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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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부 전선 ===
[[파일:Bundesarchiv Bild 101I-718-0149-12A, Paris, Rommel, von Rundstedt, Gause und Zimmermann.jpg|thumb섬네일|게르트 폰 룬트슈테트가 중앙, 에르빈 룸멜이 왼쪽, 알프레드 게스와 보도 지멜만이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히틀러가 룬트슈테트를 다시 찾은것은 1942년 3월이었다. 룬트슈테트는 다시금 [[서부전구 최고사령부|서부전선의 지휘]](OB West)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마지못해 이 일을 맡았고, 1943년 가을까지 전체 대서양 해안가에 이렇다할 [[요새|방어선]]도 구축하지 않았다. 명목상 룬트슈테트의 휘하였지만 사실상 교체에 가까운 형태로 [[롬멜]](Rommel)이 부임하고 나서야 대서양 방어선이 구축되기 시작하였다. 룬트슈테트는 기갑전력을 전선 후방에 배치하여 그때 그때 연합군이 상륙하는 곳으로 달려가 타격하는 방식을 제안하였고, 기갑부대 지휘관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슈베펜부르크]](Schwuppenberg)도 이를 지지하였다. 반면 롬멜은 연합군의 함포 사격 사정권을 겨우 벗어난 해안가 가까운 위치에 기갑부대를 배치하여 기갑부대 이동중 연합군의 항공기 공격 피해를 최소화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아프리카 전선에서 겪은 뼈아픈 고생에 따른 결과였다. 연합군의 항공기들은 독일 기갑부대가 낮 동안 이동하는 것을 봉쇄하였고, 밤에도 꾸준히 방해를 하였던 것이다. 롬멜은 연합군의 상륙지가 의심의 여지 없이 [[노르망디]](Normandy) 부근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이곳에 최소한의 기갑전력을 배치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연합군의 상륙이 노르망디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한 룬트슈테트는 롬멜의 제안이 미친 도박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동안의 굼뜬 활동으로 인하여 룬트슈테트의 지휘권은 이미 거의 소진된 상채였고, 롬멜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 기갑사단들은 분산배치 되었으며, 세느(Seine) 강 서쪽의 북프랑스 연안에는 두개의 사단, 노르망디 구역에 한개 사단이 배치되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면서 룬트슈테트는 히틀러에게 연합군과 평화회담을 개최할 것을 주장하였고, 히틀러는 그를 [[귄터 폰 클루게]](Gunther von Kluge) 장군으로 교체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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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이후 ==
[[파일:Gerd von Rundstedt.jpg|thumb섬네일|upright|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룬트슈테트는 1945년 5월 1일 [[미국 제36 보병사단]](US 36th Infantry Division)에 체포되었다. 심문에다 심장발작으로 괴로운 나날들이 지속되었고, 그는 영국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그는 소련 영내에서 벌어진 대략학살의 책임자로 영국에 의해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그의 부하였던 제 6군의 사령관 [[발터 폰 라이헤나우]]가 1941년 10월 10일 명령한 악명높고 유혈낭자한 '라이헤나우 명령서(Reichenau Order)' 때문이었다. 당시 룬트슈테트는 라이헤나우 명령서의 사본을 받고 이를 그의 휘하 다른 부대들에 전달하여 향후 그러한 양식을 따라서 명령을 하달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는 또한 처형부대(Einsatzgruppen)에도 협력적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에 룬트슈테트는 무장친위대(SS)의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했지만 무죄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큰 사안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한번도 재판을 받지 않았는데, 그의 건강 상태가 악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국 기소 수행 팀이 영국의 기소에 대하여 정치적인 이유가 있는 것으로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1948년 석방되었고, 1953년까지 하노버(Hannover)에서 살다가 숨을 거두었다.