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타일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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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통령명칭 = 부통령
|출생일 = {{출생일|1790|3|29}}
|출생지 = [[미국]] [[버지니아 주버지니아주]] [[그린웨이]]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862|1|18|1790|3|29}}
|사망지 = [[아메리카 연합국]] [[버지니아 주버지니아주]] [[리치먼드 (버지니아 주버지니아주)|리치먼드]]
|정당 = [[휘그당 (미국)|휘그당]]
|종교 = [[이신론]]<br />[[성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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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일러는 [[1842년]]에 아내가 병으로 죽은 후 [[1844년]] [[백악관]]에 있는 동안 재혼을 했다. 그의 새 신부인 24세의 [[:en:Julia Gardiner Tyler|줄리아 가디너]]는 그보다 나이가 30살이나 적었다. 이 [[결혼]]은 그에게 치명적인 비판의 실마리를 제공했고, 더불어 과도하게 썼던 [[결혼]] 비용에 대해서도 많은 비웃음을 샀다. 이들 부부는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타일러는 두 번의 [[결혼]]으로 모두 열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로써 그는 역대 어떤 대통령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많은 자식을 둔 대통령이 되었다.
 
타일러의 임기 기간 중에 많은 지방들은 훗날에 자신들의 중요한 기호가 되는 것들이 나타났다. 그 예로 [[펜실베이니아 주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는 바쁜 [[철강업]] 도시가 되었고, [[오하이오 주오하이오주]] [[신시내티]]는 잘 포장된 거리들과 6세부터 10세까지의 어린이들을 필요하는 학교들을 자랑하였다.
 
== 초기 생애 ==
[[파일:Letitia Tyler2.jpg|섬네일|왼쪽|첫 부인 레티셔 타일러]]
[[버지니아 주버지니아주]] 찰스 시티 근처에 있는 그린웨이 사유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존 1세는 몇 차례의 주지사를 지냈고, 버지니아 연방 하원의 연설자와 재판관을 지내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존을 윌리엄 앤드 메리 대학교에 보냈다. 어린 타일러는 열심히 공부하였고 특히, 정치적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시를 쓰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공부로부터 휴식하기도 하였다. 17세 때에 졸업하고나서 아버지 아래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1809년]] 버지니아 법정에 수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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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일러는 [[1816년]] [[미국 하원]]의 공석을 위해 입후보하여 쉬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고나서 전임적인 기간에 선출되었다. [[미국 의회]]에서 타일러는 미국 헌법의 엄한 판단을 위하여 싸웠다. 그는 연방 정부의 권력을 넓힌 아무 대책을 반대하였다.
 
[[켄터키 주켄터키주]]의 하원 [[헨리 클레이]]에 의하여 제안된 경제적 계획 아메리칸 시스템을 반대하였다. 계획은 [[도로]]들과 다른 국내적 향상들에 쓰여진 연방금을 늘이고 미국의 제조업자들을 돕는 높은 관세를 청하였다. 타일러는 미국 은행(Bank of the United States)을 탄핵하기도 하였다.
 
[[1821년]] [[1월]] 해친 건강으로 인하여 하원직을 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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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앤드 메리 대학교의 총장을 지내가가 [[1825년]]부터 [[1827년]]까지 버지니아 주지사를 지냈다.
 
[[1827년]]에는 [[미국 상원]]에 선출되었으며, 헌법의 엄한 판단에 그의 유죄들은 그를 어색한 지위에 놓았다. 그는 의회의 무효 법령들에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시도를 비난하였으나, 또한 무효에 대항하는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법령들이 불법이었다는 것을 믿었다. 타일러는 잭슨의 정책에 점점 불만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836년]] 버지니아 입법부는 잭슨을 비난하는 투표를 제거하는 데 투표하도록 타일러를 지시하였다. 타일러는 거부하였고 상원직을 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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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년]] 타일러는 재산에 통나무집을 지으면서 정착자들이 대지의 160 에이커(64.7 헥타르)를 주장하는 데 허락한 우선매수권 법령을 찬성하였다. 이 법률은 [[일리노이]], [[위스콘신]], [[미네소타]]와 [[아이오와]]의 정착을 급속히 진행하였다.
 
타일러는 [[1842년]] [[플로리다]]에서 세미놀레 전쟁을 끝냈다. 같은 해 [[메인 주메인주]]와 [[캐나다]]의 경계에 [[영국]]과의 논쟁은 웹스터 국무부 장관에 의하여 세운 기간들에 정착되었다. 미국은, [[제1차 아편 전쟁]](1840~42년)의 여파로 힘을 잃은 청나라와 [[왕샤 조약]](1844년 7월 3일)을 맺어 불평등한 통상을 개시하였다. 이 조약은 처음으로 [[아시아]]가 미국의 상인들에게 문을 여는 결과를 가져왔다. 같은 해에, 미국 의회는 조선의 문호 개방을 위한 안건도 마련하였으나, 이익이 없다는 이유로 보류되었다.
 
=== 텍사스의 합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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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부인 레티샤가 남편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마비적 타격을 겪었다. [[1842년]] [[9월 10일]] 레티샤 여사가 사망하자, 타일러의 며느리 프리실라 쿠퍼 타일러가 [[1844년]] [[봄]]까지 백악관의 여주인 노릇을 하였다.
 
[[1844년]] [[6월 26일]] [[뉴욕]]에서 전 [[뉴욕 주뉴욕주]] 상원 데이비드 가드너의 딸 줄리아와 결혼하였다. 그래서 그는 재임 기간 중에 결혼한 첫 대통령이 되었다. 줄리아는 8개월 동안 영부인을 지냈고, 자신의 빛나는 대접과 함께 [[워싱턴 D.C.]]를 기쁘게 하였다고 한다.
 
== 이후의 세월 ==
[[파일:John Tyler's grave.JPG|섬네일|왼쪽|[[리치먼드 (버지니아 주버지니아주)|리치먼드]]에 있는 타일러의 묘비]]
휘그당과 민주당 양당원들에게 외면을 받은 타일러는 버지니아 주 찰스 시티 근처에 있는 자신의 사유지 셔우드 포리스트에서 퇴직 생활을 하였다. [[남북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조용히 살았다.
 
[[1861년]] [[2월]]에 그는 합중국을 위협한 논점들에 타협을 찾기 위하여 워싱턴으로 남부 평화 사절단의 우두머리를 이끌었다. 의회는 남부인들의 제안을 거부하였다. [[4월]] 버지니아 분리 회의에서 타일러는 버지니아가 합중국을 탈퇴하는 호의에 투표를 하였다.
 
[[11월]]에 [[남부 연합]] 하원 선거를 우승하였으나 [[1862년]] [[1월 18일]] 자신의 의석을 차지하기 전에 [[리치먼드 (버지니아 주버지니아주)|리치먼드]]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72세.
 
[[1915년]] 의회는 타일러가 자신의 두번째 부인 옆에 안장된 리치먼드의 헐리우드 묘지에 그의 기념비를 봉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