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J. 퍼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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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별명 = 블랙 잭
|태어난 곳 = [[미국]] [[미주리 주미주리주]]
|죽은 곳 = [[미국]] [[워싱턴 D.C.]]
|복무 = [[미국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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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생애 ==
그는 [[미주리 주미주리주]] 라클리드 군에서 사업가인 존 플레처 퍼싱과 전업주부인 앤 엘리자베스 톰슨 부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퍼싱의 이름을 가진 그의 부계 조상들은 18세기 말 이민을 온 독일계 이민자들이었다. 퍼싱의 모친은 잉글랜드계 자손이었다. 그는 또한 다섯 명의 형제 자매들이 있었는데, 동생 제임스 F.(1862–1933)와 워드(1874년), 그리고 누이 동생은 매리 엘리자베스(1864년), 애나 매리(1867–1955), 그리고 그래이스(1896년)가 있었다. 세 명의 다른 자녀는 어릴 때 사망했다.<ref>1872년 루스와 로스 쌍둥이가 사망, 프레드릭은 1876년에 죽었다. Vandiver, v.1, p.6</ref><ref>{{뉴스 인용|author= |agency=[[Associated Press]] |title=Pershing's Sister Dies at 89 |url=http://query.nytimes.com/gst/abstract.html?res=9C01E6D9103AE53BBC4C53DFBE66838E649EDE |quote=Anna May Pershing, a sister of the late General of the Armies John J. Pershing, died yesterday at the age of 89. ... |newspaper=[[뉴욕타임즈]] |date=August 4, 1955 |accessdate=2015-02-06 }}</ref><ref>{{뉴스 인용|author= |coauthors= |title=James F. Pershing Dies At Age Of 71 |url=http://query.nytimes.com/gst/abstract.html?res=990DEEDC1E3AE333A25753C1A9649C946294D6CF |quote=Brother of General Succumbs to Cerebral Thrombosis After a Long Illness. Was President of an Insurance Company. Formerly a Clothing Manufacturer. ...|newspaper=[[뉴욕타임즈]] |date=February 10, 1933 |accessdate=2015-02-07 }}</ref> [[남북전쟁]]이 터졌을 때, 그의 아버지는 군 매점 상인으로 제18 미주리 의용군 보병대에서 일을 했지만, 군대에 직접 복무하지는 않았다.
 
퍼싱은 부유한 가정의 자녀, 조숙한 학생들을 위해 마련된 라클리드에 있는 학교에 입학을 했다. 1878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지의 흑인 아동들을 위한 교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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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에는 소령으로 임명되어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가하였다. 의용군을 이끌고 [[쿠바]] 원정을 떠나서 [[산후안 힐 전투]]에서 활약한다. 1899년부터 1903년까지는 [[미국-필리핀 전쟁]]에 종군하기 위해 필리핀에 가서, 폭동 진압 등의 공적을 세웠다. 또한 [[1901년]]에는 일단 대위로 복귀했다.
 
[[1903년]] 미국으로 돌아온 퍼싱의 눈부신 공적에 보답하기 위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준장 승진을 제안하지만, 군부의 반대에 부딪혀 이것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 후, 육군대학 등을 거쳐 1905년에는 대사관 포함 주재 무관으로 도쿄에 주재하게 된다. 같은 해에는 [[와이오밍 주와이오밍주]] 상원의원 [[프랜시스 F. 워렌]]의 딸과 결혼을 했으며, 이 결혼으로 이후 퍼싱의 경력에 유리하게 작용하게 된다.
 
같은 해 가을에 미국으로 돌아 와서 단숨에 세 계급을 뛰어 넘어 [[준장]]으로 승진하였다. 이것은 군 내부에서도 반감을 샀으며, 군인으로서의 능력보다는 워렌 상원의원의 배경에 의해 승진한 것이라는 야유를 받았다. 그 후, [[발칸반도]] 근무를 거쳐 [[1909년]]부터 [[1912년]]까지 다시 [[필리핀]] [[모로 주]] 총독으로 근무하게 된다. 1912년 9월, [[메이지 일왕]]의 장례식에 참석차 미국 정부 조문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