 쌓아 표창을 받았다.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발생, [[기축옥사]]로 확대되자 그는 평소 겨울 [[정여립]](鄭汝立)과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백유함]](白惟諴) 등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몇 년 동안 집에서 지냈다.
 
그는 [[정여립]]과 가깝게 지냈지만, 정여립의 박학다식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잡서를 많이 읽었다 하여 독서인이라 보기는 힘들다는 의견을 드러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