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가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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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출생과생애 가계초반 ===
==== 출생과 가계 ====
[[1541년]](중종 36년) [[7월 17일]]에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장원서]]장원(掌苑署掌苑)을 지내고 사후 이조참판과 이조판서, 의정부영의정에 거듭 추증된 홍온(洪昷)이고, 어머니는 흥양신씨(興陽申氏)는 [[군수]] 신윤필(申允弼)의 딸이다. [[홍경신]](洪慶臣)은 그의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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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정리한 뒤 머리 빗고 가묘(家廟)에 인사드렸는데, 나중에 나이들어서도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씻고 의관정제 후 가묘에 참배하는 것을 부지런히 하여 하루도 거르고 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제사에는 반드시 친히 찬구(饌具)를 잡고서 직접 하였고, 자제나 하인에게 대신 대행(代行)하게 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두고 그는 "어버이를 섬기고 제사 받드는 일을 어찌 남을 시켜서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 수학과 소년기 ====
어려서 초당 [[허엽]](草堂 許曄)의 문하에 찾아가 글을 배웠다. [[허엽]]의 문하에서 글을 배울 때 한번은 동배(同輩)들과 함께 갔는데, 어느날 마침 퇴계 [[이황]](李滉)이 [[허엽]]을 방문하여 자리에 있다가 그를 가리키며 묻기를, "학생 가운데 몇 번 째 검은 옷을 입은 아이는 누구인가?"하며 한참 동안 주목(注目)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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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년]](선조 29년) [[명나라]] 사신 이종성(李宗誠), 양방형(楊邦亨)이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제후]]로 봉하여 회유하는 일로 조서(詔書)를 가지고 [[조선]]에 왔다. 이때 그가 원접사의 차관(差官)으로 임명되어 접대(接待)업무를 맡아 [[전의현]](全義縣)으로 갔다. 이때 [[관찰사]] 이하 각고을 수령들이 모두 이르러 길목에 열좌(列坐)해 있었다. [[명나라]] 장수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어 군교(軍校)를 풀어 마구 위협하자 여러 수령들이 모두 놀라 도망쳐 숨자, 그는 홀로 무릎을 꿇고 엄숙하게 앉아서 꼼짝하지 않았다. 한 [[명나라]] 관인(官人)이 한참 주시하다 군교를 꾸짖어 물러가게 하고는 지필(紙筆)을 찾아 써서 전하여 보였는데, 그는 [[명나라]] 사신의 장서기(掌書記) 장방달(張邦達)이었다. 장방달은 내가 천하의 선비를 본 것이 많지만 공과 같은 자는 드물다 하고는 인하여 앞으로 와서 무릎을 쓰다듬으며 말하기를, 매번 그렇게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면 고통스럽지 않은가?라고 하며 일으켜세웠다. 이때부터 그는 [[명나라]] 사신들과 끊임없이 왕래하였는데 특히 장방달은 그에게 은근한 정을 나타냈으며, 작별하면서는 예물을 보내 주었다. 장방달은 문장을 잘하고 사람의 관상을 잘 보던 인물이기도 했다 한다.
 
==== 이몽학의 난 ====
그해 가을 [[충청도]]에서 왕족 출신으로 추정되는 [[이몽학]](李夢鶴)이 민심의 동요를 틈타 거병, 어리석은 백성을 꾀어 무리를 이룬 것이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충청도]] 내 여섯개군(郡)을 함락시키고 두 수령을 사로잡은 뒤 경성(京城)으로 향하려 하자 인근지역이 혼란에 빠졌다. 당시 [[홍주목]]의 당시 병력은 수백 명에 불과했는데 성(城)이 작고 낮아서 의논하는 자들이 그에게 성을 버리고 임금에게 가서 근왕(勤王)하기를 권하였다. 그가 탄식하기를 "나라를 지키는 신하는 성곽(城郭)이나 봉강(封疆)에서 죽는 것이 옛날의 제도이다. 내가 명을 받고 이 땅을 지키는데, 급하다고 해서 어찌 떠나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이때 일부 인사들은 그에게 처자를 내보내 피하도록 권하였으나 그는 모두 듣지 않으며 성밖에 있는 자손과 친척을 다 성안으로 불러 모아 문을 닫고는 함께 죽을 뜻을 보이자,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굳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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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궁노]](宮奴)들이 세력을 믿고 강탈(强奪)하며 각 궁에서 소유한 토지인 궁전(宮田)이 있는 곳마다 나타나, 이런저런 요구를 하여 백성들이 살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가 지방관으로 부임할 때는 궁노들이 민폐나 강탈같은 행동을 하면 한결같이 법으로 다스려, 이때부터 궁노들이 두려워 피하면서 그의 임지에는 접근하지 못하였다. 이보다 앞서 그가 [[형조판서]]로 있으면서 불법을 저지른 [[궁노]] 몇 명을 붙잡아 곤장을 쳐서 죽인 일이 있어, 대개 궁노나 향리들이 이를 알고 그를 더욱 꺼렸다.
 
=== 질병과생애 은퇴후반 ===
==== 질병과 은퇴 ====
그는 일찍이 화공(畵工)에게 [[중국]] [[당나라]] [[도연명]](陶淵明, 도잠(陶潛))의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그려달라 부탁하여, 이를 벽에 걸어놓고 아침 저녁으로 눈여겨볼 거리로 삼았었는데, 이때 가을 [[풍병]]에 걸려, 병으로 인해 상소하여 사직을을 청하자 [[선조]]가 이를 허락하였다. 그는 그날부로 바로 [[예성강]](禮成江)에서 배를 타고 [[황해]]를 거쳐 그의 전토가 있는 [[아산]](牙山)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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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이 즉위하자 이후 [[장례원]]정, [[한성부]]우윤 겸 지[[의금부]]사 등을 지냈다. [[광해군]] 즉위 초년에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그는 봉사(封事)를 올려 왕실 외척들과 권귀(權貴)들이 권력을 남용하려 한다며 이들을 물리칠 것을 상소했다가 [[광해군]]의 진노를 사서 크게 견책(譴責)하려고 하였다. 그가 이 소식을 듣고는 '호오(好惡)는 공평하게 하고 직언(直言)을 받아들이라'고 다시 상소문을 올리며 이해를 구하자, [[광해군]]은 이는 특정 당여(黨與)를 옹호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니냐며 그를 의심하였다.
 
==== 광해군 즉위 초반 ====
[[1610년]](광해군 2년) [[9월]] 오현(五賢)의 문묘종사(文廟從祀)가 있었다. 종래 문묘에 모셔 오던 선현들 외에 새로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문묘에 모시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때 5현 종사에서 [[조식]]이 제외되자 [[정인홍]](鄭仁弘)은 사직상소를 올리면서 그는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종사가 부당하다고 말하였다. 도리어 그는 [[이황]]이 스승 [[조식]]을 비난했던 것을 언급하며 스승 조식을 변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