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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는 신행정 제도인 [[사두 체제]]를 만들었다.<ref name="B1">Bury, 1923,[http://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secondary/BURLAT/1*.html#1 1]}}</ref> 그는 자신과 같은 공동 황제를 두어 [[아우구스투스 (호칭)|아우구스투스]]라 칭하였다. 공동 황제는 각자 젊은 후계자인 [[카이사르 (호칭)|부제]]를 두어 규칙에 따라 양위할 수 있게 했으나 실제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밀리아누스]]가 퇴위하자 이 사두 체제는 무너졌고,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사두 체제 대신 황제 세습 원칙을 세웠다.<ref name="BG">{{백과사전 인용|제목=Byzantine Empire|백과사전=Encyclopaedia Britannica}}<br />* Gibbon, 1906, II, [http://olldownload.libertyfund.org/Texts/Gibbon0105/DeclineAndFall/Vol02/PDFs/0214-02_Pt06_Chap14.pdf 200] {{웨이백|url=http://olldownload.libertyfund.org/Texts/Gibbon0105/DeclineAndFall/Vol02/PDFs/0214-02_Pt06_Chap14.pdf |date=20070614070910 }}</ref>
 
[[파일:Constantine Musei Capitolini.jpg|150px|thumb섬네일|[[콘스탄티누스 1세]].]]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수도를 옮기면서 사회와 종교 체제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다.<ref name="G168">Gibbon, 1906, III, [http://olldownload.libertyfund.org/Texts/Gibbon0105/DeclineAndFall/Vol03/PDFs/0214-03_Pt04_Chap18.pdf 168] {{웨이백|url=http://olldownload.libertyfund.org/Texts/Gibbon0105/DeclineAndFall/Vol03/PDFs/0214-03_Pt04_Chap18.pdf |date=20070614070902 }}</ref> 기원후 330년 그는 옛 그리스의 [[비잔티움]]을 2번째 로마로 삼아 천도를 단행하였으며 이 도시를 자신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개명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방과 서방 간 교역로에 위치한 요충지였다. 그리고 천도와 함께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도입한 행정 개혁을 다시 개선하였다.<ref name="BE">Bury, 1923, [http://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secondary/BURLAT/1*.html#1 1]}}<br />*Esler, 2000, p.1081.</ref> 그는 화폐(그가 도입한 [[솔리두스]] 금화는 매우 가치있고 바뀌어 달라지지 아니하고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통화]]였다<ref name="E1081">Esler, 2000, p.1081.</ref>)를 안정시켰고 군사 조직을 개혁하였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제국은 상당한 군사력을 회복하였고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또한, 이 시대에 [[기독교]]는 더는 국가에 박해받지 않았으며 황제가 관대한 특전을 베풀어서 황실의 비호를 받았다. 새로운 종교의 통일된 교리를 정하고자 [[공의회]]를 소집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를]]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했고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황제가 교회의 수장이라는 주장을 반영하였다.<ref name="B163">Bury, 1923, [http://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secondary/BURLAT/2*.html#5 163]</ref>
533년 황제가 [[북아프리카]] 구 속주의 [[반달족]]을 축출하게 [[벨리사리우스]] 장군과 군대 15,000명을 파견하면서 서방 정복이 시작되었다. 이 사람들은 경이로울 정도로 쉽게 승리했으나 548년이 되어서야 주요 독립 부족들을 복종시켰다.<ref name="Ev" /> 이탈리아 [[동고트 왕국]]에서 [[테오도리크]] 대왕이 죽고 그 사람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아탈라리크]]와 대왕의 딸 [[아말라순타]]는 권력이 약한 [[테오다하드]]를 왕위에 올렸다. 535년 소규모 로마 제국 원정대가 [[시칠리아]]로 파견되어 손쉽게 승리하였으나 고트족의 저항이 커졌으며, 벨리사리우스가 로마와 [[나폴리]]를 포위하여 함락하고 [[라벤나]]를 수복한 540년에야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ref name="B180-216">Bury, 1923, [http://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secondary/BURLAT/18C*.html 180–216]</ref>
 
[[파일:LocationByzantineEmpire.png|upright|thumb섬네일|left|250 px|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비잔티움 제국의 판도.]]
 
그러나 546년 12월 17일 동고트족은 [[토틸라]]의 지휘 아래 이내 규합하여 로마를 함락하였다. 549년 초 벨리사리우스는 결국 소환되었다.<ref name="B236-258">Bury, 1923, [http://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secondary/BURLAT/19B*.html 236–258]</ref> 뒤이어 551년 말 아르메니아인 [[환관]] [[나르세스]]가 군대 35,000여 명을 이끌고 고트족을 물리쳤다. 토틸라는 [[부스타 갈로룸 전투]]에서 패사하였다. 그 사람을 계승한 [[테이아스]]도 552년 10월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에서 패하였다. 일부 고트족 부대가 계속 저항하였고 [[프랑크족]]과 [[알레마니족]]이 침입하였으나 이탈리아에서 전쟁은 결국 일단락되었다.<ref name="B259-281">Bury, 1923, [http://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secondary/BURLAT/19C*.html 259–281]</ref> 551년 [[히스파니아]]의 [[서고트족]] 귀족 [[아타나길드]]는 왕에 반역하고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도와달라고 청했다. 황제는 늙었지만, 훌륭한 군 사령관 리베리우스에게 군대를 주어 파견하여 로마 제국은 [[헤라클레이오스]] 시대까지 [[스파니아]](Spania)의 일부 지역을 점유했다.<ref name="B86-288">Bury, 1923, [http://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secondary/BURLAT/19D*.html 286–288]</ref>
[[포카스]]가 마우리키우스를 죽이자 페르시아의 호스로우는 이를 구실로 로마령 [[메소포타미아]] 속주를 침공했다.<ref>{{harvnb|Foss|1975|p=722}}.</ref> 포카스는 로마 사료에서도 줄곧 '폭군'으로 묘사될 정도로 인기가 없는 지배자였으며 원로원에서는 포카스를 목표해 줄곧 심모했다. 610년에 포카스는 [[카르타고]]에서 뱃머리에 이콘을 붙인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온 [[헤라클레이오스]]에게 결국 폐위된다.<ref>{{harvnb|Haldon|1990|p=41}}; {{harvnb|Speck|1984|p=178}}.</ref> 헤라클레이오스가 즉위하자 사산 왕조는 소아시아로 깊숙히 쳐들어왔으며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십자가]]를 [[크테시폰]]으로 가져갔다.<ref>{{harvnb|Haldon|1990|pp=42–43}}.</ref> 헤라클레이오스가 한 반격은 성전으로서 성격을 띄며, 기독의 [[아케이로포이에토스]] 성상이 군기로 쓰였다.<ref>{{harvnb|Grabar|1984|p=37}}; {{harvnb|Cameron|1979|p=23}}.</ref> (626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아바르족]]을 무찌를 때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오스 1세|세르기오스 1세 총대주교]]가 성모 성상을 들고 수도 성벽을 돌았던 덕으로 간주됐다.)<ref>{{harvnb|Cameron|1979|pp=5–6, 20–22}}.</ref> 사산 왕조의 주요 군대는 627년 [[니네베 전투 (627년)|니네베]]에서 궤멸되었고 629년에 헤라클레이오스는 성십자가를 되찾아 엄숙한 의식을 치르며 예루살렘으로 다시 옮겼다.<ref>{{harvnb|Haldon|1990|p=46}}; {{harvnb|Baynes|1912}}, ''passim''; {{harvnb|Speck|1984|p=178}}.</ref> 이 전쟁으로 양 제국 모두 국력을 소진한 후 발흥한 [[무슬림의 정복|아랍 무슬림 군대]]의 침공에 무력하게 되었다.<ref>{{harvnb|Foss|1975|pp=746–747}}.</ref> 로마인은 636년 [[야르무크 전투]]에서 아랍인에게 대패했고 634년에 크테시폰이 함락된다.<ref>{{harvnb|Haldon|1990|p=50}}.</ref>
 
[[파일:Byzantiumby650AD.svg|thumb섬네일|left|350px|650년의 로마 제국. 이 해에 제국은 [[카르타고 관구]]를 제외한 나머지 남부 속주를 전부 잃었다.]]
 
이제 아랍인은 시리아와 레반트를 확고히 장악했고 아나톨리아도 곧잘 급습했으며 674년에서 678년에는 심지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전투 (674년)|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도 공성전을 벌였다. 로마 제국은 [[그리스의 불]] 덕분에 아랍 함대를 무찔렀고 [[우마위야 왕조]]와 30년간 휴전 조약을 조인했으나<ref>{{harvnb|Haldon|1990|pp=61–62}}.</ref> 아나톨리아 공격은 계속됐고 고전기의 도시 문화는 가파르게 쇠퇴했으며, 여러 도시민들은 구 도시 성곽 내의 더욱 좁은 지역을 재요새화하거나 주변 요새로 아예 이주했다.<ref>{{harvnb|Haldon|1990|pp=102–114}}.</ref>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도시 규모도 상당히 줄었는데 618년에 이집트를 페르시아인에게 빼앗기면서 자유롭게 이용할 곡물 생산지를 잃자 인구 500,000여 명에서 겨우 40,000여 명에서 70,000여 명으로 줄었다. (629년에 이집트 속주를 되찾았으나 642년에 아랍인의 침공으로 다시 잃었다)<ref>{{harvnb|Wickham|2009|p=260}}.</ref> 구 반자치 수준의 공공 제도가 무너지면서 들어선 [[테마 제도]]에 따라 아나톨리아를 각 군대가 담당한 '속주'로 분할하여 민간 업무를 담당하고 제국 행정에 직접 관리받게 되었다. 테마 제도는 헤라클레이오스가 임시변통으로 마련한 방책에서 기원했으나 7세기에 이 제도는 제국 행정의 새로운 제도로 자리 잡는다.<ref>{{harvnb|Haldon|1990|pp=208–215}}; {{harvnb|Kaegi|2003|pp=236, 283}}.</ref>
 
[[파일:Greekfire-madridskylitzes1.jpg|thumb섬네일|[[그리스의 불]]은 로마 제국과 아랍인 간 전쟁기에 로마 [[비잔티움 제국 해군|제국 해군]]이 처음으로 썼다. ([[마드리드]] [[스페인 국립 도서관]], [[마드리드 스킬리체스]])]]
 
페르시아와 뒤이어 아랍 세력을 막으려고 발칸 반도에서 상당한 병력을 빼내 오다 보니 [[슬라브족]]이 발칸 반도 남쪽까지 세력을 점차 확장했고 아나톨리아에서는 여러 도시가 소규모 요새지로 전락했다.<ref>{{harvnb|Haldon|1990|pp=43–45, 66, 114–115}}.</ref> 670년대에 [[불가리아인]]이 [[하자르]] 때문에 도나우 강 이남으로 밀려왔고 680년에는 새로이 생긴 불가리아 정착지들을 해산하려고 파견된 로마 군대가 패배했다. 이듬해 [[콘스탄티노스 4세]]는 불가리아의 [[아스파루크]] 칸과 조약을 조인해 과거엔 명목상이나마 로마 제국의 지배를 인정하던 수많은 슬라브 부족이 새로이 생긴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지배권하로 넘어갔다.<ref>{{harvnb|Haldon|1990|pp=66–67}}.</ref> 687년~688년에 [[유스티니아노스 2세]] 황제는 슬라브와 불가리아에 원정을 단행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트라키아]]에서 [[마케도니아 지방|마케도니아]]까지 그 사람이 어렵게 싸우면서 로마의 패권이 발칸 북부에서 예전같지 못한 사정을 현로했다.<ref>{{harvnb|Haldon|1990|p=71}}.</ref>
==== 이사우리아인 왕조에서 바실레이오스 1세 즉위까지 ====
 
[[파일:ByzantineEmpire717+extrainfo+themes.PNG|thumb섬네일|350px|레온 3세 시대의 로마 제국. 717년경. 줄이 그어진 지역은 아랍에 침공받던 곳을 나타낸다.]]
 
이사우리아인 [[레오 3세 (비잔티움 제국)|레온 3세]] 황제는 718년에 무슬림에게 반격을 개시하여 주로 테르벨 칸이 도와준 덕에 그 사람의 군대로 아랍인 32,000여 명을 죽였다. 레온은 소아시아의 테마를 공고히 재조직하는 작업에 본격으로 돌입했다. 후계자 [[콘스탄티노스 5세]]는 시리아 북부에서 대승하고 불가리아의 힘을 크게 약화시켰다.
==== 무슬림과 제국의 전쟁 ====
 
[[파일:ByzantineEmpire867AD4 ko.svg|thumb섬네일|upright=1.4|867년 로마 제국]]
867년에 로마 제국은 동부와 서부 양방에서 구 위상을 회복했으며, 제국 방어하는 군사 구조 효율성 덕분에 황제들은 동방 재정복 전쟁을 개시할 수 있었다.
 
==== 불가리아와 제국 간 전쟁 ====
 
[[파일:Basilios II.jpg|thumb섬네일|upright|불가르인의 학살자 바실레이오스 2세 황제.]]
 
로마 교황청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 간 계속 이어진 해묵은 갈등은 새로이 기독교화한 불가리아에서 양 세력의 종교상 수위권을 놓고 재대두했다. 이 일로 894년에 불가리아의 강력한 차르 [[시메온 1세]]가 제국을 침공했으나 제국은 외교 수단을 동원해 헝가리인에게 구구해 이 사람들을 물리쳤으나 [[불가로피곤 전투]](896년)에서 로마는 패배했고 불가리아인에게 연공을 바쳐야했다. 912년에 시메온은 한술 더 떠 로마 제국이 자신에게 불가리아 황제인 바실레우스의 관을 부여하고 어린 [[콘스탄티노스 7세]] 황제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게끔 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차르가 한 계획은 좌절되었으나 그 사람은 트라키아를 재침공해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점령했다.<ref name=Norwich />
{{참조|알렉시오스 1세|제1차 십자군}}
 
[[파일:Byzantiumforecrusades.jpg|350px|thumb섬네일|십자군 원정 이전 로마 제국과 [[룸 술탄국]].]]
 
만지케르트 패한 후 [[콤네노스 황조]]의 노력으로 제국의 국력은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ref name="M124">{{harvnb|Magdalino|2002|p=124}}.</ref> 콤네노스 황조의 첫째 황제는 [[이사키오스 1세]](1057년~1059년 재위)였고 둘째 황제인 알렉시오스 1세는 등극하자마자 [[로베르 기스카르]]와 그 사람의 아들 [[보에몽 1세|보에몽 드 타란토]]가 이끄는 노르만족에 침략받았는데 이 사람들은 [[디라키온]]과 [[케르키라]]를 점령하고 [[테살리아]]의 [[라리사]]를 포위했다. 1085년에 기스카르가 죽으면서 노르만족 문제는 일시로나마 완화했다. 이듬해에는 셀주크 술탄이 죽어 술탄국은 내홍으로 갈라졌다. 알렉시오스는 1091년 4월 28일에 [[레부니온 전투]]에서 [[페체네그족]]을 자력으로 급습해 섬멸했다.<ref name="Br" />
 
[[파일:Histamenon nomisma-Alexius I-sb1776.jpg|thumb섬네일|left|테살로니케 조폐소의 첫 동전.]]
 
서부 지역의 안정을 확보한 알렉시오스는 어려운 경제 상황과 흩어진 제국의 자고로 이어져 내려오는 방비 문제에 주목했으나<ref name=Birkenmeier>{{harvnb|Birkenmeier|2002}}.</ref> 황제는 셀주크 세력이 차지한 소아시아 고토를 회복하기엔 인력이 불충분했다. 1095년 [[피아첸차 공의회]]에서 알렉시오스의 사절이 [[교황 우르바노 2세]]에서 동방에서 기독교도가 겪는 곤란을 전하고 서방이 돕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계속 무슬림에 지배받게 되리라고 역설했다. 교황은 알렉시오스의 요청이 서유럽을 결합하면서 교황의 권력을 강화할 기회라고 판단했다.<ref name=Harris>{{harvnb|Harris|2003}}; {{harvnb|Read|2000|p=124}}; {{harvnb|Watson|1993|p=12}}.</ref> 1095년 11월 27일 우르바노 교황은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하여 모든 사람이 십자가의 표식하에 무기를 들고 예루살렘과 동방을 무슬림에게서 탈환하고자 무장 [[순례]] 원정을 개시하자고 촉구했다. 서유럽은 매우 흥분하여 미친 듯이 날뛰었다.<ref name="Br" />
{{참조|요한네스 2세|마누엘 1세}}
 
[[파일:1099jerusalem.jpg|thumb섬네일|제1차 십자군 원정 당시 [[예루살렘 공성전]]을 묘사한 중세 필사본.]]
 
1118년 알렉시오스의 아들인 [[요한네스 2세 콤네노스]]가 아버지를 계승해 제위에 올라 1143년까지 통치했다. 성실하고 심신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하는 황제인 요한네스는 반세기 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제국이 입은 해 만회에 적임자였다.<ref>{{harvnb|Norwich|1998|p=267}}.</ref> 경건하면서 온화해 공정한 정치로 유명한 요한네스 2세는 잔인한 방식이 통하던 당시에 보기 드물게 도덕 규범에 적합한 지도자였으므로<ref>{{harvnb|Ostrogorsky|1969|p=377}}.</ref> 로마 제국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불렸다. 25년 치세 동안 요한네스는 서방의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했고 [[베로이아 전투]]에서 페체네그족을 형편이 바뀔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격퇴했으며<ref name="B90">{{harvnb|Birkenmeier|2002|p=90}}.</ref> 소아시아에서 튀르크족을 상대로 수많은 전쟁을 친히 지휘했다. 요한네스가 전쟁 덕에 동방에서 힘의 균형이 근본으로 바뀌어 투르크족을 수세로 몰았고 소아시아 반도의 수많은 읍락, 요새, 도시를 수복했으며<ref name="SJ">Stone, [http://www.roman-emperors.org/johncomn.htm John II Komnenos].</ref> 1120년대에 헝가리인과 세르비아인의 위협을 좌절시켰고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족 임금 [[루지에로 2세]]에 대항하여 [[독일의 군주 목록|독일 황제]] [[로타르 3세]]와 동맹한다.<ref name="BrJ">{{백과사전 인용|title=John II Komnenos|encyclopedia=Encyclopædia Britannica}}.</ref> 치세 후반기에 동방에서 주로 활동한 요한네스 황제는 [[멜리테네]]의 [[다니슈멘드]] 토후국을 무찌르고 [[킬리키아]]를 재정복했으며, 안티오케이아 공작 [[푸아티에의 레몽]]을 제압해 로마 제국의 수위권을 확인했다. 로마 제국 황제가 기독교 세계의 지도자라는 사실을 현로하고자 로마 제국과 십자군 국가의 연합군을 앞세워 [[성지]]로 진군한 요한네스 황제는 기운차게 활동할 힘이 넘치게 원정을 강행했으나 여러 십자군동맹이 배반하여 좌절됐다.<ref>{{harvnb|Harris|2003|p=84}}.</ref> 1142년에 요한네스 황제는 안티오케이아를 재압박하여 자신이 한 주장을 관철하려고 했으나 1143년 봄에 사냥하다가 사고로 죽자 레몽은 용기를 얻어 킬리키아를 침공했으나 패하고 새 황제에게 자비를 청하고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야 했다.<ref name="B326">{{harvnb|Brooke|2008|p=326}}.</ref>
 
[[파일:The Byzantine Empire, c.1180.PNG|thumb섬네일|left|300px|콤네노스 시대가 막바지에 접어든 1180년경 로마 제국의 영토.]]
 
요한네스가 황제로 선택한 사남 [[마누엘 1세 콤네노스]]는 동부와 서부 양방에서 주변 지역을 공격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십자군 [[예루살렘 왕국]]과 동맹하고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여 예루살렘 왕국과 함께 이집트 [[파티마 왕조]]를 침공했다. 마누엘은 여러 십자군 국가의 종주국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강화했고 안티오케이아의 공작 [[르노 드 샤티용]]과 예루살렘 왕 [[아모리 1세]]과 협정을 조인해 패권을 확보했다.<ref name="S">{{harvnb|Magdalino|2002|p=74}}; Stone, [http://www.roman-emperors.org/mannycom.htm Manuel I Comnenus].</ref> 남부 이탈리아에 있는 여러 항구를 재장악하고자 1155년에 마누엘은 이탈리아로 원정대를 보냈으나 연합군 내홍 탓에 원정은 결국 실패했으나 1167년에 마누엘에 [[헝가리 왕국]]을 침공해 [[시르미움 전투]]에서 헝가리를 격파했다. 1168년에 아드리아 해 동안 대부분을 장악한<ref name="S372">{{harvnb|Sedlar|1994|p=372}}.</ref> 마누엘 황제는 황제와 여러 서방기독교왕국과 수차 동맹했고 [[제2차 십자군]]으로 하여금 제국을 별탈없이 통과시킬 수 있었으나<ref name="M67">{{harvnb|Magdalino|2002|p=67}}.</ref> 동부에서는 1176년에 마누엘 2세는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튀르크인에게 대패했지만, 패배한 손실은 이내 만회했고 익년에 마누엘의 군대는 "선발된 튀르크인들"을 무찔렀다.<ref name="B129">{{harvnb|Birkenmeier|2002|p=128}}.</ref> [[히엘리온과 레이모케이르 전투]]에서 튀르크 침략군을 섬멸한 로마 군대 사령관 요한네스 바타체스는 수도에서 군대를 데려왔을 뿐만 아니라 군대를 자체로 모집 가능했는데 이는 로마 제국 군대가 아직 강력하며 소아시아 서부의 방어 제도가 아직 제구실하는 형편을 나타냈다.<ref name="B196">{{harvnb|Birkenmeier|2002|p=196}}.</ref>
1180년 9월 24일에 마누엘이 죽자, 당시 11살이었던 아들 [[알렉시오스 2세 콤네노스]]가 제위에 올랐다. 알렉시오스는 정치에 무능했고 프랑크인 세력을 등에 업은 [[안티오케이아의 마리아]] 탓에 섭정은 인기를 없었다.<ref name="Norwich291">{{harvnb|Norwich|1998|p=291}}.</ref> 알렉시오스 1세의 손자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가 어린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결국 정변을 일으켰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인 데다가 군대에게 더 뛰어난 힘이나 재주로 남을 눌러 꼼짝 못하게 하는 지지를 이용해 1182년에 수도로 진군하여 라틴인들을 학살한 <ref name="Norwich292">{{harvnb|Norwich|1998|p=292}}.</ref> 안드로니코스는 정적이 될지도 모를 세력을 제거하고서 1183년 9월에 공동 황제로 즉위했고 알렉시오스 2세를 처단하고 그 사람의 열두 살 난 아내 [[프랑스의 아녜스]]를 자신의 황후로 맞이했다.<ref name="Norwich292"/>
 
[[파일:Schnorr von Carolsfeld - Die Schlacht von Iconium.jpg|thumb섬네일|제3차 십자군이 [[이코니온]]을 점령했다.]]
 
안드로니코스 1세의 출발은 괜찮았다. 특히 그 사람이 제국 행정부를 개혁하고자 쓴 수단은 사가들에게 높이 평가받았다. 안드로니코스는 부패를 근절하려고 시도했는데 안드로니코스 시대에 매관매직이 없어지고 편향 없이 능력에 따라 관리를 선발했으며, 뇌물의 유혹을 막고자 관리에게 적절한 봉급을 지불했다. 지방 관구에서 안드로니코스의 개혁은 빠르고 괄목할 성과를 보였다.<ref name="M194" /> 귀족들은 안드로니코스에게 분노했고 상황이 나빠져 균형을 잃어 처형과 폭력을 일삼는 공포정치로 선회한<ref>{{harvnb|Harris|2003|p=118}}.</ref> 안드로니코스는 귀족 세력을 아예 절멸하려고 했다. 귀족과 황제의 권력투쟁은 대규모 살육으로 이어졌고 황제는 정권을 유지하고자 더욱 무자비한 수단을 휘둘렀다.<ref name="M194">{{harvnb|Ostrogorsky|1969|p=397}}.</ref>
{{참조|제4차 십자군}}
 
[[파일:Eugène Ferdinand Victor Delacroix 012.jpg|thumb섬네일|Right|《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입성》, [[외젠 들라크루아]], 1840년작.]]
 
1198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교황 사절]]과 [[회람]]을 통해 새 십자군 창설을 제의했다.<ref name="Norwich299">{{harvnb|Norwich|1998|p=299}}.</ref> 당초 이 십자군은 [[레반트]] 무슬림 세력의 중심지였던 이집트를 목표로 했다. 1202년 여름에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에 당도한 십자군은 예상보다 규모가 작았고 이집트로 가고자 고용한 베네치아 함대에 지불할 비용도 불충분했으며, [[도제 (베네치아)|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이끄는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집트와 밀접하게 교역하는 관계였으므로, 교황과 십자군 양자는 이해관계가 상이했다.<ref name="Br4Cr">{{백과사전 인용|title=The Fourth Crusade and the Latin Empire of Constantinople|encyclopedia=Encyclopædia Britannica}}.</ref> 베네치아는 십자군에게 함대 사용료를 지불하는 대신에 [[달마티아]]의 [[차라]] 항구를 장악할 수 있게 자신들을 지원하라고 제안해 승낙받았다. (이곳은 원래 베네치아의 종속 도시였으나 반란해 1186년에 헝가리의 보호하에 스스로 들어갔다).<ref name="BrC">Britannica Concise, [http://concise.britannica.com/ebc/article- 9383275/Siege-of-Zara Siege of Zara].</ref> 1202년 11월에 짧은 [[차라 공성전|공성전]] 끝에 차라 시는 함락되었다.<ref>{{harvnb|Geoffrey of Villehardouin|1963|p=46}}.</ref> 인노첸시오 교황은 베네치아의 이런 계획을 알고 거부했으나 묵살당했지만 십자군을 곤경에 빠뜨리고 싶어하진 않았으며 이 사람들의 과오를 조건부로 면제했다. (그러나 베네치아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았다)<ref name="Br4Cr" />
 
[[파일:Byzantium1215.jpg|thumb섬네일|left|260px|제4차 십자군 이후 제국의 분열. 1204년경.]]
 
[[샹파뉴 백작 테오발드 3세]]가 죽자 십자군의 지휘권은 [[호엔슈타우펜 왕가]] 출신의 [[슈바벤의 필립]]의 친구인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에게 넘어갔다. 보니파치오와 필리프는 모두 로마 제국 황족과 혼인했다. 필리프의 이복형제이자 폐위된 장님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의 아들인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는 도와줄 세력을 찾아 유럽에 와서 십자군과 접촉했다. 알렉시오스는 로마제국과 로마의 양 교회를 통합하고 십자군에게 은화 200,000 마르크를 지불하며, 십자군에 합세해 이 사람들이 이집트에 가는데 필요한 모든 물자를 보급하겠다고 제안했다.<ref name="Norwich301">{{harvnb|Norwich|1998|p=301}}.</ref> 인노첸시오는 십자군이 목표 이집트가 아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한다는 계획을 알고 이 도시를 공격하지 말도록 명령했지만, 교황 칙서는 십자군 함대가 차라를 떠나고서야 도착했다.
====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
 
[[파일:1263 Mediterranean Sea.svg|thumb섬네일|350px|로마 제국. 1263년경.]]
 
[[라스카리스 황조]]가 세운 니카이아 제국은 1261년에 라틴인을 몰아내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았고 에페이로스를 무찌른 덕에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 치세에 로마 제국은 짧게나마 부흥했으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제국은 당시 주변을 둘러싼 적들을 막을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못했다. 미카엘 황제는 라틴인과 계속전쟁하고자 농민에게 중과세해 분노를 샀다.<ref>{{harvnb|Madden|2005|p=179}}; {{harvnb|Reinert|2002|p=260}}.</ref> 제4차 십자군 탓에 피해한 수도를 복구하고자 대규모 건설 사업이 이루어졌지만, 이런 일은 이성을 상실하고 시비를 판단하지 않고 무조건 수용하여 신뢰하는 가지들의 침략에 시달리던 소아시아 농민에게는 전혀 위안이 되지 못했다.
 
==== 오스만 제국의 발흥과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
[[파일:Constantinople 1453.jpg|thumb섬네일|upright|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15세기의 프랑스 세밀화.]]
 
[[안드로니코스 3세]]가 죽고 내전이 발발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내전 (1341년~1347년)|6년간 이어진 내전]] 탓에 제국은 황폐화했고 1354년에 [[겔리볼루]]에서 지진이 일어나면서 오스만 제국(이들은 내전 당시 [[요한네스 6세 칸타쿠제노스]]가 용병으로 부린 바 있었다)이 유럽에 발을 들이게 된다.<ref>{{harvnb|Reinert|2002|p=268}}.</ref> 로마 제국이 내전을 끝낼 즈음에 오스만 제국은 이미 세르비아를 무찔러 봉신국으로 삼았다. [[코소보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은 발칸 지방 상당수를 정복했다.<ref>{{harvnb|Reinert|2002|p=270}}.</ref>
 
[[파일:Eastern Mediterranean 1450 .svg|thumb섬네일|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직전 동지중해 지도.]]
 
황제들은 서방에 지원을 호소했으나, 교황은 오직 [[성좌 (가톨릭)|로마 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재통합을 조건으로 지원을 고려할 뿐이었다. 제국 행정부는 교회 통합을 고려해 때로는 칙령으로 통합을 명령하기도 했으나 정교도 시민과 성직자들은 로마 교회와 [[라틴 전례]]의 권위에 격렬하게 반발했다.<ref>{{harvnb|Runciman|1990|pp=71–72}}.</ref>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기독교를 수호하고자 일부 서방 군대가 오기도 했으나 서방 지배자 대부분은 자기 일에 정신이 팔려 오스만 제국이 로마 제국의 잔여 영토를 잠식하는데도 아무것도 돕지 않은<ref name="R84-85">{{harvnb|Runciman|1990|pp=84–85}}.</ref> 시기에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인구가 급감해 벌판에 마을이 모인 정도 밖에 안 되는 초라한 도시가 됐다. 1453년 4월 2일, 술탄 [[메흐메트 2세]]의 군대 80,000여 명과 대규모 비정규군이 도시를 포위했다.<ref name="R84-86">{{harvnb|Runciman|1990|pp=84–86}}.</ref> 수를 기준으로 열세였던 기독교도 군대(약 7,000여 명으로, 이 중 2,000여 명은 외국인이었다)가 필사로 해자를 방어했으나<ref name="R84-85" /> 2개월간 벌인 공성전 끝에 1453년 5월 29일에 오스만 제국은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했다. 로마 제국의 최후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콘스탄티노스 11세 팔라이올로고스]]는 적군이 도시 성벽을 장악하자 황제의 예복을 벗고 육박전에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했다.<ref>{{harvnb|Hindley|2004|p=300}}.</ref>
=== 경제 ===
 
[[파일:September byzantinisch.jpg|thumb섬네일|left|250 px|[[9월]]의 우의적 묘사. 11세기경]]
 
로마 제국의 경제는 수백년간 지중해와 유럽에서 단계가 가장 발전되어 앞서 있었다. 특히 유럽은 중세 후기까지 로마 제국의 경제력을 따라가지 못했고 로마 제국에서는 서유럽과 달리 화폐 경제 제도가 발달하였다. 제국 행정부에서 발행한 금화 [[노미스마]]는 [[11세기]] 전반까지 높은 순도를 유지해 후세에 ‘중세의 달러’라고 불릴 정도로 여러 나라에서 화폐로 유통되었다. 특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업종마다 길드를 이용한 국가에 의거한 보호와 통제가 두루 미쳤으므로, 국영 공장에서 독점으로 제조된 견직물이나 귀금속 공예품, 타국과 한 무역이 제국에 많은 부를 가져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세계의 부의 3분의 2가 모이는 곳’이라고 칭해질 만큼 크게 번영하였다. 오랫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 거의 모든 지역을 포괄하는 무역망의 중심지였으며, [[비단길]]의 서측 관문이기도 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7세기에 아랍인이 쳐들어오기까지 제국은 세계에서 최강한 경제력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출처|날짜=2013-06-18}} 아랍인의 정복으로 부는 역전되어 로마 제국은 한동안 침체기를 맞았다. 콘스탄티노스 5세의 개혁(765년경)으로 제국은 부흥해 1204년까지 발전하였다. 10세기에서 12세기 말까지 로마 제국은 화려를 과시했고 여행자들은 수도의 부에 깊이 인상받았으나 경제상 재앙이었던 [[제4차 십자군]]으로 일체가 달라졌다.<ref name="M532">Magdalino ''in Laiou'' (2002), [http://www.doaks.org/EconHist/EHB20.pdf 532] {{웨이백|url=http://www.doaks.org/EconHist/EHB20.pdf |date=20080625192523 }}<!-- application/pdf, 531963 bytes -->}}</ref> [[팔라이올로고스 황조]]는 경제를 회생하고자 노력하였으나 후기 로마 제국은 국내외 경제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12세기 이후로 [[이탈리아]] 여러 도시국가의 상공업 발전에 밀려나 제국 내 산업은 쇠퇴헤 해군력 제공을 담보로 이탈리아 여러 도시국가에 무역 특권 부여로 무역 이익도 잃은 제국은 쇠퇴일로에 들어섰다. 점차 제국은 교역과 가격, 귀금속 유통에 영향력을 잃었고 어떤 학자들은 화폐 주조권도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판단하기도 한다.<ref name="M806">Matschke (2002), [http://www.doaks.org/EconHist/EHB37.pdf 805–806] {{웨이백|url=http://www.doaks.org/EconHist/EHB37.pdf |date=20080625235853 }}<!-- application/pdf, 262093 bytes -->}}</ref>
{{참고|로마 가톨릭|동방 정교회|오리엔트 정교회|네스토리우스주의}}
 
[[파일:Aya sofya.jpg|thumb섬네일|250 px|[[성 소피아 성당]].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의 두루 널리 미치는 명성을 표현하는 상징이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대에 4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532년~537년)에 완성된 건물이다.]]
[[파일:Konstantinopol.jpg|200px|thumb섬네일|[[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문장]]
 
[[조지프 라야]]는 "로마 문화와 [[동방 정교회]]는 같은 하나다."라고 말한 바 있다.<ref>Raya, [http://rumkatkilise.org/rayabyzantium.htm#cooliris The Byzantine Church and Culture] {{웨이백|url=http://rumkatkilise.org/rayabyzantium.htm |date=20081009091253 }}</ref> 동방에서 제국이 존속하면서, 황제는 교회의 일에 적극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로마 국가는 고대 종교 시대에서 일상으로 종교와 관련한 행정ㆍ재정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이는 [[기독교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카이사레이아의 에우세비우스]]가 고안한 모범에 따라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나 전령으로 간주됐으며, 황제는 타 종교인에게 기독교를 선교하고 행정이나 재정을 위시해 종교 "외부상" 일을 맡는다고 보았으나 황제가 교회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고정된 형태로 법에 따라 정해진 제도로 발전되지는 않았다.<ref name="M14">Meyendorff, 1982, p.13.</ref>
법 분야에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개혁은 [[법리학]]의 발전에 분명한 영향을 끼쳤으며, [[레온 3세]]의 ''에클로가''(Ecloga)는 슬라브 세계의 법 체제 성립에 영향을 끼쳤다.<ref>Troianos, Velissaropoulou-Karakosta, 1997, p.340.</ref>
 
[[파일:Mudil Psalter.jpg|thumb섬네일|right|120 px|무딜 시편(Mudil Psalter). [[콥트어]]로 된 최고인 완전한 시편이다. (이집트 카이로 [[콥트 박물관]])]]
[[파일:Codex Armenicus Rescriptus.jpg|thumb섬네일|right|120 px|아르메니아 칙답서(Codex Armenicus Rescriptus). 아르메니아와 시리아의 전례식문을 담는 6세기·10세기 양피지 문서.]]
[[파일:Joshua Roll.jpg|thumb섬네일|right|120 px|[[여호수아 두루마리]]. 10세기에 그리스어 필사본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된 제작으로 추정된다.([[바티칸 도서관]])]]
 
=== 언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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