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단 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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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그림|청나라}} [[이홍장]] <br / >
{{국기그림|청나라}} [[롱루]] <br / >
{{국기그림|청나라}} [[혁광]]
|지휘관2= {{국기그림|청나라}} [[서태후]] <br />
{{국기그림|청나라}} [[육현]]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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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화단의 기원과 조직 ==
=== 의화단 운동의 사회적 배경 ===
[[파일:China imperialism cartoon.jpg|280px|left|thumb섬네일|1898년 1월 15일 [[프랑스]] 신문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에 실린 만평. 당시 중국 분할을 풍자했다.]]
 
[[청나라]] 말, 열강세력들의 이권침탈과 더불어 국내 상황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ref name="ab">《근대중국:개혁과 혁명-중화제국 마지막 왕조의 몰락(下)》,신승하 저. 대명출판사. p411</ref> 특히 [[산둥 성]], [[즈리 성]], [[허난 성]] 지방에 나타난 사회구조의 변화는 의화단 운동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ref name="ab"/> 이 지역은 자급자족의 자연경제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 지역에는 일찍이 면화와 토포(土布) 상품의 중요 생산지여서 토포와 면화의 교역량이 제일 많았다. 각지의 상인들은 이를 구입, [[산서 성]], [[내몽고]], [[요동]] 등지에 판매하였다. 그런데 [[톈진]]과 [[연태]](煙台)가 개항된 후 양사, 양포의 수입량이 나날이 증가되면서 농촌의 토사, 토포 시장을 장악하여 가내 방직업은 완전히 파산되고 농민들에게 경제적인 고통을 가중시켰다. 결국 [[의화단]]의 기층을 이루고 있던 농민들은 그 불만의 화살을 열강 [[제국주의]]를 향하여 돌리게 되어 이들은 '양화배척'을 외치게 되었다.<ref name="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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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화단의 기원 ==
{{참고|의화단}}
[[파일:Yihetuan flag.png|thumb섬네일|240px|right|의화단 깃발.]]
 
[[의화단]]의 전신은 '[[의화권]]'(義和拳) 혹은 '의화문'(義和門)으로 그들은 [[1778년]](건륭 43년)의 관방 문서에 처음으로 보이고 있다.<ref name="의화단의 기원">《근대중국:개혁과 혁명-중화제국 마지막 왕조의 몰락(下)》,신승하 저. 대명출판사. p412~p413</ref> 그들은 본래 통일된 조직이 없어서 연합행동을 할 때에 비교적 세력이 있는 촌이 주축이 되어 인근의 무리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부자들을 위협하여 재물을 내도록 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해왔다.<ref name="의화단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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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화단의 조직과 구성원 및 구호 ===
[[파일:Boxerspamphlet.png|thumb섬네일|300px|right|의화단의 격문]]
 
의화단은 일반적으로 '팔괘'에 따라 여덟 개의 큰 계통으로 조직되었는데, [[즈리 성]]의 [[톈진]], [[베이징]] 지역에만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지방에 따라 반드시 여덟 개가 다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여덟 개의 계통이 모두 다 같은 규모로 통일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의화단]] 전체가 통일된 조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며, 또한 엄격한 지도부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공인된 지도자도 없었다.<ref name="의화단의 구성원">《근대중국:개혁과 혁명-중화제국 마지막 왕조의 몰락(下)》,신승하 저. 대명출판사. p413~p416</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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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화단 운동의 발전과 청조의 대책 ==
=== 의화단 운동의 발전 ===
[[파일:BoxerSoldiers.jpg|left|thumb섬네일|270px|[[의화단]]원들.]]
[[파일:China-Shandong.png|300px|thumb섬네일|right|[[산둥 성]]. [[의화단]] 활동 주요지였다.]]
 
의화단 운동의 발원지는 [[산둥 성]]과 [[즈리 성]]의 경계지로 이 지역으로부터 [[청일 전쟁]] 이후에 자발적으로 반기독교 움직임이 계속적으로 일어나 [[산둥 성]] 전체로 파급되고 있었다.<ref name="의화단 운동의 발전">《근대중국:개혁과 혁명-중화제국 마지막 왕조의 몰락(下)》,신승하 저. 대명출판사. p416~p418</ref> 따라서 10여년 전에 일어난 교안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미루어져 온 사건도 있었다. 예를 들면 [[1894년]]에 이병형(李秉衡)이 [[산둥 성]] 순무로 부암하였을 때 [[1886년]]에 일어난 선교사와 교민들의 횡포에 분노한 민중들이 [[교회]]당을 불태운 '연주교안'(州敎案)은 아직 해결되지 못한 상태<ref>《[http://book.naver.com/bookdb/text_view.nhn?bid=253476&dencrt=ukTCfD5ZBb3n%253%395x%252BwbrLby76idOcvWrP67TQaBTCRA8%253D&term=%BF%AC%C1%D6+%B1%B3%BE%C8&query=%EC%97%B0%EC%A3%BC%EA%B5%90%EC%95%88 의화단운동 전후의 산동]》</ref> 였는데,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돌려받고 [[독일제국|독일]]인의 입김이 커지면서 교안도 피동적으로 해결되었다.<ref name="의화단 운동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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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조의 대책 ===
[[파일:Chinese soldiers 1899 1901.jpg|thumb섬네일|300px|right|[[1899년]]-[[1901년]]의 청나라 군대. 왼쪽의 2명의 군인들은 '신건육군'(新建陸軍). 가운데 앞의 군인은 기존의 정규군. 중앙에 앉아있는 군인은 포병이다. 오른쪽은 [[의화단|의화단원]].]]
[[파일:BoxersDrawingByKoekkoek1900.jpg|thumb섬네일|left|200px|[[1900년]]에 요하네스 쿡쿡(Johannes Hermanus Barend Koekkoek)이 그린 의화단원의 모습.]]
 
[[의화권]]의 활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을 때 청조의 태도는 확고하지 않아서 '초무(剿撫) 양면' 정책을 폈다.<ref name="청조의 대책">《근대중국:개혁과 혁명-중화제국 마지막 왕조의 몰락(下)》,신승하 저. 대명출판사. p418~p420</ref> 이는 조정안에도 두 파로 나뉘어 있음을 의미한다. 즉 한 파는 의화단을 [[백련교]]와 같은 사교에서 나온 것이므로 하루빨리 엄격하게 토벌하여 외국인들이 무력을 사용하여 간섭하려는 구실을 주지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ref name="청조의 대책"/> 또 한 파는 [[의화단]]의 조직과 그들이 진행하고 있는 반기독교 투쟁과는 구별하여 [[반기독교 운동]]에 대하여 엄격하게 다스려 만연되지 못하도록 하고 그 조직을 향단(鄕團)으로 편성하여 관의 통제를 받도록 하면서 의화단을 이용하자는 주장이었다.<ref name="청조의 대책"/> 특히 후자들은 [[광서제]]를 비호하고 있는 열강에 대항하고, [[서태후]]의 훈정(訓政)을 계속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황제로 앉히려는 [[서태후]]의 뜻에 영합하려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화단 운동을 갖고 반기독교 운동을 일으켜 양무와 변법사상을 전반적으로 부정하려는 수구적인 의식을 갖고 있었다.<ref name="청조의 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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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는 부임하자마자 [[의화단]]의 세력을 분열시키면서 무력으로 적극 평정에 나섰다. 이에 [[산둥 성]]에서 활동하던 의화단은 [[즈리 성]] 지방으로 옮기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00년]] 초에 [[즈리 성]]의 남부, 동남부지역으로 확산되었고 남쪽으로 보정(保定), 신성(新城), 정흥(定興), 탁주 일대로 하여 다시 동쪽으로 웅현(雄顯), 패현(覇顯) 등지로 확대되었다.
 
[[파일:The Chinese Boxers, Le Petit Parisien.JPG|thumb섬네일|260px|right|'Le Petit Parisien'지 신문 삽화. [[의화단]]원들이 [[철도]]를 파괴하는 모습.]]
[[즈리 성]]으로 들어온 [[의화단]]은 '부청멸양의 구호를 내걸고 가는곳마다 [[교회]]를 불태우며, 교민을 살해하고, 선교사를 징계하면서 [[철도]]와 [[전선]] 등 서양의 것을 보이는대로 파괴하였다.<ref name="청조의 대책"/> 또한 5월 말부터 베이징에도 의화단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6월초부터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손에 칼과 창을 들고, 요대에 칼을 차고 들어왔다. 그리고 의화단의 구호가 나붙기 시작하고 단구(壇口)가 만들어졌다. 6월 중순경에 이르러 30명, 40명이 무리를 지어 베이징으로 들어와 사원, 사당이나 회관을 빌려 그들의 기치를 꽂았다. 여기에 [[베이징]] 주민들도 의화단에 참가하여 그 수는 갈수록 늘었다. 심지어 일부 왕부에서도 단(壇)을 설치하였고 한족출신의 대신들도 의화단의 신술을 믿었다. 뿐만 아니라 만주족 출신의 왕공,귀족에서 군 장교와 사병, 궁중의 태감까지 의화단에 가입하여 6월 하순에 이르러 이미 베이징 성안에 1천여 개의 단구가 만들어지고 그 수도 10만 명에 육박하였다.<ref name="청조의 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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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 외국인 지구 포위 ===
[[파일:Western Legations Peking 1900 Clowes Vol VII.jpeg|thumb섬네일|450px|왼쪽|[[1900년]]의 [[베이징]] 외국 공사관 지구. 지도.]]
 
청조가 선전포고하기 이전인 [[6월 10일]] [[의화단]]은 [[기차]]로 [[톈진]]에서 [[베이징]]으로 출병한 시모어의 연합군 2129명을 저지시키고, [[철도]]와 [[전신]]을 파괴했다. 같은 날 [[의화단]]은 시산(西山)에 있던 영국의 여름 공관을 소각했으며, [[6월 11일]]에는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 스기야마가 보수파 인사인 동복상의 감군(甘軍)에게 살해당했다.<ref>《[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DGT4808973433018&barcode=4808973433018&prePageNo=1&prePage=279&keyword=%EC%8A%A4%EA%B8%B0%EC%95%BC%EB%A7%88+%EC%9D%98%ED%99%94%EB%8B%A8&preTab=02&isDaumSearchRefer=false#tab_preview 한국근대사]》,이윤섭 저. p27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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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세종서적
|출판위치=서울
|id={{ISBN|978-89-8407-310-4}}}}</ref>
 
=== 인명피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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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민을 체포하는데 소극적인 관리를 징계할 것}}
 
[[파일:Troops of the Eight nations alliance 1900.jpg|300px|right|thumb섬네일|8개국 연합군.]]
그리고 [[1900년]] [[5월 28일]]부터 [[5월 30일]]까지 각 국 공사들은 몇 차례 토의를 거쳐 연합, 출병하여 공동으로 [[의화단]]을 진압하기로 결정한 다음, 우선 [[베이징]]에 있는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이름으로 군대를 [[베이징]]으로 불러들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ref name="연합군의 진압"/> 그리하여 청 정부가 제공하는 열차 편으로 [[베이징]]으로 들어왔다. [[1900년]] [[6월 7일]] 전후에 서양 열강의 각 국 정부는 중국 주재 공사들에게 전권을 부여하고 각 국의 중국 주재 함대사령관에게 공사의 명에 따르도록 지시하였다.<ref name="연합군의 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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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iege of Peking, Boxer Rebellion.jpg|섬네일|280px|left|[[베이징]] 전투.]]
[[파일:Foreign armies in Beijing during Boxer Rebellion.jpg|right|280px|thumb섬네일|[[베이징]]에 입성하는 연합군.]]
[[톈진]]에서 각 국의 지휘관이 모여 [[7월 27일]], [[8월 1일]],[[8월 3일]] 세 차례에 걸쳐 협의하고,그 다음날 18300명이 [[베이징]]을 향하여 톈진을 출발하였다.(일-9000명, 러-3500명, 영-2500명, 미-2000명, 프-1000명, 독-200명, 오,이 - 100명) 다음날 이들은 [[송경]], 직례 도독 [[섭사성]], 총병[[마옥곤]]의 청 관군을 패배시키는 격전을 치렀으며, 또 다음날에는 양촌(楊村)을 점령하고, 10일에 마두(馬頭)를, 그리고 마침내 14일엔 베이징을 함락했고, 그리고 공사관은 의화단에게 포위당한 지 55일 만에 풀리게 되었다.<ref name="연합군의 진압"/> 공사관들은 거의 두 달 가까이 버텼는데, 이는 주로 북양대신인 [[영록]]이 [[서태후]]의 '선전포고' 명을 어기기 어려워 공사관을 공격하긴 했지만 겉만 떠들썩했지 실제로는 형식적으로만 공격을 가한것 때문이었다.<ref>《캠브리지 중국사 11권 하: 청 제국 말 1800~1911년 2부: 근대화를 향한 모색》, 존 K. 페어뱅크,류광징 편/김한식,김종건 등역 (2007년 9월 10일). 서울: 새물결, p213</ref> [[베이징]] 공격 당시 8개국 연합군의 피해상황은 일본군이 제일 많았고, 그다음이 러시아였다. 사상자는 총 합쳐서 437명이었다.<ref name="연합군의 진압">《근대중국:개혁과 혁명-중화제국 마지막 왕조의 몰락(下)》,신승하 저. 대명출판사. p429~p43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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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축조약의 체결 ===
{{참고|신축조약}}
[[파일:Chinaboxerprotocolsignature.png|right|300px|thumb섬네일|[[신축 조약]] 체결서.]]
 
청나라 조정과 서양 열강은 장장 8개월의 토론 끝에 배상금의 액수가 정해지고 지불방법을 둘러싼 의견대립도 합의를 보았다.<ref name="h"/> 서양 열강세력들은 중국의 영토와 주권을 보장하고 '[[서태후]]의 청조 지배를 인정한다'는 원칙을 내걸었다. [[1901년]] [[9월 7일]] [[경친왕]] 혁광과 [[이홍장]]은 청나라를 대표하여 서양의 11개국 대표와 [[베이징]]에서 신축조약을 체결했다.<ref name="의화단"/><ref name="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