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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학과 개화 사상을 배운 청년기 ====
[[파일:Kim Ok-kyun youth's.jpg|thumb섬네일|right|180px|청년 시절의 김옥균]]
 
어려서부터 문장·시·글씨·그림·음악 등에 두루 다재다능했다. 입양 후엔 후계자 수업을 받아야 해 유명한 선생들을 찾아다니며 과거 준비만 전념했다. 11살 때 양부 김병기가 외직에 나갈 순번이 돼 [[강릉]] [[부사]]로 갔다. 옥균도 [[강원도]] [[강릉]]으로 이주해 송담 서원에서 배웠다.<ref name="김옥균 생애"/> 강릉은 [[서인]]의 원조 [[율곡 이이]]의 고향으로, 율곡의 사당을 모신 그곳에서 [[노론]]의 학통을 이었다. 5년 후인 16세 때 다시 중앙으로 전임하는 양아버지를 따라 상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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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료생활 초반 ====
[[파일:Kim Okgyun.JPG|thumb섬네일|right|150px|김옥균 초상화]]
 
[[1876년]] [[2월]] 불평등조약인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 체결 후, 김옥균 등 개화파(開化派) 청년들은 나라의 자주 독립과 실력 양성, 개혁을 추진할 정치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신분을 초월한 비밀결사를 결의했다. 신분 문제 때문에 처음엔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주독립과 근대 개혁을 위해서는 이를 초월해야 한다고 설득해 뜻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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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물 수용과 일본 왕래 ===
==== 신문물 견학 건의 ====
[[파일:숙석읍산중.png|thumb섬네일|left|200px|작품 [[숙석읍산중]]]]
[[파일:개화파 01.jpg|thumb섬네일|140px|[[일본]] 체류중인 개화파 청년들<br />(좌측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영효]],[[서광범]],[[서재필]],[[윤치호]])]]
 
[[1876년]](고종 16년) 조선 조정에 강력히 건의해, 일어에 능했지만 일개 승려에 지나지 않던 [[이동인]]을 정식 사신 자격으로 [[일본]]에 보내 신문물을 견학하게 했다. [[이동인]]은 바로 귀국하지 않고 몇 년간 일본에 머무르며 [[1880년]] [[6월]] 수신사(修信使)를 이끌고 방일한 [[김홍집]]과 만나는 등 조정 내부에 개화란 화두를 던졌다. 김옥균 자신도 일본에 가고자 80년 말 [[이동인]]의 귀국 후 [[대한제국 고종|고종]]을 수차 설득한다. 결국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꾸려 일본에 가게 됐는데 동행하려던 [[이동인]]이 출발 직전 왕궁에 들렀다 행방불명된다. 척화파들에 의해 암살됐다는 소문이 곧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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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방문과 신문물 시찰 ====
===== 신사유람단 견학 =====
[[파일:Kim Ok-kyun's 1880s.jpg|thumb섬네일|right|180px|일본 체류 중 처음 양복을 입고 찍은 사진]]
{{참고|신사유람단}}
[[1881년]] [[12월]] 신사유람단을 조직한 김옥균은 생가와 양가 재산 및 주변의 후원금 등을 모두 환전, 총 2만 엔의 거금을 마련해 방일했다. 일행은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각자 흩어졌다. 김옥균은 [[나가사키]] 현의 [[조선소]], [[제련소]], [[탄광]], [[금광]] 등을 시찰하고 채굴기계의 존재와 금속 가공원리를 어깨너머로 파악하려 애썼다. 이어 [[고베]](神戶), [[오사카]](大阪)로 건너가 군수기지 공장과 조폐국을 둘러보고 물자 운송용 차량과 지폐 주조 기술을 관람했다. 그 후 [[교토]](京都)를 거쳐 [[1882년]] [[3월]] [[도쿄]]에 도착했다. 그는 [[게이오 대학교]]를 설립한 개화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집에 4개월 정도 머물며 일본의 발전상에 대해 담론을 나누는 한편, 그를 연줄로 [[일본]]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그들의 [[조선]]에 대한 시각과 [[일본]]의 진의를 파악하려 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들의 귀국 후로도 서신을 몇 차례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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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차 수신사 파견에 참여 =====
[[파일:HongYeongSik.jpg|thumb섬네일|160px|right|[[홍영식]]]]
{{참고|제물포 조약|수신사}}
[[1882년]] [[7월]] [[임오군란]]이 [[청나라]]의 개입으로 수습이 됐음에도 일본이 배상을 요구해왔다. 또다시 [[제물포 조약]](濟物浦條約)이란 불평등 조약을 강요당한 조선 조정 여론이 급속히 반일로 돌아섰다. 당황한 개화파들은 일본의 진의를 파악하고 조약을 재협상해 배상금을 줄이려는 목적으로 금릉위 [[박영효]] 일행이 수신사로 가기로 했다. 귀국 직후였던 김옥균 역시 [[대한제국 고종|고종]]에게 다시 방일하게 해달라 건의해 윤허를 얻었다. 수신사는 박영효를 대표로 김만식(金晩植), [[홍영식]], [[서광범]] 등으로 허가가 났으며 김옥균은 동문 [[민영익]]과 함께 고문 자격으로 참여했다. 일본 각계 인사와 인맥을 넓혀 놨던 그였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재협상에 어려움을 겪었다. 다만 일본의 서구식 정부 조직과 [[삼권 분립]]에 깊은 감명을 받고 조선 개혁의 필요를 다시금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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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화파 활동 ====
===== 울릉도 독도 개척 =====
[[파일:letter of Kim Ok-kyun.jpg|thumb섬네일|left|200px|김옥균의 친필 서신]]
 
[[일본]]의 군비 확장과 정한론에 대해 알게되자 [[일본]]이 미구에 침략할 가능성이 있음을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등 개화당 동지들에게 넌지시 비치기도 했다. 아울러 울릉도와 독도 해역에서 포경 사업으로 떼돈을 벌어가던 일본을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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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씨 척신, 척사파 세력과의 갈등 =====
[[파일:Ahn Jungsik-The commemorative feast for Treaty of Commerce between Korea and Japan in 1883.jpg|thumb섬네일|right|200px|[[조일수호조약]] 연회기념도, 건너편 가운데가 김옥균, 앞줄 맨 좌측 무관복을 입은 이는 [[홍영식]], 맞은 편 서양인은 [[묄렌도르프]]이다. 식탁에는 스테이크와 나이프가 보인다.<br />(안중식 작, 1883년)]]
 
[[1883년]] [[음력 2월]] 내부 모순과 거듭된 배상 조약등으로 거덜난 [[조선]]의 재정 문제 때문에 [[묄렌도르프]]가 청나라에서 고문 자격으로 파견됐다. 그는 민씨 외척들을 주축으로 한 수구파들에게 당오전(當五錢)의 주조를 주장했다. 이를 알게 된 김옥균은 펄쩍 뛰었다. 이미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때 발행한 당백전의 잘못을 또 하겠느냐며 급히 상소를 올렸다. 그는 당오전이 재정 확보는 커녕 물가 폭등으로 민심만 이반될 거라며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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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구파 타도 계획 =====
[[파일:Kim Ok-gyun.gif|thumb섬네일|200px|김옥균]]
 
개화파들이 주장해 설립된 [[조선]] 최초의 관립 언론 출판사 [[박문국]](博文局) 발행의 [[한성순보]](漢城旬報)도 폐간 위기였다. [[청나라]] 군사들의 행패를 보도했다가 외교문제로 비화돼 [[일본인]] 직원들이 쫓겨나고 정부 지원이 끊겨 경영난에 빠졌다. 개화파들의 언로가 막힌데다가 김옥균은 외적으로는 외자 도입 실패를 계속 추궁당했고 내적으로는 자객에게 목숨까지 노려졌다. 그는 곧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현재 [[정독도서관]] 자리인 북촌 집에 칩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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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조에가 우물쭈물하자 쓰지 선장이 직접 [[묄렌도르프]]에게 '그런 사람들은 탄 적이 없고 국제법 상 선박은 해당 국가의 영토로 치외법권이며, 수색을 강행하면 외교 문제로 삼겠다'며 추격대를 물리쳤다. 개화당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ref>망명 사건은 [[1942년]] [[7월]] [[조용만]]의 단편 소설 [[배 안에서]]의 소재가 됐다.</ref>
 
[[파일:Kim Ok-kyun's 1885's.jpg|thumb섬네일|right|180px|일본 망명 생활 중의 김옥균]]
 
한편, 김옥균의 아버지 김병태는 [[천안]] 감영에 투옥돼 옥사하고 동생 김각균(金珏均)은 경북 영천 근처까지 도망쳤다가 체포돼 [[대구]] 감영에서 옥사당했다. 어머니 송씨와 여동생은 음독 자살했고, 아내 유씨는 7세된 딸과 [[옥천군]]의 관노가 됐다. 그의 첩 송씨는 옥중에서 살려고 음행(淫行)을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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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금 생활 ====
[[파일:小玉.jpg|thumb섬네일|left|180px|그의 [[일본]]망명생활 후견인이자 연인이었던 일본인 게이샤 스기타니 오타마]]
 
[[1886년]] [[7월]]부터 그는 2년간 절해고도인 오가사와라 섬(小笠原島)에 유배된 데 이어 1888년 8월~1890년 4월 [[홋카이도]](北海道)에 연금을 당한다. 그는 이 무렵 두 명의 일본인 게이샤와 연인관계였는데, 이들 게이샤들은 김옥균이 자주 출입하던 술집에서 만나게 되어 그의 금전적, 정신적 후견인이자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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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명 만류와 암살자의 잠입 ====
[[파일:Hong Jong-woo.jpg|thumb섬네일|left|180px|홍종우 초상화]]
 
[[1894년]] [[2월]] [[리훙장]]과 담판을 지으려고 청나라 [[상하이]]로 건너갔다. [[3월]]초 그가 [[오사카 역]]에 도착하자 조선에서 온 자객인 [[이일직]](李逸直)과 [[홍종우]](洪鍾宇)가 마중을 나왔다. [[이일직]]은 청나라와 일본을 왕래하면서 약재상을 하는 사람이고, [[홍종우]]는 프랑스 유학생이며 자신의 친척이라고 거짓으로 소개했다. 그들은 평소부터 김옥균의 행적을 잘 알고 있고 그들은 옥균을 존경해 왔기 때문에 그들이 청국행 경비를 제공하겠노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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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김옥균 암살 사건}}
 
[[파일:Yoon30.jpg|thumb섬네일|right|160px|[[윤치호]]]]
 
[[1894년]] 3월 중순 경 상하이에 도착한 김옥균 일행은 외국인 거주지 안에 있는 한 여관에 투숙하였다. 투숙한 다음 날 오후, 김옥균 일행은 거리를 구경하기로 하고 오전에는 각자 용무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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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관참시와 복권 ===
==== 공개 부관참시 ====
[[파일:Mudred of Kim Ok-kyun.jpg|thumb섬네일|left|200px|김옥균 암살 당시 일본의 어느 신문사에 실린 기사와 삽화]]
 
사건이 발생하자 [[청나라]] 상하이 경찰은 [[홍종우]]를 체포하고 김옥균의 사체는 [[일본]]인 와다 엔지로의 요청에 따라 [[일본]]으로 인계하기로 했다. 일본 영사관에 인계된 시신은 일본인 지인과 그의 추종자가 손톱과 발톱을 잘라내 봉지에 담아 유품으로 [[일본]] [[도쿄]]로 보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조선 개화파의 존재를 껄끄럽게 여겨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홍종우]]와 김옥균의 사체를 [[청나라]]에게 넘겼고, [[청나라]] 정부는 [[홍종우]]의 범행을 조선인 상호간의 문제라고 하여 다시 조선에 인계하였다.
 
[[파일:Beheaded Kim Okgyun.png|thumb섬네일|right|250px|효수되어 [[한성부]] 저잣거리에 내걸린 김옥균의 수급]]
 
[[1894년]](고종 32년) [[4월 27일]] 유해가 선박으로 옮겨졌고, [[4월 28일]] [[조선]]에 도착한 그의 시신은 강화도 [[양화진]]에서 공개적으로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고, 머리는 저잣거리에 효시된 후 실종되었다. 효시(梟示)된 그의 목에는 '모반(謀反) 대역부도(大逆不道) 죄인 옥균(玉均) 당일 양화진두(楊花津頭) 능지처참'이라고 쓰여진 커다란 천이 나부끼고 있었다. 1894년 4월 28일자 [[일본]] [[시사신보]]에는 양화진에서 옥균의 시을 참시하는 광경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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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와 비판 ==
=== 긍정적 평가 ===
[[파일:Gim Okgyun.png|thumb섬네일|김옥균]]
 
개화사상에 철저히 심취하여 스승 [[유홍기]]가 [[중인]] 신분임에도 그에게 존댓말을 썼다고 전해진다.<ref name="대안40p" /> 이후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명되지 못하거나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왔으나 [[2007년]] 이후 뉴라이트 등 일부 단체에서 '한국 근대화를 빛낸 선각자'로 높이 평가하는 시각이 나타나고 있다. 뉴라이트의 견해에 따르면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가 기존에 청나라에 바치던 조공제도와 문벌제도를 폐지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을 평가, 한국 근대화를 빛낸 선각자로 보기도 한다.<ref>[https://archive.is/20120707114138/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084590 JOINS | 아시아 첫 인터넷 신문<!-- 봇이 붙인 제목 -->]</ref><ref>[http://www.dailian.co.kr/news/n_view.html?id=105946&sc=naver&kind=menu_code&keys=3 토론이 있는 인터넷신문 - 데일리안<!-- 봇이 붙인 제목 -->]</ref><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03240472 donga.com[뉴스&#93;-[사설&#93;역사인식의 지평 넓힐 뉴라이트 대안 교과서<!-- 봇이 붙인 제목 -->]</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