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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왕조 ===
[[파일:British Museum Kang Hou Gui Top.jpg|thumb섬네일|left|초기 주의 제기]]
[[상나라|은 왕조]]에 이어 중국에 성립된 국가가 [[주나라|주 왕조]]이다. 주나라는 기원전 11세기 중엽에 서쪽의 [[웨이허|웨이수이]](渭水) 분지에서 세력을 확대하여,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中原)을 지배했다. 중원이란 황하(黃河) 중류의 남북 지역, 즉 허난(河南), 산둥(山東), 산시(山西)의 대부분과 허베이(河北), 산시(陝西)의 일부이다. 이 광대한 지배권을 유효하게 통치하는 조직이 봉건제도이다. 주 왕조는 일족 공신을 각지에 파견하고 제후의 벼슬을 주어 주(周) 왕실을 지키게 했다. 이와 같은 봉건적 관계는, 이미 은에서 왕과 백의 관계로 성립돼 있었다. 주나라나 제후의 나라는 읍(邑:도시국가)이었고, 그 구조는 씨족적 결합으로 성립되어 있었다. 이 씨족적인 결합은 종법(宗法)에 의하여 규제되어 있었다. 주 왕조는 농업을 장려하고 농지의 개척을 진척하였으나 농기구는 목제나 석제의 기구였다. 기원전 770년, 서방의 이민족 [[서융|견융]]의 침공을 받아 수도 [[풍호|호경]](鎬京)은 함락되고 부도(副都) [[낙읍]](洛邑, 洛陽)으로 동천하였다. 동천 이전을 [[서주]](西周), 이후를 [[동주]](東周)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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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델로스 동맹 ====
{{본문|델로스 동맹}}
[[파일:The Parthenon in Athens.jpg|thumb섬네일|left|아테네의 패권이 절정에 달한 때에 세워진 [[파르테논 신전]].]]
페르시아의 재습격에 대비할 것을 명분으로 하여 기원전 477년의 봄, [[고대 아테네|아테네]]를 맹주로 [[이오니아]]나 [[아이올리스]], [[에게해]]의 여러 섬에 있는 폴리스가 가맹하여 [[델로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 가맹 각국은 군함과 수병을 제공하든가 공부금(貢賦金)으로 대납하든가 하는 의무를 졌다. 많은 가맹국은 안일을 구하여 후자를 택했으므로 결국 아테네가 이들 동맹군 자금을 사용하여 군비를 부담하여 아테네의 무력은 한층 더 강대해졌다. 공부금의 사정이나 징수하는 ‘동맹 재무위원’이 아테네 시민에서만 선출하도록 되어 있던 예에서도 볼 수 있듯 원래 아테네가 주도하는 체제였지만 처음에는 명칭대로 에게해 중앙의 델로스섬에 있던 동맹금고를 기원전 454년에 아테네에 옮기고서는 아테네는 이를 더욱 노골적으로 사유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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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리스의 쇠퇴 ====
{{본문|펠로폰네소스 전쟁}}
[[파일:Helmed Hoplite Sparta.JPG|left|thumb섬네일|[[호플리테스]], 스파르타, 5세기 초|261x261픽셀]]
기원전 431년, 이제까지 대립만을 지켜오던 아테네 맹주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맹주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일어났다. 아테네는 개전했을 때 우세했으면서도 2년 후 페스트가 유행하고, 유능한 지도자 [[페리클레스]]를 잃어 전세가 역전되었다. 아테네는 국부적인 승리에 따라 강화를 맺을 기회가 있었으면서도 모두 놓쳤으며, 기원전 404년 스파르타에 항복하였다. 폴리스 세계의 정정(政情) 불안과 모든 모순이 일시에 드러나서 또다시 전쟁을 초래었으며, [[에파메이논다스]]의 새로운 전법에 의한 밀집 진형이 효과를 발휘하여 기원전 371년 [[레우크트라 전투|레우크트라의 일전]]으로 그리스의 패권은 [[테베 (그리스)|테베]]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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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
[[파일:Ancient india.png|right|thumb섬네일|300px|기원전 600년 경의 십육대국]]
기원전 7세기경 갠지스강 유역에는 크고 작은 도시국가가 난립하여 서로 다투고 있었는데, 기원전 6세기가 되자 군주제를 발달시킨 [[코살라]]와 [[마가다]]의 양국이 강대하게 되어 인근의 나라들을 병합해 갔다. 그래서 기원전 5세기 초부터 양국은 심한 싸움을 되풀이했으나, 결국 마가다가 승리하여 갠지스강 유역 일대의 통일을 실현시켜 그뒤 몇세기에 걸쳐 북인도의 역사에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된다. 이 지방의 정치적 사건은 서사시(敍事詩) 외에도 불교나 자이나교의 경전(經典)을 통해 상당히 자세히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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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왕의 유지를 이어받은 알렉산더 휘하의 마케도니아·그리스 연맹군 3만 5천 명은 기원전 334년 이른 봄 소아시아에 출격하였다. 최초의 전투인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거의 전사할 뻔한 위기를 겪었다. 다음해 가을 [[이수스 전투|이수스의 결전]]에서 처음으로 적왕(敵王) [[다리우스 3세]]와 상면하였다. 양군 모두 정찰대를 내지 않았고 한눈에 볼 수 없는 험로에서 갑자기 맞부딪쳤기 때문에 대병력이 도리어 장애였다. 적은 혼란중에 패해 달아났으며 왕후와 왕자들이 포로로 잡혔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를 계속 쫓지 않고 페니키아 해안을 하나하나 진압하여 기원전 332년에 이집트를 점령하고,  전 331년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였다. 기원전 331년 이른 봄, 다리우스와 자웅을 다투려고 다시 북상, 10월 1일 [[가우가멜라 전투|가우가멜라에서 결전]]이 이루어졌다. 알렉산더 대왕은 다음 해 겨울, 다리우스의 [[페르세폴리스 궁전]]에 불을 질러 전쟁이 완료했음을 증거로 삼고, 적의 수도 [[엑바타나]]에 입성, 거기서 연맹군을 해산시켰다.
[[파일:MacedonEmpire.jpg|thumb섬네일|300px|알렉산드로스 제국(마케도니아 제국)의 영토]]
대왕은 새로 고참 정병(精兵), 종군 희망자, 현지민 징모병 등으로 군대를 다시 편성하여 아케메네스 왕조의 유령(遺領)을 평정한다는 새로운 목적을 갖고 다시 진군을 개시했다. 7월 1일 다리우스 3세가 [[박트리아]]에서 [[베수스]]에게 암살되었다. 정로(征路) 요지에 수많은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면서 군대는 황량한 지역을 전전(轉戰)하기를 6,000여 km, 수많은 소전투보다도 갖가지 고난과 풍토병에 시달리면서 3년을 소비하여 일단 유령의 동북 지역 평정을 완료했다. 기원전 327년 초여름 [[인더스 강|인더스강]] 방면에 작전 개시하여, 완고한 적 [[파우라바 왕국|파우라바]] 토후의 항복을 받았으나 히파시스강 선에서 휘하 장병 모두가 이 이상의 동진에 반대하여 대왕은 부득이 군대를 되돌렸으며, 결국 인더스강이 그의 제국 동쪽 한계가 되었다. 기원전 323년 봄, 대왕은 제국의 수도 바빌론으로 돌아갔으나 돌연 열병에 걸려 동년 6월 13일 급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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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로마 ===
{{본문|고대 로마}}
[[파일:Vexilloid of the Roman Empire.svg|thumb섬네일|150px|left|[[SPQR]] "로마의 원로원과 인민"을 뜻하며, 로마 정부의 공식 표어였다.]]
기원전 6세기 말 왕을 에트루리아로 쫓아버린 로마 귀족들은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귀족 지배는 평민의 투쟁에 의해 여러 차례 위기에 처했었지만, 원로원의 지도하에 타협하여 결국은 귀족 지배를 강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한편 밖으로 눈을 돌리면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에 에트루리아의 세력은 여전히 강하였으며, 또 아펜니노 산맥의 아에퀴인, 볼스키인의 평지 진출도 격심하였다. 기원전 5세기의 로마는 방어전에 힘쓰다가 5세기 말에 이르러 공세로 전환했으나 그 직후 갈리아인으로부터 큰 타격을 받았다. 칼리아인으로부터의 타격과 신분 투쟁을 수습하게 되자 기원전 4세기 후반에 라티움의 도시들과 싸워 이들을 굴복시켰으나 단순한 종속은 아니었다. 로마가 삼니움, 에트루리아, 남이탈리아에 세력을 확장할 때 라티움의 도시들이 공동 출병하고, 정복한 도시들로부터 빼앗은 영역에, 역시 공동으로 ‘라틴인 식민시’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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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제정 ====
{{본문|로마 제국}}
[[파일:Roman Empire Trajan 117AD.png|thumb섬네일|300px|117년의 로마 영토]]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후에, 속주에서의 반란, 이탈리아의 노예 반란, 동맹시 전쟁(전 91-전 88) 등 로마의 계속되는 위기는, 자비로 군대를 편성한 유력자들에 의해 극복되었으나 그들의 군사력은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국내로까지 향하였다. 정계의 대립이 무력으로 해결하게 되어 내란의 위험은 오히려 강해진 한편 지금까지 국정을 담당했던 특권적 지배층은 국가의 이익보다도 그 특권을 중시하는 보수 세력인 [[옵티마테스|벌족파]]가 되고 있었다. 실력자들도 이와 정면으로 대결하기를 피하고, 민중파가 되어 국가 제도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민회의 결의를 무기로 벌족파에 대항하였다. [[종신 독재관]]에 오른 [[율리우스 카이사르|카이사르]]는 공화주의자에 의해 암살되었나, 그 정책은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에 의해서 추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