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조 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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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魏晉南北朝.png|thumb섬네일|right|280px|[[위진 남북조]] 왕조들의 계통도]]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 [[420년|420]]~[[589년|589]])는 한족이 세운 남조와 유목민족이 세운 북조가 대립하다,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 강남에는 [[송 (남조)|송]](宋), [[제 (남조)|제]](齊), [[양 (남조)|양]](梁), [[진 (남조)|진]](陳)의 4개 왕조가 차례로 흥망했는데, 이것을 가리켜 남조(南朝)라고 불렀다. 또한 같은 [[건강 (지명)|건강]](建康; 건업(建業)의 새 이름)을 수도로 삼았던 [[삼국시대]]의 [[오 (삼국)|오]]나라와 [[동진]]을 합쳐 육조(六朝)라고 불러 이 시대를 [[육조 시대]]라고 부르기도 하나, 이는 주로 문화사를 다룰 때 쓰이는 시대 구분이다.
 
이 시대 강남이 크게 개발되어, 이후 수나라, 당나라 시대에 강남은 중국 전체의 경제 기반이 되었다. 남조는 정치적 혼란과는 대조적으로 문화와 불교 등이 융성하여 육조 문화라 불리는 귀족 문화가 번영하여 [[도연명]], [[왕희지]] 등이 활약했다.
 
화북에서는 선비족 [[탁발씨|탁발부]]가 건국한 [[북위 (북조)|북위]](北魏)가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북방 유목민의 부족제를 해체하고 귀족제에 의거한 중국적인 국가로 탈피했다.
 
북위는 [[육진의 난]](六鎭之亂)을 거치면서, [[534년]]에 [[동위 (북조)|동위]](東魏), [[서위 (북조)|서위]](西魏)로 분열하였다. 동위는 [[550년]] [[북제]](北齊)로 정권이 바뀌고, 서위는 [[556년]]에 [[북주]](北周)가 대신했다. [[577년]] 북주는 북제를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하였다.
 
그 후 [[581년]] [[수나라]]의 [[양견]]이 북주의 양위를 받아 제위에 오른다. [[589년]] 수나라는 남조의 마지막 왕조 진나라를 멸망시켜 중국을 재통일하였다. 화북의 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의 5개 왕조를 가리켜 북조(北朝)라고 불렀고, 여기에 수나라도 합쳐야 한다는 설도 있다. 이연수(李延壽)의 [[북사]](北史)에는 수나라를 북조에 넣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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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혼란을 수습한 것이 [[문명황후]](文明皇后)였다. 문명황후는 4대 [[문성제]](文成帝)의 황후이자 5대 [[헌문제]](獻文帝)의 적모(嫡母)로 [[466년]] 헌문제를 옹립해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후에 헌문제에게 장남 굉(宏; 후에 [[효문제]](孝文帝))이 태어나자 잠시 물러났으나 효문제의 생모를 죽인 일로 헌문제와 대립해 헌문제를 폐립하고 효문제를 옹립했다. 북위에서는 외척의 횡포를 배제하기 위해 태자가 황위에 오르면 그 생모를 죽이는 것이 통례였다. 문명태황태후는 계속 수렴청정을 하면서 [[봉록제]](封祿制), [[삼장제]](三長制), [[균전제]](均田制) 등의 제도를 실시하여 중앙집권화와 한족화를 추진했다.
 
[[490년]] 문명태황태후가 죽자 효문제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지만 정책은 그대로 유지 계승되었다. [[493년]] 효문제는 수도를 평성(平城; 지금의 산서성 대동)에서 낙양(洛陽)으로 천도 후 대대적인 한족화 정책을 추진했다. 황실의 성씨을 원씨(元氏)로 고치고,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을 부분 채용하여 남조를 모방한 북조 귀족제도를 만들었다. 이에 반발한 일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효문제의 시기에 모두 진압되었다. 하지만 효문제의 사후 반발이 더 거세져 [[523년]] [[육진의 난]]이 일어나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북위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6진은 예전 수도 평성 주변을 방위하던 6곳의 군사주둔지였는데, 이곳은 예로부터 선비족의 유력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매우 중요시되어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수도를 천도한 뒤 대우가 나빠지면서 주둔 군인의 불만이 쌓인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반란이 일어나던 시기 조정에서는 8대 [[효명제]](孝明帝)와 생모 영태후(靈太后)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 528년 영태후가 효명제를 살해하여 혼란은 극에 달했다. 이를 진압한 것이 [[이주영 (북위)|이주영]](爾朱榮)이었다. 이주영은 6진을 진압하고 [[효장제]](孝莊帝)를 옹립한 뒤 권력을 휘둘렀으나 효장제에 의해 살해되고, 효장제 또한 이주영 일족에게 살해당했다. 이 틈을 노려 이주영의 부하였던 [[고환]](高歡)이 이주영 일족을 척살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고환에 의해 옹립된 북위 최후의 황제 효무제(孝武帝)는 고환의 전횡을 싫어해서 관중 일대에서 세력을 키운 군벌의 우두머리였던 [[우문태]](宇文泰)에게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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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 (남조)|양]]
건강에 입성한 [[소연 (양)|소연]]은 다음해 [[502년]] 화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양나라를 건국하였다. 무제(소연)는 범운과 심약(《[[송서]]》의 편찬자) 등의 한인층을 등용해 귀족제도를 멀리하고, 새로운 인재를 구했다. 또한 구품관인법 등의 귀족층에게 유리한 제도를 개혁하고, 관위의 상하를 품으로 부르는 것을 고쳤다. 또한 조세의 감세를 추진하고 이때까지 사용한 서진 시대 이래의 [[태시율령]](泰始律令)을 대신해 새로운 양률과 양령을 제정했다. 문화에도 깊은 조예를 보여 이 시대는 남조 역사에서 문화가 가장 최전성기를 맞이한 때라고 불리고 있다. 특히 무제의 장자 소명태자에 의해 편찬된 《[[문선]]》(文選)은 현대까지 명저로 읽혀지며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치세 후반에 이르러 무제는 불교에 극단적으로 심취하여 여러 번 사찰에 투신하였고, 그때마다 신하들은 거액의 돈을 사용하여 무제를 데려왔다. 거기에 사용된 금액은 무려 1억 전에 달했다고 한다. 이 돈은 당연 국고에서 나오게 되었으니 국가 재정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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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동위의 하남장관 후경이 귀순을 요청했다. 조정대신 사이에선 반대의견이 많았으나, 무제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출병했다. 하지만 동위에게 패배하여 하남은 동위에게 돌아갔다. 패배한 무제는 생각을 고치고 동위와 화해에 나서게 되자, 목숨이 위태롭게된 후경은 [[548년]] 군사를 일으켜 건강을 함락하고, 무제를 붙잡아 굶겨 죽였다. 이것이 바로 후경의 난이었다.
 
무제 사후 3남 소강(蕭綱; [[소강 (양)|간문제]])이 뒤를 이었으나, 후경은 [[551년]] 황족 소동(蕭棟)을 옹립했고, 곧이어 그를 폐위하고 자신이 제위에 올라 국호를 한이라 불렀다. 이 반란 속에 각지의 여러 왕이 자립해 스스로 황제라고 칭했다. 그중 형주에 있던 무제의 8남 소택(蕭澤; [[양 원제|원제]])는 부하 [[왕승변]](王僧弁)을 파견해 후경을 죽이고 강릉에서 즉위했다. 이윽고 촉에서 황제를 칭하고, 강릉으로 진군하던 동생 소기(蕭紀)를 [[552년]]에 격파했다.
 
그러나 [[554년]] 옹주자사 소찬(蕭餐)이 끌어들인 서위의 대군 앞에 소택은 패배해 죽고, 소찬은 강릉에 들어가 황제가 되었다. 이 소찬의 정권을 [[후량 (남조)|후량]](後梁)이라 부르지만, 실제 서위의 괴뢰정권에 불과했다. 또한 이때 촉도 서위에게 점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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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7년 [[진패선]]은 경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진나라를 건국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진나라는 촉 지역과 강릉을 중심으로 한 형주 북부를 빼앗겼고, 거기에 국내에는 반대 세력이 남아 있었다. 진패선은 반대 세력을 진압하는 데 생애를 보내다 [[559년]]에 사망했다. 뒤를 형이 계승하였으니 그가 문제(文帝)였다.
 
문제는 무제의 방침을 고수하고 국내 반대 세력을 제압했다. [[566년]] 문제 사후 동생이 문제의 아들을 살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선제(宣帝)가 되었다. 선제는 북주와 함께 북제에 대한 공동전선을 펼쳐 출격하여 회남을 획득했다.
 
그러나 북제를 멸망시킨 북주에게 진나라 군대가 패배해 회남을 다시 상실했다. 이후 [[582년]] 진숙보(陳叔寶; 후주)가 즉위하면서 정치를 등한시하고 놀기만 해 통일의 시기가 가까이 왔음을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