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교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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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과 교황청 ===
[[파일:Emblem of the Papacy SE.svg|thumb섬네일|upright|교황의 상징인 [[베드로|성 베드로]]의 교차된 천국의 열쇠]]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가톨릭 교계제도]]에서 가장 으뜸은 로마교구의 교구장 주교인 [[교황]]이다. 교황은 로마 주교좌와 온전한 친교를 이루는 [[라틴 교회]]와 [[동방 가톨릭교회]]를 아우르는 가톨릭교회 전체의 영적 지도자이다. 현재 교황은 2013년 3월 13일에 선출된 [[교황 프란치스코|프란치스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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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자 수 통계 ===
[[파일:World Catholic Population.png|thumb섬네일|400px|2010년 나라별 가톨릭 신자 수.<ref name=Pew2011>Hacket, Conrad and Grim, Brian J. [http://www.pewforum.org/files/2011/12/Christianity-fullreport-web.pdf "Global Christianity A Report on the Size and Distribution of the World’s Christian Population"], The Pew Forum on Religion and Public Life, Washington, D.C. December 2011. Accessed June 2014. Note: The Pew methodology produced an estimated world Catholic population of 1.1 Billion in 2010.</ref>
{{범례|#000080|9천만 명~1억 명 이상}}
{{범례|#00008b|7천만 명~9천만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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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례 ==
[[파일:Thebible33.jpg|thumb섬네일|가톨릭교회의 기본적인 종교물인 [[성경]]과 [[십자고상]], [[묵주]].]]
[[파일:Boulogne-Billancourt - Église Notre-Dame - 6.JPG|thumb섬네일|upright|예수 그리스도의 봉헌을 기념하고 재현하는 장소이자 경신례의 중심인 [[제단|제대]].]]
 
《한국 가톨릭 전례사전》은 전례에 대해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며 하느님 백성인 교회가 거행하는 공적 경배로서 행위로 드러내는 기도이며 그리스도와 그분 교회의 기도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교황 비오 12세]]는 회칙 《하느님의 중개자》(Mediator Dei)에서 “전례는 우리 구세주께서 교회의 머리로서 아버지께 드리는 공적 경배인 동시에 신도들의 공동체가 공동체의 창설자께 바치는 공적 경배이며 그분을 통해 아버지께 바치는 공적 경배이다. 간단히 말해 전례는 머리와 지체가 하나 되어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의해 봉헌되는 경배이다.”(20항)라고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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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방 전례 양식 ===
[[파일:Jan_Babjak_SJ.jpg|thumb섬네일|left|[[그리스 가톨릭교회]]의 주교가 집전한 [[성찬예배 (동방 교회)|성찬예배]]]]
동방 가톨릭교회에 속한 지역 교회들의 전례 양식들은 종류가 매우 다양하며, 개중에는 동방 정교회나 기타 동방 기독교 종파들의 전례와 비슷하거나 완전히 동일한 것도 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동방 가톨릭교회들은 동방 기독교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교황과 온전히 일치하여 친교를 이루고 있으며, 이를 절대로 깨트리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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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위일체 ===
{{참고|삼위일체}}
[[파일:Cristo crucificado.jpg|thumb섬네일|[[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가톨릭교회는 [[하느님]](또는 천주)은 한 분이지만 세 가지 위격을 지녔다고 믿는다. [[삼위일체]]는, 유일신이자 창조주인 하느님이 서로 구분되면서 완전히 동등한 삼위이며 친밀한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고 있음을 말한다. 삼위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다. 가톨릭교회가 고백하는 삼위일체 신앙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께서는 세 분이 아니라 세 위격이신 한 분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세 위격은 서로 실제적으로 구분되지만 오직 하나의 본성, 하나의 실체이시다. 성부의 위격이 다르고 성자의 위격이 다르고 성령의 위격이 다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은 하나이고, 그 영광은 동일하고, 그 위엄은 다 같이 영원하다.” 가톨릭 신자들은 기도를 바칠 때에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에게 바친다.<ref>《한국 천주교 예비신자 교리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p88-9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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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심판 ===
[[파일:Michelangelo Buonarroti - Jugement dernier.jpg|thumb섬네일|[[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가톨릭교회에서는 사람은 누구나 죽은 후에 곧바로 하느님으로부터 개별적으로 심판([[사심판]])을 받게 된다고 가르친다.<ref>《가톨릭교회 교리서》 1021-1022항.</ref> 교회는 또한 언젠가 그리스도가 산 이와 죽은 이를 막론하고 모든 인류에 대한 보편적 심판을 거행할 날이 도래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세상 종말에 이르러 우주적 이변이 발생하는 가운데 그리스도가 천상 세계로부터 이 땅에 재림하여 [[공심판]](최후의 심판)을 거행함으로써 인류 역사는 종식되고 하느님의 정의로운 통치를 받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이라고 한다. 그 때에 죽었던 사람들은 부활하여 분리되었던 영혼과 육신이 재결합하고,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들과 함께 심판자 그리스도로부터 심판을 받는데, 의인들은 천국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고 악인들은 지옥에서 영원한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ref>박도식, 《천주교 주요 교리》, 70항.</ref> 각자의 심판 기준은 [[마태오 복음서]]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가 세상에 알려 준 사랑의 법을 어떻게 실천했는가에 따른다.<ref>마태 25,35–36.</ref> 특히 그리스도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고 강조하였다.<ref>마태 7,21.</ref> 공심판이 언제 일어날 지에 대해서는 성부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ref>마르 13,3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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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모 마리아 ===
[[파일:Sassoferrato_-_Jungfrun_i_b%C3%B6n.jpg|right|thumb섬네일|upright|[[조반니 바티스타 살비 다 사소페라토|사소페라토]]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본문|마리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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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파일:Perugino - Entrega de las llaves a San Pedro (Capilla Sixtina, 1481-82).jpg|thumb섬네일|[[피에트로 페루지노]]가 [[시스티나 경당]]의 벽화로 그린 작품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베드로|성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가톨릭 전승과 교리에 의하면, 가톨릭교회는 1세기경 [[로마 제국]] 치하의 [[유데아 (로마 속주)|유데아 속주]]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설립한 유일한 참 교회이다.<ref>{{웹 인용|url=http://mobile.catholic.or.kr/web/doctrine/?flag=1&seq=6453 |work=가톨릭교회 교리서 |title= 제4단락 그리스도 신자: 성직자, 평신도, 봉헌 생활자 |publisher=Vatican.va |accessdate=2013년 3월 12일}}<p>{{웹 인용|url=http://www.princeton.edu/~achaney/tmve/wiki100k/docs/Sacraments_of_the_Catholic_Church.html |title=Sacraments of the Catholic Church |publisher=Princeton.edu |accessdate=2013년 3월 12일}}<p>{{웹 인용|url=http://www.orthodoxresearchinstitute.org/articles/pastoral/church_membership.htm |title=Church Membership |publisher=Orthodoxresearchinstitute.org |accessdate=2013년 3월 12일}}<p>{{웹 인용|url=http://www.ewtn.com/faith/teachings/chura5.htm|title=Basic Catholic Catechism;The Church and Salvation|author=Most, Fr. William G.|publisher=Eternal Word Network Television|year=1990|accessdate=2013년 12월 12일}}</ref> 신약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과 가르침 그리고 [[열두 사도]]에 대한 그리스도의 약속과 그들에게 지시한 과업 등이 기록되어 있다.<ref name="Kreeft98O">Kreeft, p. 980.</ref><ref name=bokenkotter30>Bokenkotter, p. 3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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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는 [[성령강림주일|성령 강림 대축일]]에 성령이 내려와 사도들에게 임한 사건(사도 2,1)이 가톨릭교회의 공적인 사목 활동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가르치고 있다.<ref name=autogenerated8>Barry, p. 46.</ref>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연속선상에 있다. 가톨릭교회는 또한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마태 16,13-20)에 의해 그리스도가 사도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을 자신의 지상 교회의 머리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이 바로 [[로마]]의 주교, 즉 [[교황]]이다.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사도 전승]]이라고 부른다.
=== 로마 제국 시대 ===
[[파일:Jean-Léon Gérôme - The Christian Martyrs' Last Prayer - Walters 37113.jpg|thumb섬네일|220px|left|[[장레옹 제롬]]의 '''기독교 순교자들의 마지막 기도'''.]]
 
서기 30년경, [[예루살렘]]에서 생긴 교회가 활동을 시작할 당시, 로마 제국의 전반적인 상황은 새로운 사상의 전파가 가능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제국 전역에 세워진 수많은 도로망과 수로는 빠르고 편리한 이동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 제국에 의한 평화) 덕분에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의 문화는 생각과 사고방식을 쉽게 표현하며, 이를 다른 사람이 쉽게 이해하도록 설명하는 그리스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로마 제국은 이러한 문화를 널리 보급하는데 힘을 기울였다.<ref name=macculloch155and164>MacCulloch, ''Christianity'', pp. 155–159, 164.</ref> 그러나 기독교는 유대교와 더불어 로마 제국 내의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황제 숭배를 포함하여 다른 신들을 [[우상숭배]]로 판단하여 숭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은 비기독교적 종교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공적 생활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 제국 당국과 비그리스도인들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신들의 분노를 불러 올 것이며, 결국 제국의 평화와 번영을 위협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실제로 전염병, 기근, 홍수, 야만족 침입 등의 재난이 발생하자 기독교 반대 세력은 기독교 때문에 신들이 벌을 내린 것이라면서 군중을 선동하기도 했다. 또한, 로마 황제들은 로마 제국의 정치·사회적 혼란기를 맞으면서 종교적 기반을 토대로 제국의 쇄신과 내적 강화를 꾀했는데 황제 숭배 같은 국가종교 예배가 국가에 대한 충성의 시금석으로 강조될수록 이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의 적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로마 제국은 기독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 정책을 펼쳤으며, 이는 4세기에 기독교가 합법화되기까지 지속되었다.<ref name=macculloch155and164>MacCulloch, ''Christianity'', pp. 155–159, 164.</ref> 특히 64년 7월 19일 [[로마 대화재]]가 일어난 후 그리스도인들이 화재를 일으켰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당시 로마에 거주한 많은 그리스도인이 방화범으로 몰려 4년 간 처형되었다. 이 시기에 [[베드로]]와 [[파울로스|바오로]]도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파일:Nicaea icon.jpg|thumb섬네일|[[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와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에 참석한 [[교부]]들의 모습을 묘사한 이콘.]]
 
312년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는 로마 제국의 패권을 놓고 [[막센티우스]]와 다투게 되었다.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던 콘스탄티누스 1세는 [[테베레 강]] [[밀비오 다리]]에서 결정적인 전투를 치르게 되는데 전투가 시작되기 전 그가 그리스도인들의 신에게 기도하면서 도움을 청했을 때, 공중에서 빛나는 십자가와 ‘이것을 가지고 승리하라’는 문구를 보았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키(Χ)와 로(Ρ)로된 군기를 만들어 가지고 싸워 승리했다고 한다. 이 밀비오 전투의 승리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제국의 주인이 됐고 그리스도를 수호신으로 숭배하게 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catholictimes.org/view.aspx?AID=175133&ACID=44&S=|제목=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17) 콘스탄티누스의 개종|날짜=2001-04-22|출판사=가톨릭신문|확인날짜=2012-4-29|저자=김상재 기자}}</ref>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법적으로 공인하여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였으며,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테살로니카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였다. 이로써 300년 간의 혹독한 박해를 이겨낸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가교회]]가 됐다.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는 광범위한 복음전파와 함께 대중의 대량 입교로 인해 양적으로 성장했다. [[초기 7대 세계 공의회]] 시기에 부각된 [[로마 교구|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콘스탄티노폴리스]], [[안티오키아 그리스 정교회|안티오키아]], [[예루살렘 그리스 정교회|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그리스 정교회|알렉산드리아]] 등 다섯 [[주교좌]]는 6세기 중엽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에 의해 [[펜타르키아]]가 성립되면서 공식적으로 정리되었다.<ref name="Valliere2012">Paul Valliere, [http://books.google.com/books?id=Qrt3Z7fyzlUC&pg=PA92&dq=Justinian+pentarchy&hl=en&sa=X&ei=QYexUuLQDsiS7Qa26oC4BA&ved=0CE4Q6AEwBg#v=onepage&q=Justinian%20pentarchy&f=false ''Conciliaris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ISBN|978-1-107-01574-6}}), p. 92</ref><ref name="Bartholomew2008">Patriarch Bartholomew, [http://books.google.com/books?id=4_UB3_UpIcQC&pg=PA3&dq=Justinian+pentarchy&hl=en&sa=X&ei=iouxUuumMZCBhAf84oCAAg&ved=0CDUQ6AEwATgU#v=onepage&q=Justinian%20pentarchy&f=false ''Encountering the Mystery''] (Random House 2008 {{ISBN|978-0-385-52561-9}}), p. 3</ref> 특히 로마는 기독교 공동체 박해의 주무대였으며,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의 순교지라는 특수한 의미와 배경 때문에 초대 교회 때부터 일치의 기준이었고 가시적인 정점으로서 다른 주교좌들에 비해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로마는 종종 스승처럼 다른 지역 교회와 공동체의 문제에 가르침을 내렸다. 한 예로, [[교황 클레멘스 1세|클레멘스 1세]]가 코린토스 교회의 내부 분쟁에 직접 개입했다는 사실은 로마 주교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려준다. 당시 지역 공동체 지도자들은 로마를 방문해 로마 공동체와의 일치를 확인하고 보장받곤 했다.<ref>{{웹 인용|url=http://www.catholictimes.org/view.aspx?AID=171117&ACID=44&S=|제목=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8) 로마교회의 기원|날짜=2001-01-14|출판사=가톨릭신문|확인날짜=2012-4-29|저자=박영호 기자}}</ref>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티누스 1세가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오늘날의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좌를 로마 주교좌에 이어 교회 내 서열 2위의 위치로 격상하는 교회법을 제정하여 이에 대한 법적 유효성 논쟁이 벌어졌다.<ref name=Michalopulos>George C. Michalopulos,[http://www.aoiusa.org/canon-28-and-eastern-papalism-cause-or-effect/ "Canon 28 and Eastern Papalism: Cause or Effect?"] {{웨이백|url=http://www.aoiusa.org/canon-28-and-eastern-papalism-cause-or-effect/ |date=20130110112941 }}</ref> 한편, 350년경부터 500년경에 거쳐 더는 제국의 수도가 아닌 로마의 주교인 교황들이 끊임없이 영향력을 확대해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ref name="ReferenceA">"Rome (early Christian)." Cross, F. L., ed.,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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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5년 이슬람교 국가인 [[셀주크 왕조|셀주크 튀르크]]의 계속된 침략에 시달리던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때마침 637년부터 성지라고도 불리는 팔레스티나 지역은 이슬람 세력권 아래 들어가 있어서 그 지역 기독교 주민들의 생활이나 성지 순례에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셀주크 튀르크가 점령한 이후부터는 성지 순례가 어려워졌고 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르바노 2세는 위기에 처한 동로마 제국을 군사적으로 원조하고, 기독교 성지를 회복한다는 대의명문 아래 서방의 기독교 군주들이 [[십자군]] 원정을 떠날 것을 호소하였다.<ref name="Bokenkotter140">Bokenkotter, pp. 140–141</ref> 이리하여 11세기 말부터 13세기까지 근 200여 년 동안 8차례에 걸쳐 십자군 원정이 실행되었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기도 했으나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한편 11세기에는 교황의 권위 허용 범위를 놓고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 간에 갈등이 빚어졌는데,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하여 [[라틴 제국]]을 세우면서 동서 교회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어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파일:Chapelle sixtine plafond.jpg|thumb섬네일|upright=1.25|르네상스 황금기의 대표작인 [[미켈란젤로]]의 '''천지 창조'''.]]
13세기 초에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에 의해 [[탁발 수도회]]가 등장하였다. 탁발 수도회들이 세운 학교들은 훗날 유럽의 유명한 대학들의 모태가 되는 교회 학교 및 왕립 학교들이 되었으며, 교회는 이들 학교를 통해 교육계를 후원하였다.<ref>Woods, pp. 44–48</ref>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수많은 스콜라 신학자 및 철학자들이 이들 탁발 수도회들이 세운 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또한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주장 원리를 기독교 교리와 종합한 지적 산물이었다.<ref>Bokenkotter, pp. 158–15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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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8년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재일치를 위해 [[피렌체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사이에 주요 교리 논쟁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ref>{{서적 인용|title=Constantinople and the West|last=Geanakoplos|first=Deno John|publisher=University of Wisconsin Press|location=Madison, WI|ISBN=0229118800}}</ref> 최종적으로는 동방 교회 측이 서방 교회 측의 입장을 대부분 접수하였으나,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함락됨으로써 그 효력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이후 몇몇 동방 교회들이 로마 가톨릭교회에 귀일하였는데, 이들을 [[동방 가톨릭교회]]라고 부른다.
=== 개신교의 출현 ===
[[파일:Religion_Overthrowing_Heresy_and_Hatred_Legros.jpg|thumb섬네일|upright|[[제수 성당]]에 전시된 피에르 르 그로의 '''증오와 이단을 타도하는 교회'''. 십자가와 벼락을 쥐고 있는 젊은 여인은 교회를, 늙은 여자는 증오를, 아래의 늙은 남자는 이단을 상징한다. 그리고 여인 옆에 있는 아기 천사가 찢는 책은 츠빙글리의 것이고, 늙은 남자 아래에 깔려 있는 책에는 마르틴 루터의 이름이 적혀 있다고 한다.]]
1517년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가 몇몇 주교들에게 [[95개조 반박문]]을 작성, 동봉하여 보냈다.<ref name="Bokenkotter215">Bokenkotter, p. 215</ref> 반박문에서 루터는 [[대사 (가톨릭)|대사]]의 특전 등 가톨릭교회의 교리들을 공격하였다.<ref name="Bokenkotter215"/><ref name="Vidmar184">Vidmar, p. 184.</ref> 스위스에서는 [[울리히 츠빙글리]]와 [[장 칼뱅]] 등이 등장하여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독자적인 신학 노선이 유럽 안에 퍼져갔는데, 이러한 운동을 소위 [[종교 개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ref name="Bokenkotter223">Bokenkotter, pp. 223–224</ref> [[잉글랜드 종교 개혁]]은 [[헨리 8세]] 치세에 정치적 분쟁으로 촉발되었다. 헨리 8세는 교황에게 당시 왕비였던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 맺어진 혼인을 무효화해달라는 요구를 했으나 거절당하자, [[수장령]]을 선포하여 자신이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하였다.<ref name="Bokenkotter235">Bokenkotter, pp. 235–23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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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수립된 동유럽의 공산주의 정부들은 종교적 자유를 심하게 제한하였다.<ref name="communist">{{뉴스 인용|title=Pope Stared Down Communism in Homeland&nbsp;– and Won|publisher=CBC 뉴스|date=2005년 4월|url=http://www.cbc.ca/news/obit/pope/communism_homeland.html|accessdate=2008년 1월 31일|deadurl=예|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71223141702/http://www.cbc.ca/news/obit/pope/communism_homeland.html|보존날짜=2007년 12월 23일}}</ref> 비록 일부 사제들이 굴복하여 공산주의 체제에 협력하기는 했지만,<ref>{{뉴스 인용|last=Smith|first=Craig|title=In Poland, New Wave of Charges Against Clerics|work=뉴욕 타임즈|date= 2007년 1월 10일|url=http://www.nytimes.com/2007/01/10/world/europe/10poland.html|accessdate=2008년 5월 23일}}</ref> 대다수 사제들은 투옥되거나 추방당했으며 심지어는 처형당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가톨릭교회는 [[동유럽 혁명|동유럽 공산주의권의 몰락]]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ref>{{웹 인용|url=http://www.thetablet.co.uk/article/14023 |title=Untold story of 1989 |publisher=타블렛 |accessdate= 2010년 10월 28일}}</ref> 1949년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원들은 모든 외국인 선교사를 추방하였다.<ref name="Bokenkotter357">Bokenkotter, pp. 356–358</ref> 그리고 새로 수립된 중국 공산 정부는 1957년 7월 [[중국천주교애국회]]를 만들어 성좌의 승인 없이 일방적으로 주교들을 직접 서품함으로써 로마와 결별을 고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bbc.co.uk/1/hi/world/asia-pacific/7005927.stm |title=China installs Pope-backed bishop |publisher=BBC News |date=22007년 9월 21일 |accessdate=2010년 10월 28일}}</ref> 1960년대 일어난 [[문화 대혁명]]은 모든 종교 시설의 폐쇄를 초래하였다. 이후 중국의 성당들은 중국천주교애국회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면서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이때부터 중국 정부와 중국천주교애국회의 방침을 거부하고 베드로좌와 일치하려는 성직자들과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지하로 숨어들게 되었다.<ref>Chadwick, p.259</ref>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
[[파일:Second Vatican Council by Lothar Wolleh 007.jpg|thumb섬네일|[[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의 모습.]]
 
[[트리엔트 공의회]]가 폐막한 지 4세기 만인 1963년에 소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교회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교황 요한 23세]]의 요청으로 소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미사를 라틴어 뿐만 아니라 각 나라의 언어로 봉헌하는 것을 허용하고, 평신도들도 적극적으로, 의식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현대화하였다.<ref>{{웹 인용|url=http://info.catholic.or.kr/concil/view.asp?kid=1 |title=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거룩한 공의회》 |publisher=Vatican.va |date=1963년 12월 4일 |accessdate=2012년 1월 12일}}</ref>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와 현대 세계와의 대화([[아조르나멘토]])를 목표로 한 획기적인 공의회로서,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창문이 활짝 열렸다’고 표현하였다.<ref name="Duffy272">Duffy, pp. 270–276</ref>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는 전례의 개정 뿐만 아니라 다른 기독교 교파들과의 [[교회 일치 운동]]에 착수하였으며,<ref>Duffy, ''Saints and Sinners'' (1997), p. 272, p. 274</ref> 다른 종교들, 특히 [[유대교]]와의 관계 개선에 나서게 되었다.<ref name="NOSTRA AETATE">교황 바오로 6세, [http://info.catholic.or.kr/concil/view.asp?kid=15&seq=4584&level1=16&level2=0&level3=0&level4=4&level5=0&level6=0&level7=&lang=ko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우리 시대》(Nostra Aetate)]. 1965년 10월 28일. 2011년 6월 16일 확인. 4. 유다교 : “비록 유다인 지도자들과 그 추종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강요하였지만, 당시에 살고 있던 모든 유다인에게 그리스도 수난의 책임을 차별 없이 지우거나 오늘날의 유다인들에게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교회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임에는 틀림없으나, 마치 성경의 귀결이듯이, 유다인들을 하느님께 버림받고 저주받은 백성인 것처럼 표현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교리를 가르치고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에 복음의 진리와 그리스도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을 가르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