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 혁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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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역사}}
[[파일:William and Mary Guinea 612668.jpg|left|thumb섬네일|[[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윌리엄 3세]]와 [[잉글랜드의 메리 2세|메리 2세]]가 그려진 금화]]
'''명예혁명'''(名譽革命, Glorious Revolution)은 [[영국]]에서 [[1688년]]에 일어난 [[혁명]]이다. [[의회]]와 [[네덜란드]]의 [[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오랜지공 빌럼]]이 연합하여 [[잉글랜드의 제임스 2세|제임스 2세]]를 퇴위시키고 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로 즉위하였다. 이때 일어난 혁명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명예롭게 이루어졌다'라고 해서 명예혁명이라 이름 붙였다.
 
한편 명예혁명은 영국의 [[의회 민주주의]]를 출발시킨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어떠한 영국의 왕조도 의회를 무시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또한, 당시 작성된 [[1689년 권리장전]]은 [[영국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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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회와 대립하는 국왕 ===
[[파일:James II of England.jpg|thumb섬네일|제임스 2세]]
[[1686년]] [[제임스 2세]]는 "국왕 법정"을 개최하여 로마 가톨릭의 관료 기용을 제한하는 [[심사율]]의 폐지를 강요하여 영국 성공회의 런던 주교이자 대표적인 로마 가톨릭 반대자인 핸리 콤프튼을 퇴위시키고 [[옥스퍼드 대학교]]의 맥달런 컬리지의 개신교도 교직원을 해고하고 그 자리를 로마 가톨릭 신도로 채웠다. 또한 제임스 2세는 많은 로마 가톨릭 신도를 상비군으로 고용하였는데 이는 의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제임스 2세의 전횡이었다. 제임스 2세는 수도 근교인 [[하운슬로우]]에 3만 4천여 명의 상비군을 주둔시켰다. [[1688년]] 제임스 2세는 영국의 모든 교회에서 [[양심의 자유 선언]]을 낭독하라는 칙령을 반포하였고 이를 거부한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샌크로프트]]와 6명의 주교를 수감하였다. 그러나 공개 재판에서 런던의 군중들은 그들에 대해 무죄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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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렌지공 윌리엄 ===
[[파일:William III of England.jpg|thumb섬네일|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
윌리엄은 1년여에 걸쳐 영국 정치에 영향을 행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윌리엄은 [[1687년]] 4월 그의 사절을 영국의 [[토리당]]과 [[휘그당 (영국)|휘그당]] 지도자들에게 보내 비밀 편지를 전달하였다. 그는 사절을 통해 자신의 계획에 대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았으나 만약 전제정치에 반대하려고 한다면 자신은 왕족의 권리를 사용하여 그들과 함께할 것임을 약속했다. 윌리엄은 그 대가로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한 [[잉글랜드]]의 군사력 동원을 요청하였다. 이는 윌리엄이 새로운 가톨릭 왕위 후계자 때문에 늦어도 11월까지 영국을 침공하기로 협약한 것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으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영국과 프랑스가 항로에 있는 함대의 지원에 대해 상호합의한 [[1688년]] 4월, 윌리엄은 군사적 정치, 재정적 지원을 받기 위해 필사적이었기 때문이다.<ref>D. Hoak, The Anglo-Dutch revolution of 1688-89, p.2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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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의 상륙 ==
[[파일:Prince of Orange engraving by William Miller after Turner R739.jpg|thumb섬네일|윌리엄공의 상륙]]
=== 출항과 도해 ===
윌리엄은 비밀의 유지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란 점 때문에 신속히 수송선에 병력과 물자를 채워 넣었다. 9월 22일 시작된 수송 준비는 10월 8일 완료되었고 홀란드 주 의회에 보고되었다. 같은 날 제임스 2세는 이것이 네덜란드의 잉글랜드 침략이라 선포하였다. 10월 10일 윌리엄은 헤이그 선언서를 반포하고 6만 장을 제작하여 잉글랜드에 살포하였다. 선언서를 통해 윌리엄은 자신의 군사 행동이 오로지 개신교와 자유로운 의회를 위한 것이며 [[웨일즈 공]]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일 뿐이라 천명하였다. 그러나 제임스는 두 번째 성명을 통해 윌리엄은 왕위를 찬탈하려는 침략자일 뿐이라 단정하였고 더이상의 설전은 의미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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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륙과 진군 ===
[[파일:Arrival of William III of Orange in England.jpg|thumb섬네일|진군하는 윌리엄공의 군대]]
율리우스력 11월 7일(그레고리력 11월 17일) 바람이 남서풍으로 바뀌어 [[조지 렉]]의 지휘하에 있던 영국 함대는 추격에 실패했다. 당시 프랑스 함대는 [[교황령]]을 공격하기 위해 [[지중해]]에 집중돼 있었다. 루이 14세는 잉글랜드의 내전이 그의 독일 전투에 초래할 영향을 염려하여 11월 26일(그레고리력)까지 사태를 관망하며 선전 포고를 미루었다. 네덜란드 함대는 이 상륙을 "영광의 도해(渡海)"라고 명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