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가신: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83번째 줄:
홍주목사에서 체직되어 떠날 때 행장(行裝)이 쓸쓸하여 집안에 조석 끼닛거리가 없어, [[홍주]] 백성들이 그에게 특별히 [[보리]] 수십 곡(斛)을 보내 주었으나 그는 받지 않다가 굳이 청한 연후에야 1곡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홍주목]]으로 되돌려보냈다. 이때부터 [[선조]]가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1600년]](선조 33년) 첨추(僉樞)에 임명되자 사은(謝恩)하고 부임하였다.
 
얼마 후 [[해주]] [[목사]](海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어느 재상이 선조(選曹)의 한 낭관을 통해 [[해주]]가 근무하기 어려운 험지라고 그에게 귀띔해주었다. 낭관은 재상의 뜻으로 그에게 권하기를, "해주는 여러 왕자(王子)와 귀주(貴主) 12궁(宮)에서 소유한 전장(田庄)이 한 고을 안에 모여 있으니, 이 지역은 수령 노릇 하기가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그러니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귀띔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 신하의 직분(職分)이라 답하고는 결국 [[해주]]로 부임하였다. [[해주]]에 부임하자 아전이 말하기를 근래의 예(例)가 수령이 처음 도임하게 되면 먼저 여러 궁을 찾아뵌 다음 취임합니다 하였지만 그는 따르지 않고 먼저 [[해주]][[목사]]로 부임한 후에 여러 궁을 찾아뵈었다. [[해주]][[목사]] 재직 시 [[향리]]가 말하기를, 전에는 반드시 별도로 여러 궁에 진헌(進獻)하는 물건이 있고, 또 왕자와 의빈(儀賓)을 위로하는 예(禮)를 베풀었다고 하자, 그가 답하기를 "궁궐과 자주 교통하는 것은 사대부(士大夫)의 염치를 해치는 것인데, 더군다나 한 고을의 땅으로 여러 궁을 받들고 군수(軍需)를 바치느라고 백성들의 힘이 탕갈되어 있다. 그런데도 몸을 용납하고 지위를 보전하려는 모습을 보이려고 나는 그런 짓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하였다. 그는 마침내 [[해주]][[목사]]직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직하고 되돌아왔다.
 
[[해주]]에 부임하자 아전이 말하기를 근래의 예(例)가 수령이 처음 도임하게 되면 먼저 여러 궁을 찾아뵌 다음 취임합니다 하였지만 그는 따르지 않고 먼저 [[해주]][[목사]]로 부임한 후에 여러 궁을 찾아뵈었다. [[해주]][[목사]] 재직 시 [[향리]]가 말하기를, 전에는 반드시 별도로 여러 궁에 진헌(進獻)하는 물건이 있고, 또 왕자와 의빈(儀賓)을 위로하는 예(禮)를 베풀었다고 하자, 그가 답하기를 "궁궐과 자주 교통하는 것은 사대부(士大夫)의 염치를 해치는 것인데, 더군다나 한 고을의 땅으로 여러 궁을 받들고 군수(軍需)를 바치느라고 백성들의 힘이 탕갈되어 있다. 그런데도 몸을 용납하고 지위를 보전하려는 모습을 보이려고 나는 그런 짓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하였다. 그는 마침내 [[해주]][[목사]]직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직하고 되돌아왔다.
 
=== 공신 책록 ===
[[1601년]](선조 34년) [[5월]] 행 부호군에 제수되었으며, 공신 녹훈 도감에서 그를 다시 녹훈하고, 서용의 명령이 내려지자 이해 [[5월 21일]] 그는 상소를 올려 도감혁파와 자신의 서용을 취소해줄 것을 청하였지만 선조가 듣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